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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그림자놀이 - 2015년 제11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박소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화려한 색감의 책표지가 시선을 사로잡니다.
<꽃그림자놀이> 책표지와 제목만 들어봐도 '배경이 조선이겠구나..' 싶었다.
'소설은 독이다.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이단에 불과하다.
들뜨고 음탕한 말만 가득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데다 사람들에게 해를 입힌다.
음란하고 야비한 음악이나,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간사한 사람과도 같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생각하면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린다. -정조(1752~1800) -p7-
조인서는 친구를 최린을 만나기 위해 서울을 찾았다. 늘 가던 길이었는데 그날따라 방향을 잃고 으슥한 마을안까지 오게 된다.
길 눈이 어두운 것도 아닌데 무언가에 이끌리듯 해매게 된다.
낯선길로 그를 잡아끈것은 다름아닌 눈꽃이었다. 바람도 피할겸 어느 곳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집한채가 있었다.
담장너머로 매화나무 한가지가 보였고 집 주변을 거닐어보니 집안에서 인기척도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어느덧 정신을 차리니 친구 최린과 거나하게 취해서 최린의 집에 있었다.
전날 그가 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잃어버린 신발 한짝을 찾기 위해 다시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전날 밤에 본 집과 다르게 페가의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친구 최린은 그집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돌아 집이 오래도록 비어있다고 말한다.
조인서는 친구의 말을 그저 흘려듣고 누군가가 불미스러운 일을 덮으려고 만든 이야기일 거라고 말한다.
두 친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교리는 조인서에게 내기를 권한다.
조인서는 집을 빌려주면 귀신이 없다는걸 증명해 보이겠다고 하고 최린은 집을 빌려주기로 한다.
친구 최린은 이런 내기가 못마땅했다.
급히 떠나야 할일이 생겨 강화도로 함께 가자고 말하지만 조인서는 귀신이 살고 있다는 유현당에 머물기로 한다.
최린은 조인서에게 소설을 주었다.
양반이라면 절대 읽어서는 안될 소설이지만 소설을 읽어도 자신은 절대 방탕해지지 않는다는걸 증명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크게 조인서가 겪교 있는 이야기와 조인서가 읽고 있는 소설 이야기로 나뉜다.
조인서가 읽고 있는 소설부분도 내용상 짧을지 모르지만 읽다보면 빠져든다.
하지만 <꽃그림자놀이>의 핵심 이야기는 조인서가 겪고 있는 이야기에 있다.
조인서는 교리와 내기를 해서 유현당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할일이 없었던 조인서는 서당이라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려했지만 쉽지 않았다.
다들 귀신이 살고 있다는 소문에 누구도 그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았던 것이다.
조인서는 유현당에 살면서 귀신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조금씩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집에 얽힌 이야기를 기생 계심에게 듣게 된다.
유현당은 유현당이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죽게 되어 집안이 몰락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딸이었던 송재가 노비가 되어 추모꾼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송재는 다른 곳으로 도망치지 않고 유현당에 숨어 살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귀신처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송재가 유현당에서 귀신처럼 살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도움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유현당의 집구조에 있었다.
보통집과는 다른 구조로 되어 있어 어디서든 통할 수 있는 통로가 곳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혹시라도 전쟁이나 역병이 돌때를 대비해 할아버지가 집을 설계한 것이었다.
송재는 5년 전 조인서와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조인서가 알아차리지는 못했지만 송재는 도움을 받았다.
조인서는 그런 송재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같이 도망가자고 권하지만 송재는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현당의 누명을 벗겨줘야했기때문이다. 그래야 자신도 노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꽃그림자 놀이>는 뒤로 갈수록 점점 긴장을 늦추지 않게 빠져들게 된다.
송재가 왜 그집에서 살아가야했는지.. 송재가 그 집에서 숨어 살 수 있었던 이야기, 송재의 과거까지..
얽혀있는 주변인물들과의 관계도 처음에는 무슨 연유로 나오는지 궁금했는데 얽혀있는 고리들이 다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권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소설 안의 또 다른 소설 이야기는 따로 다시 읽어보아도 재밌을만큼 흥미로웠다.
소설은 알고보면 참 묘한 장르이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것 같은이야기면서도 꼭 한번을 일어날 수 있을것 같은 이야기이다.
그래서 정조시대때 소설은 방탕하게 사람을 만든다고 한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소설페인이 되기도 하고 한권 읽다시작하다보면 뒤가 궁금해서 밤을 새는 일도 있다.
나역시 한때 소설이 너무 재밌어서 그 결말이 궁금해서 걸어가면서도 읽고 늦게까지 읽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갈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어날 수 없기때문에 그런데 꼭 일어날 수도 있을것 같기때문에 소설에 빠져드는게 아닐까?
그리고 왜 제목이 <꽃그림자놀이>였는지는 소설을 끝까지 읽다보면 알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