나는 왜 고전이 좋았을까 - 오래된 문장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
신은하 지음 / 더케이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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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을 무렵, 고전 소설 몇 개를 읽고 선입견을 가진 적이 있어 한동안 고전 소설을 읽지 않았다. 내가 읽은 작품만 그런 건지 몰라도 주인공이 괴짜에다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가치관으로 사로잡혀 쉽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래, 이 작품은 나이가 들면 다시 읽어보자, 이런 식으로 넘겨왔다. 이제는 삶이 힘들 때 고전 소설만큼 나에게 위로를 주는 책이 없다는 것을 안다. 반복해서 읽어도 좋고 내용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몰라도 책장에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주는 책이 있다.

책은 저자가 읽은 몇 편의 고전 속 내용들을 반추하며 느꼈던 감정이나 일화를 소개한다. 저자는 독서 모임이나 고전 문학 함께 읽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벽돌책도 완독했고, 같은 문장이라도 타인의 시선을 만나면 다른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며 사람들과 같이 책을 완독하는 것의 장점을 설파한다. 나는 독서 모임을 해 본 적은 없으나 결이 맞는 사람들과 책을 같이 읽고 느낀 점을 서로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 좋은 취미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같은 책, 같은 문장이라도 서로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과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시야가 넓어질 수도 있으리라.


목차를 보니 내가 읽었던 책이 3분의 2 정도였다. 훗, 내가 고전을 좀 읽었네 하며 뿌듯함과 동시에 전혀 몰랐던 책도 있어서 저자가 들려주는 짤막한 줄거리 속에서 의미를 찾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고전 속 인물들의 엉뚱하고도 기이한 행동, 무슨 말인지 모를 해학적인 말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순간의 선택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고전을 계속 읽을 것이다. 저자는 매일 루틴처럼 박경리의 토지를 조금씩 읽으며 완독했다고 한다. 나의 독서 로망이 있다면 그건 바로 토지 완독이다. 워낙 등장인물이 많기도 하고 내용이 방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집으로 한 번에 사놓고 아껴 가며 조금씩 읽어야지.

​꼭 고전이 아니더라도 본인 취향에 맞는 책부터 조금씩 읽어나가다 보면 책 읽는 습관이 잡혀 어느새 책을 읽지 않으면 허전한 날들이 온다. 나 역시 매일 조금씩 꾸준한 루틴으로 독서하는 습관을 들였던 것 같다. 주로 소설 위주로 읽지만 삶이 팍팍하고 인간관계가 부질없다고 느낄 때, 마음이 답답할 때면 고전소설을 찾게 되는 것은 왜일까. 이것이 고전소설의 힘일까.

당장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가치관이 이해가지 않더라도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는 아! 이제는 이해할 수 있겠다 하며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고전소설의 힘.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위로를 받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을 토닥여준다. 재산을 두 딸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지만 버림받은 고리오 영감, 평생을 하인으로 몸 바쳐 일하느라 사랑이 다가와도 알아채지 못했던 스티븐스 집사가 짠하면서 애틋하다. 고전소설을 읽는 일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면서 인물의 생애를 통해 내 삶을 통찰하고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것 같다. 그래서 나 역시 고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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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뢰 글리코
아오사키 유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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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이 책은 추리/미스터리 소설로 분류되지만 살인 사건이 일어나거나 어떤 불가사의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 오로지 게임으로만 승부하는, 소위 두뇌 배틀 서바이벌 판이다. 한때 나는 보드게임을 좋아해서 보드게임 소모임에 가입했는데 여기 책에 나오는 다섯 가지 게임 중에 두 가지 게임이 겹칠 정도로, 누구에게나 친근하면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게임만 다루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고 가독성이 좋았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이토록 단순한 게임들은 마토라는 소녀를 거치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에 땀을 쥐게 되는 본격 두뇌 배틀 게임으로 변모하게 되니 말이다.


이 무시무시한(?) 게임의 시작은 지뢰글리코부터 시작된다. 고등학교 1학년인 마토는 고등학교 축제 때 옥상 사용권을 두고 3학년인 구누기 선배와 겨루게 된다. 지뢰글리코는 평범한 계단 오르기 게임이다. 다만, 변형된 규칙이 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계단을 오르지만 숨겨진 지뢰를 밟으면 한 번에 10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가혹한 게임이다. 마토의 친구인 고다는 구누기와 대결을 벌이는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허세를 부리는 마토를 지켜보면서 마토가 당연히 게임의 달인인 구누기 선배에게 질 것이라 예상한다. 하지만 막판에 허를 찌르는 마토의 공격으로 구누기는 처참하게 패한다.


계속해서 하는 게임마다 승리를 거머쥐는 마토의 소문이 학생회 회장에게도 전해지고, 학생회 회장은 마토를 학생회에 가입시키려 한다. 그래서 마토와 자유 규칙 가위바위보를 하지만 이 게임도 역시 치열한 접전 끝에 마토 승! 마토는 자기가 게임에 이겼으니 세이에쓰 학교에 재학 중인 에소라와 맞붙게 해달라고 한다. 고다는 에소라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중학교 3학년 졸업식 때 마토와 같이 에소라를 본 것이 마지막. 마토는 고다 모르게 에소라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 이후로 에소라와 서먹하게 지내고 연락도 안 하는 것 같다. 왜 마토는 에소라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마토가 에소라와 맞붙기 위해서는 달마 인형이 셈했습니다라는 게임을 해야 한다. 우선 세이에쓰 학교 학생회인 스도라는 학생에게 이겨야 하는데, 이 스도라는 사람도 만만치가 않다. 초반에 마토의 머릿속을 읽어 내려가듯 스도 역시 똑같은 전략으로 치고 나가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허의 허를 찌르는 수법으로 마토에게 패하고 만다.


드디어 마지막 게임인 포 룸 포커. 마토는 드디어 에소라를 이 게임에서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포커 게임에 역시 몇 가지 규칙이 수반되는데 가장 복잡하면서 어려운 게임이라 할 수 있다. 기억력도 좋아야 하고 카드를 버리고 선택할 때는 각 룸에 들어가야 하는데 5분이라는 시간 제한도 주어진다. 심지어 마토는 카드를 뽑고 나서 2장을 보존하고 있다가 에소라에게 걸리기도 한다. 처음부터 에소라는 마토의 전략을 꿰뚫듯이 훤히 알고 있었고, 마토 역시 에소라의 다음 행동을 추측하며 예상 시나리오를 꼼꼼히 짠다.


손에 땀을 쥐는 둘의 승부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마토가 에소라를 그토록 이기고 싶어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다섯 가지 게임 중 어느 하나 흥미진진하지 않은 승부가 없다. 마토가 타고난 천재 소녀라서가 아니다. 게임에 변형된 규칙이 수반되면서 이미 어떻게 이겨야 할지 마토 머릿속에 계획이 있기도 하지만, 그녀는 상대의 허점을 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이른바 빅 픽처인데, 대단한 잔머리를 가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것 같다. 이번엔 어떤 꼼수와 잔머리로 상대를 제압할지, 게임이 시작하기도 전에 흥분된다. 게임이 끝났을 땐 그녀의 전략에 경악하면서도 허무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에필로그에는 마치 시즌 2를 예고하는 듯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마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떡밥일 수도 있지만, 지뢰 글리코 2가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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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로의 미궁
가미나가 마나부 지음, 최현영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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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여름이라 그런지 각 출판사마다 추리소설이 나오고 있는데 요즘 대세가 벽돌책인지 신간들마다 책 두께가 상당하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다. 이렇게 평면도가 그려져 있으면 독자 입장에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폐쇄된 공간, 연쇄 살인사건, 범인 찾기! 심장이 두근두근.

​어느 호숫가 근처 펜션에서 총 8명이 모인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범인을 찾아야만 한다. 1층 원탁 등받이 의자에는 각자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또한, 방도 이미 배정되어 있어서 잠을 자거나 쉴 때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면 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관 시리즈의 장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도입 부분이 상당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 십각관의 살인이나 밀실에서의 살인 사건을 다룬 추리 소설들과 전혀 다른 스토리로 전개되며 심지어 다 읽고 나서도 이게 맞아? 의심하게 되는 나를 볼 수 있다. 그만큼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8명 가운데서도 주인공은 쓰키시마라는 인물이다. 쓰키시마는 대학생이지만 신출내기 추리소설 작가이다. 친구인 나가토에 의해 이 펜션에 오게 되었으며 나가토는 쓰키시마가 꼭 범인을 찾을 거라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 쓰키시마가 추리소설 작가라는 것을 알아버린 참가자들도 은근 쓰키시마에게 의지하며 그의 활약을 기대한다. 그런데, 쓰키시마와 나가토가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그들 방 문틈으로 쪽지가 도착한다.

나가토와 쓰키시마는 쪽지 내용을 통해 피해자 중 적어도 한 명이 여성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그런데 왜 범인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죽인다는 표현을 쓴 것일까? 쪽지를 받고 아래층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내려가보니 첫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참가자들이 아닌 이벤트 주최측에서 남녀 한쌍이 시신으로 발견된 것. 그 남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참가자들에게 방 열쇠를 전달해 주었던 사람들인데 스태프 룸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것이다. 최초 목격자가 된 쓰키시마는 범인이 남자를 죽이고 나서 몸을 뒤집어 놓았다는 것,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죽었다는 것, 밀실 살인사건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참가자들에게 정보를 공유하며 같이 범인을 찾으려 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쓰키시마와 나가토만 제외하고 참가자들 모두가 레이라는 여성을 아는 눈치다. 심지어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에 나쓰노가 레이를 강제로 방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쓰키시마, 신조, 앗슈의 도움으로 레이는 위험한 순간을 모면하게 된다. 쓰키시마는 이들끼리 서로 과거와 비밀이 뒤엉킨 무언가가 있구나 짐작한다.


이 소설이 갖고 있는 독특한 점은 두 가지 시점으로 사건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하나가 쓰키시마의 시점이라면 두 번째 시점은 청년 A를 중심으로 이 청년이 누구인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를 파헤치는 경찰 사와의 시점이다. 청년 A는 별안간 사와가 근무하는 경찰서에 나타난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한 손에 칼을 들고 온통 피범벅으로 사와 앞에 나타나지만 살려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쓰러지고 만다. 사와는 구가경감과 함께 최면 요법을 통해 기억상실에 걸린 청년 A에 대해 파헤치게 되고 점점 경악할 만한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혼란스럽다. 살인사건의 범인도 찾아야 하고, 청년 A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거기에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레이는 어떤 여자인가. 참가자들은 왜 레이한테 집착하는가.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오리무중 속에서 흩어져 있는 퍼즐이 서서히 맞추어져 가는 과정을 즐기면 된다. 단순한 추리 소설이 아닌 각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한, 특히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룬 작품이다. 인간의 상처와 죄책감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괴물이 무력감과 공포감을 만들고 진실을 왜곡할 때, 우리는 그 진실을 가려내고 어떻게 허상의 두려움을 걷어낼 수 있을까. 미스터리한 소재와 예측하기 힘든 반전이라는 점에서 재미는 물론,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완벽했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가히 독보적인 작품이다. 명 가운데서도 주인공은 쓰키시마라는 인물이다. 쓰키시마는 대학생이지만 신출내기 추리소설 작가이다. 친구인 나가토에 의해 이 펜션에 오게 되었으며 나가토는 쓰키시마가 꼭 범인을 찾을 거라고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 쓰키시마가 추리소설 작가라는 것을 알아버린 참가자들도 은근 쓰키시마에게 의지하며 그의 활약을 기대한다. 그런데, 쓰키시마와 나가토가 방에서 쉬고 있을 때 그들 방 문틈으로 쪽지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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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장하나 옮김 / 성림원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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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읽는 건 이번이 두 번째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 성림원북스에서 나온 걸 읽었는데 이번에도 번역이 참 매끄럽고 깔끔해서 마음에 든다. 같은 작품이라도 번역이 매끄럽지 않거나 부자연스러우면 집중이 안 돼서 읽기 힘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에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없다. 주인공인 나와 선생님, 주인공의 가족, 선생님 친구였던 K와 선생님의 부인. 나는 작품 중에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렇게 간결하고 심플한 인물 구성을 좋아한다.


주인공인 나는 학생 시절에 가마쿠라의 한 바닷가에서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가마쿠라에서 몇 마디 나눈 것을 계기로 나는 그 후에도 일부러 선생님댁을 찾아가며 친분을 쌓는다. 왜 주인공이 선생님과 친해지려는 마음을 먹은 것인지, 선생님에게 어떤 매력을 느낀 것인지에 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주인공의 마음을 굳이 추측해 보자면, 왜 우리도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 매력을 느끼고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성별을 떠나서 그냥 끌리는 사람. 아마도 주인공인 나는 그런 마음으로 선생님을 곁에 두고 그에 대해서 알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반면 선생님은 뭐랄까. 뭔가 항상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사람으로 염세적이면서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일관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 날, 주인공인 나는 선생님댁에 불쑥 찾아갔지만 선생님의 부인으로부터 선생님이 묘지에 갔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나는 선생님이 갔다는 묘지로 발길을 돌리게 되고, 그 묘지 부근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어쩐지 선생님의 표정은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또 그늘이 져 있다. 또한 그것이 누구의 묘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님과 나의 대화는 요령부득이다. 내가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면, 선생님은 속시원히 대답을 들려 주지 않고 애매하게 말하거나 추상적으로 모호한 대답을 해서 나에게 사상적으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무슨 남녀관계에서 썸 타는 사이처럼, 선생님의 대답 하나로 나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한다. 과하게 표현하면, 주인공이 선생님에게 집착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특히 사상적으로 점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간다. 신장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언제 몸 져 쓰러질지도 모르고, 어머니 혼자 병수발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어 선생님 내외분께 인사를 드리고 고향으로 간 것이다. 꽤 오랫동안 고향에서 아버지 병간호를 하는 와중에도 나는 선생님에게 전보를 보내기도 하고, 답장을 기다리면서 아버지의 병환과 선생님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며칠 후에 형으로부터 건네받은 두툼한 종이 속의 글씨들 중 한 문장을 읽고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는다.


p.163 ˝그때 내가 알고 싶은건 오직 선생님의 안부뿐이었다. 선생님의 과거, 전에 내게 얘기해주겠노라 약속했던 어슴푸레한 과거, 그런 건 이제 내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목차에도 나와 있듯이 그 전보는 짐작대로 선생님의 유서이다. 아버지의 병이 위중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급하게 전차를 타러 가고 전차 안에서 그 유서를 읽는다. 믿기지 않는 선생님의 죽음.

그렇게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던 선생님의 과거는 그 두툼한 종이에 아주 자세하게 쓰여 있다. 선생님이 왜 인간을 경멸하게 되었고 끝내 염세주의에 빠졌는지에 대한 작은 아버지 이야기부터 하숙집에서 만난 아가씨와 아주머니, 그리고 친구 K의 이야기까지 상세하게. 선생님은 K를 극한으로 몰고 간 것은 자신이라고 탓하며 자책과 죄책감 끝에 생을 마무리 한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고 경멸했던, 탐욕스러운 작은 아버지. 그런 작은 아버지를 어느새 닮아버린 자신에게 소름이 끼친 것이겠지.



나는 선생님의 과거를 알고 어땠을까. 생각지 못한 선생님의 죽음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선생님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을지 모르나 그가 선생님을 워낙 잘 따르고 좋아했기에 감히 그 마음을 헤아릴 수조차 없다.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무어라 정의할 수 있을까.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각자의 내면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말 듯 애매하고 불투명하기만 하다. 인간의 마음은 강철같이 단단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지탱하고 있던 끈이 끊어졌을 때 그 마음이 나약해져서 선생님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것일까. 자의적으로 고독을 택한 선생님에게 살아 있는 나날들은 지옥이었음이 틀림없다. 내 마음이지만 나조차 알 수 없는 마음들로 빚어내는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의 복잡한 내면과 감정들을 섬세하게 그려낸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마음이 힘들 때마다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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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니카의 아이들
미치 앨봄 지음, 장성주 옮김 / 윌북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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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하루아침에 누군가로부터 자유를 침해 당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된다면?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하는 것 자체가 버거운 하루하루가 이어져, 인간의 존엄이 파괴당하는 끔찍한 일들이 당연스럽게 자행된다면?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들은 언제나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다. 예전에는 이런 유의 소설을 일부러 멀리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로 하여금 우리는 작금의 세태를 돌아볼 수 있거니와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무턱대고 이런 책들을 멀리할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진실을 알아나가고 그 진실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권리가 있고, 비판하고 소리 내며 그건 잘못되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

라자르, 니코, 세바스티안, 파니는 그리스 살로니카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건 딱 하나. 이 전쟁이 끝나게 해 달라는 것.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잔혹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이제는 시너고그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고, 기도조차 숨어서 해야 한다. 독일군이 모든 것을 약탈하는 순간에도 니코와 세바스티안의 할아버지인 라자르는 세상의 모든 선함에 대해 주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자고 한다.

1943년 어느 일요일 아침, 이날은 니코와 세바스티안의 집에서 몰래 수업이 열리는 날이었다. 유대인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니코는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비밀 장소인 벽장에 숨어 있었는데, 하필 이때 무심코 숨은 니코의 행동은 걷잡을 수 없는 일로 번지게 된다. 이 벽장을 우연히 발견한 파니가 니코를 따라 같이 숨었던 일도. 니코는 벽장에서 숨은 채, 가족들과 생이별을 한다. 그 후로 다시는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벽장에 숨어 있다가 안전한다고 생각해서 나온 파니에게도 불행이 닥친다. 아버지가 눈앞에서 독일군에게 총살 당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한 편, 세바스티안은 집에서 끌려나가기 전에 벽장에 니코와 파니가 같이 있는 걸 목격한 후 질투심에 사로잡혀 부모님에게도 끝내 니코의 행방에 대해 함구한다. 세바스티안은 남몰래 파니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page 161. ˝거짓말을 결코 하지 않던 그 소년은 1943년 살로니카의 기찻길 위에서 정직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렸어요.˝

정직이라는 허물이라니. 이런 역설적인 표현이 또 있을까. 벽장에 숨어있던 니코는 어떻게 되었을까? 니코의 집을 빼앗은 독일군 장교, 우도 그라프는 벽장에서 니코를 발견하고 니코의 정직함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보내고자 계략을 짠다. 뒤늦게 우도에게 이용당한 것을 알고 분노와 격분으로 휩싸여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니코. 이제 정직과는 거리가 먼, 거짓말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며 돌이킬 수 없는 그날로 여러 번 돌아간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했던 말. 자신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말. 그토록 정직했던 바보 같은 자신을 원망하며 말이다.

page.249
˝니코는 부자가 됐어요.
세바스티안은 집착에 빠졌군요.
파니는 어머니가 됐고요.
우도는 스파이가 됐네요.˝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리 등장인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니코는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을까. 세바스티안은 무슨 집착에 빠졌을까. 파니는 누구의 아내가 되었을까. 책의 후반부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꿋꿋하게 살아온 인물들이 겪는 일들과 사건에 대해 쉼 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과거 자신의 만행을 숨기고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신분을 숨기고 사는 우도 그라프의 행적에 대해서도. 우도는 쫓기는 와중에도 나치의 부활을 꿈꾸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 뼛속까지 유대인을 무시하고 더럽다고 생각했던 우도의 마지막 운명은?

전쟁과 학살 속에 소리 없이 자행된, 유대인에게 닥친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는 소설이다. 어떤 인종이 우세한지, 열등한지의 판단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이며 왜 죄 없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억압당하고 이용당해야만 했을까. 가슴 아픈 일들을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나, 현재를 사는 지금도 우리는 그들의 슬픔과 희생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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