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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을 묻다 -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권보드래.천정환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응답하라 1960년! / 오영진
대선 이후 이 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박근혜 씨의 당선이 1960년 박정희체제로의 회귀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를 불식하고 글을 시작하자. 이 책은 박정희체제에 대한 본격적 비판서가 아니다. 제목처럼 1960년대를 그 무대로 하지만 유신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1970년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저자들이 4.19혁명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의 표현대로라면 “5.16이 돼버린 4.19”가 이들의 비판적 조명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4.19혁명의 의미를 이승만의 하야에 두는 것이 아니라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체제의 본격적 출범까지로 범위를 넓혀 고찰해보는 데에 이 책의 목표가 있다. 쟁점은 명확하고 간단하다. 4.19혁명은 왜 자유의 정신을 완성하지 못하고 ‘늙은 가부장’을 ‘젊은 가부장’으로 교체하는 것에서 멈추었는가?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의 주범이라고 보는 것은 쉬운 상상력이다. 이렇게 내러티브화된 역사는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는 전형적인 장면들을 심어놓는다. 4.19의 정신을 짓밟은 박정희의 군화발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테레오타입(stereo-type)화된 역사에 만족할 때, 비난은 가능하지만 비판은 불가능하다. 그동안 문학전공자들의 문화연구가 갖는 미덕은 당대의 표상들을 구분 없이 가로질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입체와 다양을 주는 방식으로 우리의 심상 속에 자리 잡은 전형화된 장면(Scene)들을 부순 일이다.
책을 들여다보자. 4월 혁명 후 몇달 뒤 실시한 유권자 대상의 설문조사에는 “초인적인 독재자를 구함”이라는 의견이 적혀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자유’와 ‘민주주의’의 혼란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를 포기하려는 경향은 사실상 예비되었던 것이다. 이후 5.16쿠데타로 ‘고귀한 무질서’가 ‘빵’에 대한 요구로 전환될 때 다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자유에 대한 실존적 고민에 골몰하던 ‘아프레 걸’이나 ‘자유부인’은 어느새 국가동원체제의 충실한 조력자로서 신사임당이 되어버린다. 이청준은 ‘굶기의 자유’로, 김승옥은 ‘자기파괴의 자유’로 나아가나 실은 이는 자유의 정신이 정치적 힘을 잃고 개인을 심문하는 것에 가깝다. 결국 사상의 자유를 잃어버린 지식인들은 국가만들기의 짝패인 간첩만들기의 희생양이 되어 전향의 테두리에 갇힌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4.19가 5.16에 의해 부정된 것이 아니라, 4.19가 스스로 5.16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자유의 정신은 의외의 곳에서 발현된다. 65년 한일협정반대시위가 상기시키는 반일정서와는 달리 4.19직후 한국의 대중은 일본문화에 흠뻑 빠져있었다. 한편으론 일본문학에 경도되었으면서도 당대 대중의 일본문화수용은 비판하는 지식인의 모순이 드러난다. 60년대 소위 일류(日流)는 청년․대중이 새로운 감각을 열망하며 자유를 사용한 결과이다. 또한, 박정희 체제 국가재건 교육사업의 하나였던 교양주의는 매맞아 가며 배우는 고전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낳았지만 ‘대중’의 독서행동을 질적․양적으로 변화시키고 이들을 조세희, 이문구, 황석영 등의 70년대 본격문학에 접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권보드레․천정환 각 필자가 약 2년간 집중적으로 발표한 논문 11편을 묶어 한 권의 책으로 냈으나 그 유기적 완성도는 높다. 각 장이 다양한 분야를 논의하지만 “4.19의 정신은 어떻게 변화되고, 스스로 부정되며 그럼에도 연속성을 갖게 되는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기 때문이다. 독자입장에서 이렇게 입체와 다양으로 복원된 4.19 이후의 풍경들을 주워담는 것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다만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은 이 책의 내적 논리 두 가지는 따로 논평할 필요성이 있다.
첫째, 이 책은 필자 스스로 밝혔듯이 386세대가 복원한 4.19세대에 관한 책이다. 이 두 세대는 젊은 시절 성공적으로 정치적 존재증명을 완수한 세대들이다. 더군다나 386세대는 이 4.19세대가 이루어놓은 지적․문화적 토대 위에서 학습해온 세대이다. 여전히 민주화의 책무를 완성하지 못한 세대가 산업화라는 반쪽의 성공을 이룬 세대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의 혁명에서 미완의 과업을 우리세대의 의무로서 비판적으로 검토하겠다.》 이 점에서 이제 문화연구의 경향이 해방이후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기변화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동안 국문학 안에서 문화연구가 전대의 문학연구의 빈자리를 메꾸는 소극적 방식으로 주로 식민지시기를 다루었다면, 해방 이후를 문화론적으로 평가하려는 시도는 오늘날 형성된 문학-근대성의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응사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문학’연구의 보충으로서의 ‘문화’연구가 아니라 ‘문화’연구의 보충으로서의 ‘문학’연구가 시도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문화연구의 이론적 토대가 ‘구조’에서 ‘주체’로 강조점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다. 그간 일련의 ‘기원’과 ‘탄생’시리즈는 역사의 어떤 결절점에서 구조가 주체를 주조하는가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역사철학적 분기점에 대한 판단과 통상의 구조주의적 인식방법이 혼용된 결과 매 시기 ‘기원’들이 탄생한다. 이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강렬도 높은 주체들이다. 이에 들뢰즈는 후기푸코의 작업을 고찰하면서 ‘구조’에서 ‘주체’를 읽는 법을 제안한다. 주체는 파인 홈을 따라가면서도 동시에 파선을 그리며 외부로 향한다. 이 책에서 조심스럽게 진단했듯이 교양주의에 의해 주조된 60년대의 문학소년․소녀들은 교양의 힘을 품고, 되려 반체제적 활동의 역량을 발휘한다. 이런 장면의 포착을 통해 사태는 모순적이지만 복합적으로 반성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로가 아니라 폭로 이후 발견하게 될 가능성일 것이다. 언술한 두 논점은 앞으로 이 책이 읽힘으로써 재생산되고 확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바 4.19의 유산은 자유의 정신이다. 이것이 이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발현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4.19의 유산을 어떻게 이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자유는 정치적 혼란에의 공포로 느껴지거나 ‘간첩’이라는 정신적 외계에 억압됨으로써 그 자체 거부될 수도 있었다. 또한 정신적 ‘허기’의 자유나 ‘자기파괴’의 자유같은 개인의 내면적 차원에서만 구현될 수도 있었다. ‘문화자유주의’의 영향권에 든 『사상계』와 같이 어디까지나 미국이 지지하는 ‘자유세계’의 정치체제적 ‘자유’같은 것일 수도 있었다. 자기계발의 자유일 수도 있고, ‘아프레 걸’이 보여준 절망에의 자유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파노라마 속에서 번뜩이는 이가 있으니 바로 김수영이다. 몇 장의 챕터에서 종종 인용문으로 언급된 그는 자유가 일으키는 신열에 쉽게 열망하거나 회의하지 않고, 자유를 순전히 부정의 정신으로 이해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사물의 규정성을 부정성으로 전환하는 태도를 고수함으로써 그 자신의 표현대로 “맑은 눈”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가 4.19 이후 자유의 ‘혼란’을 ‘생동’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이러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문학적 성과가 ‘자유’의 정신에 있다는 것, 아니 4.19 의 정신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된 것은 이 책을 통해 필자가 얻은, 고루해보이지만 의외의 소득이다. 오늘날 우리가 수행해야할 4.19혁명의 미완의 과제란 바로 이렇듯 ‘자유-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아닐런지. (문학의 오늘, 1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