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
권명아 지음 / 책세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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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권명아, 『음란과 혁명』, 책세상, 2013.

 

한국사의 파토스케이프와 혁명의 가능성

오영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첫 장의 목차가 아니라 맨 뒷장에 숨겨져 있는 이미지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것을 조심스럽게 ‘정념의 풍경들-파토스케이프‘(Pathoscape=Pathos+

Landscape)라고 불러본다. 공을 들여 칼라로 인쇄했을 페이지에는 1910년부터 2000년 초반까지, 한국사에서 배제한 부적절한 정념들의 연대기가 모던 아트의 감각으로 펼쳐져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역사 자료들과 문서고를 살펴보며” 얻은 “어떤 ‘이미지’”를 “지식의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담고 있다.

그러니 간혹 이 책의 목차와 서술방식에서 보여지는 비논리성을 지적하기 앞서 이 ‘모든 부적절함’이 아래의 이미지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산개(散開)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식민지 계몽기의 음란한 계집들에 대한 이광수의 논평’, ‘뒷골목에서 유행하던 점괘놀이와 저속한 노래집들’, ‘풍속괴란을 야기하는 구소설들’, ‘1930년대 에로 그로 넌센스의 독물들과 이에 대한 통제’, ‘풍기문란을 이유로 금서가 된 에밀졸라의 『나나』’, ‘냉전과 풍기문란의 수사학이 결합된 ’정조 38선‘이라는 은유’, ‘망국병이 되어버린 풍기문란’, ‘퇴폐와 암흑으로 치부된 3.1 운동 이후의 문학사’, ‘범죄자가 된 소년-장정일’, ‘혁명 이후 범죄의 가능성이 농후한 위험한 주체들: 미성년과 하층 여성(남성)들’.


  당연히 위 잡다들을 꿰어낼 만한 논리적 구성은 불가능해 보인다. 정상성의 범주에는 사회유지를 위한 미풍양속, 국가재건을 위한 건전한 신체가 있다. 그 외의 것들은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배제되며 포섭될 뿐인 것이다. 이들은 미풍양속이 아닌 것, 건전한 신체가 아닌 것이므로 그들 사이에선 그 어떠한 일관성을 가지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명아가 그려낸 한국사의 파토스케이프는 소위 정상성에 대한 부정진술들의 총체성을 담는다. 독자는 부적절한 정념들 각각의 선정적 측면이 아니라 그 부적절함들이 만들어낸 성좌를 보기를 권한다. 이 예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그동안 통제되어온 정념들이 ‘고독’과 ‘외로움’의 대기를 찢고 서로를 물들였을 때, 정념은 정동적 차원으로 이행되어 정치로 나아갈 가능성을 가진다.

  때문에 이 책의 문제의식은 정념통제의 파놉티콘에 대한 단순한 폭로에 있지는 않다. 이 책의 제목처럼 『음란과 혁명』, 즉 ‘음란’을 ‘혁명’과 연결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간의 문화론적 연구와 차별점을 만드는 요소이다. 그동안 국문학 기반을 가지고 문화론적 방법론을 접목한 일련의 연구들은 문학제도에 대한 연구에서 그 저변의 매체에 대한 관심, 그리고 본격적인 풍속/습속연구로 나아가는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권명아는 이 보다 더 나아간다. 그는 풍속의 본질을 제도화의 결과라고 진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제도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제도 밖으로 몰았는지 초점을 옮겼으며, 비표상적 차원에 놓여있는 그것들을 언어적 차원으로 옮겨놓으려 노력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음란’을 ‘혁명’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행위는 그 자체로 시적이다.

  그런 입장에서 필자는 이 책의 전․중반부를 차지하고 있는 도표와 통계에 의거한 연구보다 후반부 의 사유를 더 사랑한다. 여기서 그는 아주 과감한 태도로 4.19의 도화선이 되었던 소년 김주열의 훼손된 육체와 4.19 이후 태어난 소년 장정일의 범죄적 육체를 연속성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4.19에 대해 종종 잊고 있는 것은 4월 혁명의 주체는 고등학생이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당시의 고등학생과 오늘날의 고등학생의 성숙도가 다르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권명아가 보기에 이는 어디까지나 소년소녀에게서 그 위험한 정치성을 거세하는 수작에 불과한 것이다. 최루탄이 박힌 모습으로 귀환해 온 세상을 혁명의 도가니로 물들인 소년 김주열이 소년 장정일이 되어 보호라는 명분하에 관리되어야 할 범죄자로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5.16이 되어버린 4.19에 대한 반성은 가능하다. 문제는 4.19는 어떻게 다시 한번 가능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4.19의 혼란을 자유로서 전유하지 못하고 성급히 5.16의 질서로 귀결시켰다는 것이 다소 모호한 반성이라면 4.19의 불씨를 낳은 그 미성숙한 주체들에 대한 재고는 보다 명확하면서도 실천적인 반성일 것이다. 때문에 그는 다소 거칠게 질문한다. 90년대 후반 충격을 준 10대 섹스 스캔들 ‘빨간 마후라’의 소녀는 ‘촛불 소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부적절한 주체-서벌턴은 비단 미성숙의 소년소녀뿐 아니다. 이들은 여성이라는 젠더적 차원에서 담지되기도 한다. “해방 50년-초기의 3년은 여성들의 훈풍시절이었고, 6.25전쟁부터 9년은 ‘하리켄’ 시절이었고, 4.19까지의 3년은 ‘하리켄’이 숨을 죽여가는 광풍시절이었다”고 소회하는 잡지『여원』의 기사구절은 의도치 않게 ‘허영’과 ‘문란’의 차원으로 밀어넣은 채, 혁명에서 유폐시킨 여성주체들에 대해 증언해준다. 저자는 간통하는 이들의 문란함을 다시 사랑하는 이들의 보편성으로 전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명아는 “문란함이라는 규정은 단지 성적인 열정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문란함이라는 규정은 주체와 타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결속의 특정한 형식을 사회적 연대나 정치적 결사에 미달하는 것으로 저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반대의 지점에서 우리는 “문란함이라는 규정 속에 갇혀 있는” “특정 주체들의 결속 방식”을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는 도중 우연히 읽게 된 다음의 기사를 보자.

 

  또 등장한 竹棒(죽봉).. '폭력버스' 시위꾼에 습격당한 울산 현대車(조선일보,, 2013. 07. 21)

  희망버스 타고가 술판.. '난장버스'로(세계일보, 2013. 07. 21)


  위 기사가 가진 부당함은 기사의 진실성 여부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발휘된다. 사실 실로 부당한 것은 혁명이 비폭력과 건전함으로 낭만적인 모습으로 펼쳐지길 바라는 우리의 의식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폭력’에 비한다면, ‘난장’이 보여주는 미성숙함의 위계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러한 언어 프레임에 너무나 취약한 채 저항해 왔다. 불온함은 지향하면서도 음란함/문란함은 거절한다. 그러나 정작 언론이 고발하는 문란함이란 고작 소주병 여댓 개에 불과한 것이다. 문란함이라는 규정 속에서 정념의 주체들은 고독해지며, 정치적으로 무능해진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범죄적 차원에서 펼쳐지는 정념의 가능성 같은 것이 아님은 당연하다. 대신 법의 실정성이 성립하면서 은폐하고 억누른 부정성의 가능성이 폭로된다. 권명아는 우리가 문란함 속으로 더 뛰어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문란함의 휘말림 속에서만이 우리는 서로 연대하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쉬운 마음으로, 저자인 권명아의 입을 빌어 되려 이 책의 한계를 지적해 볼 수도 있겠다.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생생한 변이”를 ‘정동’이라고 부른다면, 정작 한 상태와 다른 상태를 각각의 차원에서 기술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유의 곡예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되는 그 순간에 벌어져야 한다. 이 과정은 순차적인 논리가 작동하지 않으며, 모든 국면이 급격히 정반대로 이행되는 카타스트로프의 출현과 함께 할 것이다. 이는 약속 없는 방문으로 매우 당혹스럽다. 정동의 걷잡을 수 없는 번짐은 통제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만 여기까지만 예상할 수 있다. 정념이 연대의 따뜻함 속에서 분출되고 펼쳐진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다만 그런 의미에서만, 본문 마지막 장에 배치된 전국 농성촌 지도는, 네트워크 상을 떠도는 보다 잉여로운 영혼들의 기약없는 파토스케이프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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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 - 최동호 문학평론집 서정시학 비평선 30
최동호 지음 / 서정시학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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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최동호,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 서정시학, 2012

 

디지털 시대의 과잉에 맞선 서정시의 새로운 모험과 발명([신생], 2013 여름호)

 

오영진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 최동호의 평론집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2012. 3. 20)를 읽고 난 후 무심코 내뱉은 감상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극서정시’란 劇서정시가 아니라 極서정시로, 영어로 번역하자면 ‘hyper lyric poetry'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표지에는 ‘extreme poetry’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로써 드러나는 무의식은 그가 ‘시=서정시’라는 범주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주체로서의 개인과 대상으로서의 세계와의 감응,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느낌을 표현하되, 시간적 낙차를 최소화하는 언어행위가 ‘시’의 기본적인 공리이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종(種)이 아니라 유(類)인 것이다. 문제는 역시 ‘極’이라는 수식어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향취가 가득한 ‘서정시’를 극단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당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러한 개념의 주조는 학자이자 평론가 동시에 시인이라는 저자의 독특한 위치에서서만 가능한 것이다. '극서정시‘라는 용어는 새로운 현상의 잡다를 미학적으로 정리․추수하는 개념이 아니라 제안하며 발명해 나가는 성질의 것이다. 저자는 ‘극서정시’라는 개념을 세심히 주조하기 위해 기존 시의 개념들과 차별을 둔다. 저자의 의하면 極서정시는 황동규의 劇서정시와도 다르고, 단형의 하이쿠와도 다르며, 직관에 의해 선적 깨달음을 다룬 선시들과도 다르다. 사실상 이렇게 많은 주의를 두는 이유는 ‘극서정시’가 겉모습만 보아서는 이들과 또렷이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극서정시’에서는 ‘압축적인 극적구조’, ‘단형의 양식’, ‘직관적 수법’ 등이 그 특징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극서정시’의 개념이 갖는 의미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극서정시’가 무엇에 대타항으로 설정된 개념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필자의 극서정시는 디지털 시대 젊은 시인들의 과다한 시적 수사의 양적 과잉에 대해 서정시 본연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제시한 용어이다.” “극서정시는 아직도 형태적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비정형의 단형시가 지니는 시적 특징을 집약한 용어이다.” 그의 검이 가장 먼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소위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21세기 초 일련의 청년그룹의 시들이다. 그는 그들을 “문학적으로 크게 성숙시킬 시간의 축적이 허락되기도 전에 잊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의 시인”들로 평가한다. 변혁에 대한 열정이 결과적으로 파괴로 귀결된 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미래파에 대해 갖는 입장은 “왜곡”, “일그러진 삶”, “음습한 단면”, “단절의 파열음” 등의 수사로 표현되듯이 일단 부정적이다. ‘극서정시’는 형식적으로는 “수사의 양적과잉”에 맞서는 극도의 제약성을, 내용적으로는 파편적 인식에 맞서는 총체성의 기획 즉 “정신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혹자는 이에 대해 금세 반론을 펼치고 싶을 것이다. 애초 미래파에 대한 명확한 범위확정이라든가 그 실체의 존재여부부터 문제가 될 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미래파에 내리는 진단에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근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보여주는 자폐성과 난해성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확립된 통상적인 시읽기 규약을 무너뜨린 감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새로운 읽기 규약을 수립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거나 이론화한 것도 아니다. 문학의 신화를 고수하는 쪽이든, 그 반대든지 간에 읽기 규약이 무너진 자리에서 운신할 자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우호적으로 지켜보자던 일군의 비평가들도 이들의 노선을 성실히 뒷받침하지는 못했다. ‘극서정시’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치료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문단원로의 이러한 제안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점검하고, 타당성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 고민하는 일이다. 그것이 예의다.

필자가 ‘극서정시’의 개념에서 주목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제약’과 ‘규칙’의 재도입문제이다. 하지만 최동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그가 단지 고전적 취향을 반영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러한 처방을 내린 것은 ‘무제약’과 ‘무규칙’의 폐해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떠오른 것은 체스터턴의 저서 『정통』이었다. 체스터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느끼기 시작하는 평범한 심미적 무정부주의자가 결국에는 느끼는 것 자체를 막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는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시를 좇는다. 그러나 가정의 테두리를 느끼는 것이 중단되면서 더 이상 ‘오디세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중략) 이런 문학가는 한 마디로 모든 문학의 바깥에 있다. 그는 고집불통이기보다는 죄수에 더 가깝다.” 체스터턴이 보기에 법과 조건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의 필수조건이다. 그것은 경계를 만들어내지만 그 경계 안에서 무한한 쾌락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계를 벗어난 자는 구속력이 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듯싶지만 준거 없이 표류한다는 점에서 노예에 가깝다. 이는 방종을 경계하자는 식의 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체스터턴은 정통이 가장 이단적이라는 역설을 발견한다. 때문에 ‘가장 이단적이기 위해서는 정통을 따르라’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는 “엄격한 규율은 통치하는 일에 필요할 뿐 아니라 반역하는 일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가 그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금욕적 삶을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상식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선 자신의 욕망을 측정하고 그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진정한 쾌락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대로 금욕주의자로 알려진 스토아 학파가 금욕적 삶을 통해 다다르고자 했던 것이 내면의 무한한 쾌락이었던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렇듯 중요한 것은 자유와 구속의 긴장이지, 그 어느 극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소설은 꿈처럼 기괴한 장면들의 비논리적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뜻 그의 작품세계는 고삐 풀린 말처럼 보이지만 장면묘사에 있어 핍진성이 뛰어나 ‘카프카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는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를 무겁게 끌어안는 절도(節度)에서 기인한다고 평가받는다. 비단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진단했듯이 이는 디지털 코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화의 예를 들어보자. 디지털 방식의 촬영과 편집기술이 도입된 이후, 감독들은 전과 같이 컷의 길이라든가, 프레임의 구도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다분해졌다. 필름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사용하지 않기에 추가비용이 들지 않고, 해상도가 높은 촬영영상을 재프레임화 하여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필요하지도 않은 씬을 촬영한다거나 정교한 미장센을 계획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최동호가 지적하고 있는 문학에 있어 “수사의 양적과잉”과 괘를 같이 한다. 덕분에 디지털 기술이 양산해낸 통제불가능한 이미지에 맞서기 위해 작가 스스로 특정한 구속규칙 속에 이미지를 배치(Dispositif)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어느 실험적인 영화감독은 후반 편집 없이 연속촬영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도를 한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궁핍함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촬영 즉시 편집이 이루어지는 구속규칙 속으로 자신의 작업을 밀어넣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은 한계가 아니라 개성이자 새로운 미학이 된다. 다시 돌아와 최동호가 제시하고 있는 ‘극서정시’를 디지털 시대의 “수사의 과잉”에 반발하는 한 경향으로 평가하고, 적극적인 자기구속성의 개념으로 전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가 제시한 ‘주체-매개자-대상’의 삼각형 구도는 압축적인 의미와 단형이라는 구속조건 하에서도 시가 완성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사에 제약을 가할수록 극적 구성은 더 명징해진다. 이른바 절도(節度)의 미학임 셈이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것은 ‘극서정시’가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기고 있는 점이다. 그는 “언어에 의한 언어의 지적 유희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을 그리기 위해서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정신적인 끈”으로서 서정시를 사유하고 있다. 서정시가 대상․사물에 대한 감응을 바탕으로 한 언어놀음이 아니라 윤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전환을 통해서일 터이다. 마치 후기 김수영이 내면의 고독과 죽음의식에서 벗어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나아간 것처럼, 최동호의 ‘극서정시’는 자연을 노래한다기보다는 이웃과 대화하려는 시적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그가 인간서정의 예로서 제시하는 나태주의 시 한 구절이다. “가을날 같은 때 군청색 굼실굼실/물결쳐간 산봉우리들 너머/외할머니도 먼 곳을 바라보고/나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먼 곳」2연). 화자는 외할머니와 “먼 곳”을 같이 보고 있다.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일은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일이다. 이 시의 주제는 가을풍경의 느낌이 아니라 풍경을 외할머니와 같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는 마주보고 대화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인간에 대한 연민은 위계를 두고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대상과 나와의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승훈의 시 「모두가 예술이다」에서 진술된 사물과 인물들의 열거가 중심 없이 미끄러지는 환유의 수법이 아니라 인간적 유대감으로 통합되는 것으로 판단하는 데에서 그의 ‘정신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정신’은 데카르트적 정신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통합을 이루려는 정신이며,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이 서로 만나는 총체적 장과 지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디지털 코드와 도깨비 시학」이라는 글을 통해 ‘도깨비’적인 역동성을 강조한다. ‘도깨비’적인 역동성을 통해 시민들의 잡다는 뒤섞이고,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문제의식이 반드시 ‘극서정시’의 이념이나 형태로 나타나야만 하는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 중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에 부딪혀 새로운 전략으로 이를 돌파하려는 모습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서대경의 시 「정어리」의 일부이다. “그녀의 꿈이 거대해지기 전에 나는 내 꿈속의 그녀의 꿈에 일정한 법도와 절차를 부여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으므로 차츰 침실과 정어리와 햇살과 나의 꿈은 사라져갔고”. 이 시에서 서대경은 “아득히 몰려오는 하얀 새들”의 현기증 나는 이미지에 맞서서 “신선하고 차가운 푸른색”을 지닌 “정어리”의 생동하는 이미지로 응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싸움이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지에 대해서는 판단의 여지가 많다. 이제 관건은 문단원로가 내놓은 ‘극서정시’라는 해법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수용과 변용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극서정시’는 서정시의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개념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규칙’과 ‘제약’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혼란을 돌파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으며, 서정시의 성격을 인식론에서 윤리론으로 전환시키려는 모험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극서정시’는 골동품이 아니라 발명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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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을 묻다 -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권보드래.천정환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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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60년! / 오영진


대선 이후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박근혜 씨의 당선이 1960년 박정희체제로의 회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를 불식하고 글을 시작하자. 이 책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본격적 비판서가 아니다. 제목처럼 1960년대를 그 무대로 하지만 유신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1970년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저자들이 4.19혁명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5.16이 돼버린 4.19”가 이들의 비판적 조명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4.19혁명의 의미를 이승만의 하야에 두는 것이 아니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체제의 본격적 출범까지로 범위를 넓혀 고찰해보는 데에 이 책의 목표가 있다. 쟁점은 명확하고 간단하다. 4.19혁명은 왜 자유의 정신을 완성하지 못하고 ‘늙은 가부장’을 ‘젊은 가부장’으로 교체하는 것에서 멈추었는가?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의 주범이라고 보는 것은 쉬운 상상력이다. 이렇게 내러티브화된 역사는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장면들을 심어놓는다. 4.19의 정신을 짓밟은 박정희의 군화발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테레오타입(stereo-type)화된 역사에 만족할 때, 비난은 가능하지만 비판은 불가능하다. 그동안 문학전공자들의 문화연구가 갖는 미덕은 당대의 표상들을 구분 없이 가로질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입체와 다양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상 속에 자리 잡은 전형화된 장면(Scene)들을 부순 일이다. 
책을 들여다보자. 4월 혁명 후 몇달 뒤 실시한 유권자 대상의 설문조사에는 “초인적인 독재자를 구함”이라는 의견이 적혀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자유’와 ‘민주주의’의 혼란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사실상 예비되었던 것이다. 이후 5.16쿠데타로 ‘고귀한 무질서’가 ‘빵’에 대한 요구로 전환될 때 다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자유에 대한 실존적 고민에 골몰하던 ‘아프레 걸’이나 ‘자유부인’은 어느새 국가동원체제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신사임당이 되어버린다. 이청준은 ‘굶기의 자유’로, 김승옥은 ‘자기파괴의 자유’로 나아가나 실은 이는 자유의 정신이 정치적 힘을 잃고 개인을 심문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사상의 자유를 잃어버린 지식인들은 국가만들기의 짝패인 간첩만들기의 희생양이 되어 전향의 테두리에 갇힌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4.19가 5.16에 의해 부정된 것이 아니라, 4.19가 스스로 5.16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자유의 정신은 의외의 곳에서 발현된다. 65년 한일협정반대시위가 상기시키는 반일정서와는 달리 4.19직후 한국의 대중은 일본문화에 흠뻑 빠져있었다. 한편으론 일본문학에 경도되었으면서도 당대 대중의 일본문화수용은 비판하는 지식인의 모순이 드러난다. 60년대 소위 일류(日流)는 청년․대중이 새로운 감각을 열망하며 자유를 사용한 결과이다. 또한, 박정희 체제 국가재건 교육사업의 하나였던 교양주의는 매맞아 가며 배우는 고전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낳았지만 ‘대중’의 독서행동을 질적․양적으로 변화시키고 이들을 조세희, 이문구, 황석영 등의 70년대 본격문학에 접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권보드레․천정환 각 필자가 약 2년간 집중적으로 발표한 논문 11편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냈으나 그 유기적 완성도는 높다. 각 장이 다양한 분야를 논의하지만 “4.19의 정신은 어떻게 변화되고, 스스로 부정되며 그럼에도 연속성을 갖게 되는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기 때문이다. 독자입장에서 이렇게 입체와 다양으로 복원된 4.19 이후의 풍경들을 주워담는 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이 책의 내적 논리 두 가지는 따로 논평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 이 책은 필자 스스로 밝혔듯이 386세대가 복원한 4.19세대에 관한 책이다. 이 두 세대는 젊은 시절 성공적으로 정치적 존재증명을 완수한 세대들이다. 더군다나 386세대는 이 4.19세대가 이루어놓은 지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학습해온 세대이다. 여전히 민주화의 책무를 완성하지 못한 세대가 산업화라는 반쪽의 성공을 이룬 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의 혁명에서 미완의 과업을 우리세대의 의무로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 이 점에서 이제 문화연구의 경향이 해방이후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기변화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국문학 안에서 문화연구가 전대의 문학연구의 빈자리를 메꾸는 소극적 방식으로 주로 식민지시기를 다루었다면, 해방 이후를 문화론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오늘날 형성된 문학-근대성의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응사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문학’연구의 보충으로서의 ‘문화’연구가 아니라 ‘문화’연구의 보충으로서의 ‘문학’연구가 시도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문화연구의 이론적 토대가 ‘구조’에서 ‘주체’로 강조점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그간 일련의 ‘기원’과 ‘탄생’시리즈는 역사의 어떤 결절점에서 구조가 주체를 주조하는가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역사철학적 분기점에 대한 판단과 통상의 구조주의적 인식방법이 혼용된 결과 매 시기 ‘기원’들이 탄생한다. 이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강렬도 높은 주체들이다. 이에 들뢰즈는 후기푸코의 작업을 고찰하면서 ‘구조’에서 ‘주체’를 읽는 법을 제안한다. 주체는 파인 홈을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파선을 그리며 외부로 향한다. 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진단했듯이 교양주의에 의해 주조된 60년대의 문학소년․소녀들은 교양의 힘을 품고, 되려 반체제적 활동의 역량을 발휘한다. 이런 장면의 포착을 통해 사태는 모순적이지만 복합적으로 반성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폭로 이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일 것이다. 언술한 두 논점은 앞으로 이 책이 읽힘으로써 재생산되고 확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바 4.19의 유산은 자유의 정신이다. 이것이 이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4.19의 유산을 어떻게 이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정치적 혼란에의 공포로 느껴지거나 ‘간첩’이라는 정신적 외계에 억압됨으로써 그 자체 거부될 수도 있었다. 또한 정신적 ‘허기’의 자유나 ‘자기파괴’의 자유같은 개인의 내면적 차원에서만 구현될 수도 있었다. ‘문화자유주의’의 영향권에 든 『사상계』와 같이 어디까지나 미국이 지지하는 ‘자유세계’의 정치체제적 ‘자유’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계발의 자유일 수도 있고, ‘아프레 걸’이 보여준 절망에의 자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파노라마 속에서 번뜩이는 이가 있으니 바로 김수영이다. 몇 장의 챕터에서 종종 인용문으로 언급된 그는 자유가 일으키는 신열에 쉽게 열망하거나 회의하지 않고, 자유를 순전히 부정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사물의 규정성을 부정성으로 전환하는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그 자신의 표현대로 “맑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가 4.19 이후 자유의 ‘혼란’을 ‘생동’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이러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적 성과가 ‘자유’의 정신에 있다는 것, 아니 4.19 의 정신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된 것은 이 책을 통해 필자가 얻은, 고루해보이지만 의외의 소득이다. 오늘날 우리가 수행해야할 4.19혁명의 미완의 과제란 바로 이렇듯 ‘자유-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아닐런지. (문학의 오늘, 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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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애의 미디올로지 - 잉여력과 로우테크(low-tech)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 다중지성총서 5
임태훈 지음 / 갈무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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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임태훈, 우애의 미디올로지, 갈무리, 2012


  나는 이 책을 귀로 만났다. 네트워크 상에 떠도는 소문으로, 눈을 감고 더듬는 심정으로, 귀로 만났다.
문학도 아니고 영화학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사회과학의 분류에 더 가까운 이 책은 '우애의 미디올로지'라는 중충적이고 개방적인 개념을 통해 '지금', '우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떠오른 것은 조지오웰의 "1984"에 응답하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이었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의 세계, 그곳에선 텔레스크린을 통해 시민의 일상이 감시되고 통제된다. 이에 백남준은 1984년 벽두부터 tv의 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전세계인들의 새해안녕을 기원하는 퍼포먼스로 대응한다. 임태훈이 자신의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첨단 미디어에 대항하는 우리들 '우애의 미디올로지'. 
단일한 정치적 구호 아래 집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다발들로서의 우리들. 그들이 미디어를 놀이터로 만드는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미디어를 점유하고, 또 재점유하는 방식으로 끝없이 미디어를 통한 놀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 책의 첫부분에서 논의되고 있는 공명-사운드의 개념을 처음엔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조금 전 낮잠에서 깬 후 이해했다. 사운드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풍경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을 메우는 존재들의 무리인 것인 것이다. 시각에 있어 원근법은 시각-침투기계이지만 사운드는 공간을 가득 채우지만 보이지 않는 충만한 유령들인 것이다. 사운드는 단지 청각-신체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시각-근대성에 가려져 잠재된 것들에 대한 비유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영화 '블로우 업'의 주제를 더욱 현실감 있게 구상화한 것은 프란시스 코플라의 '컨버세이션'이다. '일상 속에 마주하게 된 끔찍한 실재'라는 동일한 테마를  다룬 이 두 영화는 우연히 찍힌 사진 속에 확대되어 발견된 범죄의 증거-시각적 발견-(블로우 업)가 도청된 녹음 파일 속에 숨겨져 있는 살인음모를 발견하는 것-청각적 발견-(컨버세이션)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블루벨벳'에서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은 린치가 설계한 사운드이다. 평온한 오후 한 중산층 가정의 앞뜰에서 지면 내부로 시각적 침투가 일어날 때, 연출되는 풀밭 속 벌레들이 내는 게걸스러운 소리. 그 음모와 욕망의 소름끼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블루벨벳'의 주제에 도달할 수 없다.  견고해보이는 주체 내부의 끓어오르는 리비도는 청각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임태훈에 의하면, 이렇게 눈을 감아야 들리는 사운드가 우리 시대의 잉여들의 존재론적 양태이다. 그는 모든 잉여들에 대해 혁명적 사고를 할 것을 촉구한다. 
2008년 촛불집회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은 집단화된 군중의 풍경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하찮으나 저들끼리 엉켜 접촉하는 단자들의 음경(Soundscape)으로 가능하다. 
컴맹들, 악플러, 괴담유포자, 심지어 타진요까지도 이런 관점에서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읽힌다.

  이는 문학사를 보는 시각에도 발휘되고 있다.(나는 특히 이 부분이 좋았다.) 주어-문학이 아니라 접속사-문학으로 관심을 돌릴 때 문학은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는다.
타인의 언어에 접촉하고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모든 일로 외연을 넓히고 주위를 바라보면 문학은 새롭게 생성중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책을 통해 제도로서의 문학을 왕따시키는 기획을 엿볼 수 있었다.
  조강석은 "경험주의자의 시계"를 통해 문학을 그 무엇에도 새롭게 접속할 수 있는 경험론적 주체로 이해했다. 이 점이 문학이라는 제도의 끝머리를 가까스로 방어하고 있던 신형철 보다 마음에 들었는데, 임태훈의 책을 읽으니 다시 정리해야 겠다. 

  신형철보다는 조강석이, 조강석보다는 임태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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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43인의 시인에 대한 헌사
이재복 지음 / 작가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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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시인들에 대한 헌화가



저자는 우리 시대의 주목할 만한 시인 43명을 간결하고 쉽게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왜 10이나 30이 아니고 혹은 100도 아니고 43인가? 이 숫자의 의미는 
시인들에 대한 저자의 태도에서 엿 볼 수 있다. 
저자에게 시인들은 그 자체로 '숭고의 대상'이다. 그 가여운 존재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절대적 자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사가 진심으로 느껴지는 것은 오히려 시 현실의 비루함덕분이다.
대중매체에 그려진 시인들은 한없이 연약한 감성의 소유자 아니면 말만 잘하는 사기꾼, 실업자들이 아닌가.
저자는 시가 왜소한 시대에 시인들에 대한 헌사를 바치고 있다. 이것이 진정성이다.
상징적으로 볼 때 40이라는 완숙성과 3이라는 완결성의 결합이 43이다.
43은 0처럼 완전한 새출발이 아니고 그렇다고 100처럼 종료된 것도 아니다.
완숙한 상태에서 완결을 지향하려는 역동적인 힘이 43이라는 숫자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0에서부터 새출발하자는 공허한 선언이나 독단에 의해 뽑은 좋은 시 100선 따위가 아닌 것이다.
저자는 우리시의 이 역동성을 포착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43인 시인의 행렬을 따라갈 뿐이다. 
쉽게 보채거나 재단하지 않는다. 
저자는 시인들에 대한 헌화가를 부르고 있고 이 책이 그 꽃이다.
우리 문단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쉽게 읽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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