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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 - 최동호 문학평론집 ㅣ 서정시학 비평선 30
최동호 지음 / 서정시학 / 2012년 3월
평점 :
Review: 최동호,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 서정시학, 2012
디지털 시대의 과잉에 맞선 서정시의 새로운 모험과 발명([신생], 2013 여름호)
오영진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 최동호의 평론집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2012. 3. 20)를 읽고 난 후 무심코 내뱉은 감상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극서정시’란 劇서정시가 아니라 極서정시로, 영어로 번역하자면 ‘hyper lyric poetry'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표지에는 ‘extreme poetry’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로써 드러나는 무의식은 그가 ‘시=서정시’라는 범주를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시비를 걸 이유는 없다. 주체로서의 개인과 대상으로서의 세계와의 감응,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느낌을 표현하되, 시간적 낙차를 최소화하는 언어행위가 ‘시’의 기본적인 공리이기 때문이다. 서정시는 종(種)이 아니라 유(類)인 것이다. 문제는 역시 ‘極’이라는 수식어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향취가 가득한 ‘서정시’를 극단으로 밀어붙여야 하는 당위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이러한 개념의 주조는 학자이자 평론가 동시에 시인이라는 저자의 독특한 위치에서서만 가능한 것이다. '극서정시‘라는 용어는 새로운 현상의 잡다를 미학적으로 정리․추수하는 개념이 아니라 제안하며 발명해 나가는 성질의 것이다. 저자는 ‘극서정시’라는 개념을 세심히 주조하기 위해 기존 시의 개념들과 차별을 둔다. 저자의 의하면 極서정시는 황동규의 劇서정시와도 다르고, 단형의 하이쿠와도 다르며, 직관에 의해 선적 깨달음을 다룬 선시들과도 다르다. 사실상 이렇게 많은 주의를 두는 이유는 ‘극서정시’가 겉모습만 보아서는 이들과 또렷이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극서정시’에서는 ‘압축적인 극적구조’, ‘단형의 양식’, ‘직관적 수법’ 등이 그 특징으로 제시된다. 그래서 ‘극서정시’의 개념이 갖는 의미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는 ‘극서정시’가 무엇에 대타항으로 설정된 개념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온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필자의 극서정시는 디지털 시대 젊은 시인들의 과다한 시적 수사의 양적 과잉에 대해 서정시 본연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제시한 용어이다.” “극서정시는 아직도 형태적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은 비정형의 단형시가 지니는 시적 특징을 집약한 용어이다.” 그의 검이 가장 먼저 겨냥하고 있는 것은 소위 ‘미래파’라고 불리우는 21세기 초 일련의 청년그룹의 시들이다. 그는 그들을 “문학적으로 크게 성숙시킬 시간의 축적이 허락되기도 전에 잊혀야 하는 불행한 운명의 시인”들로 평가한다. 변혁에 대한 열정이 결과적으로 파괴로 귀결된 탓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가 미래파에 대해 갖는 입장은 “왜곡”, “일그러진 삶”, “음습한 단면”, “단절의 파열음” 등의 수사로 표현되듯이 일단 부정적이다. ‘극서정시’는 형식적으로는 “수사의 양적과잉”에 맞서는 극도의 제약성을, 내용적으로는 파편적 인식에 맞서는 총체성의 기획 즉 “정신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 혹자는 이에 대해 금세 반론을 펼치고 싶을 것이다. 애초 미래파에 대한 명확한 범위확정이라든가 그 실체의 존재여부부터 문제가 될 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미래파에 내리는 진단에 반박하기는 쉽지 않다. 근래 젊은 시인들의 시가 보여주는 자폐성과 난해성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확립된 통상적인 시읽기 규약을 무너뜨린 감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새로운 읽기 규약을 수립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주장을 명확히 하거나 이론화한 것도 아니다. 문학의 신화를 고수하는 쪽이든, 그 반대든지 간에 읽기 규약이 무너진 자리에서 운신할 자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우호적으로 지켜보자던 일군의 비평가들도 이들의 노선을 성실히 뒷받침하지는 못했다. ‘극서정시’는 작금의 상황에 대한 치료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문단원로의 이러한 제안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지 점검하고, 타당성이 있다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지 고민하는 일이다. 그것이 예의다.
필자가 ‘극서정시’의 개념에서 주목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제약’과 ‘규칙’의 재도입문제이다. 하지만 최동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그가 단지 고전적 취향을 반영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가 이러한 처방을 내린 것은 ‘무제약’과 ‘무규칙’의 폐해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떠오른 것은 체스터턴의 저서 『정통』이었다. 체스터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느끼기 시작하는 평범한 심미적 무정부주의자가 결국에는 느끼는 것 자체를 막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는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시를 좇는다. 그러나 가정의 테두리를 느끼는 것이 중단되면서 더 이상 ‘오디세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중략) 이런 문학가는 한 마디로 모든 문학의 바깥에 있다. 그는 고집불통이기보다는 죄수에 더 가깝다.” 체스터턴이 보기에 법과 조건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의 필수조건이다. 그것은 경계를 만들어내지만 그 경계 안에서 무한한 쾌락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경계를 벗어난 자는 구속력이 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듯싶지만 준거 없이 표류한다는 점에서 노예에 가깝다. 이는 방종을 경계하자는 식의 논리에 머물지 않는다. 체스터턴은 정통이 가장 이단적이라는 역설을 발견한다. 때문에 ‘가장 이단적이기 위해서는 정통을 따르라’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는 “엄격한 규율은 통치하는 일에 필요할 뿐 아니라 반역하는 일에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흔히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가 그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금욕적 삶을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상식이다. 에피쿠로스는 우선 자신의 욕망을 측정하고 그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진정한 쾌락을 이룰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대로 금욕주의자로 알려진 스토아 학파가 금욕적 삶을 통해 다다르고자 했던 것이 내면의 무한한 쾌락이었던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이렇듯 중요한 것은 자유와 구속의 긴장이지, 그 어느 극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카프카의 소설은 꿈처럼 기괴한 장면들의 비논리적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뜻 그의 작품세계는 고삐 풀린 말처럼 보이지만 장면묘사에 있어 핍진성이 뛰어나 ‘카프카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이는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를 무겁게 끌어안는 절도(節度)에서 기인한다고 평가받는다. 비단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진단했듯이 이는 디지털 코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화의 예를 들어보자. 디지털 방식의 촬영과 편집기술이 도입된 이후, 감독들은 전과 같이 컷의 길이라든가, 프레임의 구도를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다분해졌다. 필름이라는 아날로그 매체를 사용하지 않기에 추가비용이 들지 않고, 해상도가 높은 촬영영상을 재프레임화 하여 임의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필요하지도 않은 씬을 촬영한다거나 정교한 미장센을 계획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최동호가 지적하고 있는 문학에 있어 “수사의 양적과잉”과 괘를 같이 한다. 덕분에 디지털 기술이 양산해낸 통제불가능한 이미지에 맞서기 위해 작가 스스로 특정한 구속규칙 속에 이미지를 배치(Dispositif)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어느 실험적인 영화감독은 후반 편집 없이 연속촬영만으로 영화를 만드는 시도를 한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궁핍함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촬영 즉시 편집이 이루어지는 구속규칙 속으로 자신의 작업을 밀어넣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은 한계가 아니라 개성이자 새로운 미학이 된다. 다시 돌아와 최동호가 제시하고 있는 ‘극서정시’를 디지털 시대의 “수사의 과잉”에 반발하는 한 경향으로 평가하고, 적극적인 자기구속성의 개념으로 전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가 제시한 ‘주체-매개자-대상’의 삼각형 구도는 압축적인 의미와 단형이라는 구속조건 하에서도 시가 완성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사에 제약을 가할수록 극적 구성은 더 명징해진다. 이른바 절도(節度)의 미학임 셈이다.
두 번째로 흥미로웠던 것은 ‘극서정시’가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기고 있는 점이다. 그는 “언어에 의한 언어의 지적 유희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인간을 그리기 위해서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정신적인 끈”으로서 서정시를 사유하고 있다. 서정시가 대상․사물에 대한 감응을 바탕으로 한 언어놀음이 아니라 윤리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러한 전환을 통해서일 터이다. 마치 후기 김수영이 내면의 고독과 죽음의식에서 벗어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나아간 것처럼, 최동호의 ‘극서정시’는 자연을 노래한다기보다는 이웃과 대화하려는 시적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음은 그가 인간서정의 예로서 제시하는 나태주의 시 한 구절이다. “가을날 같은 때 군청색 굼실굼실/물결쳐간 산봉우리들 너머/외할머니도 먼 곳을 바라보고/나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먼 곳」2연). 화자는 외할머니와 “먼 곳”을 같이 보고 있다. 같은 풍경을 공유하는 일은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일이다. 이 시의 주제는 가을풍경의 느낌이 아니라 풍경을 외할머니와 같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는 마주보고 대화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인간에 대한 연민은 위계를 두고 대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대상과 나와의 공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이승훈의 시 「모두가 예술이다」에서 진술된 사물과 인물들의 열거가 중심 없이 미끄러지는 환유의 수법이 아니라 인간적 유대감으로 통합되는 것으로 판단하는 데에서 그의 ‘정신주의’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정신’은 데카르트적 정신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의 통합을 이루려는 정신이며,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함의하듯 그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인간들의 정신이 서로 만나는 총체적 장과 지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디지털 코드와 도깨비 시학」이라는 글을 통해 ‘도깨비’적인 역동성을 강조한다. ‘도깨비’적인 역동성을 통해 시민들의 잡다는 뒤섞이고,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문제의식이 반드시 ‘극서정시’의 이념이나 형태로 나타나야만 하는 필연성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 중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에 부딪혀 새로운 전략으로 이를 돌파하려는 모습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서대경의 시 「정어리」의 일부이다. “그녀의 꿈이 거대해지기 전에 나는 내 꿈속의 그녀의 꿈에 일정한 법도와 절차를 부여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쉽게 되지 않았으므로 차츰 침실과 정어리와 햇살과 나의 꿈은 사라져갔고”. 이 시에서 서대경은 “아득히 몰려오는 하얀 새들”의 현기증 나는 이미지에 맞서서 “신선하고 차가운 푸른색”을 지닌 “정어리”의 생동하는 이미지로 응전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싸움이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지에 대해서는 판단의 여지가 많다. 이제 관건은 문단원로가 내놓은 ‘극서정시’라는 해법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수용과 변용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극서정시’는 서정시의 근본주의를 주장하는 개념이 아닐 뿐더러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규칙’과 ‘제약’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혼란을 돌파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으며, 서정시의 성격을 인식론에서 윤리론으로 전환시키려는 모험을 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극서정시’는 골동품이 아니라 발명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