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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양장)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22주차로 읽고 있던 책이 무려 700페이지다. 시간이 치여서 결국 잠시 덮어두고 이 책을 집었다. 본문 내용이 70페이지가 채 되지 않아서 쉽게 읽을 수 있겠다고 만만하게 보았는데, <단순한 열정>은 그렇게 만만한 책이 아니었다.
저번에 한번 읽은 아니 에르노의 담담하고 진솔한 글은 단번에 독자를 매료시키는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내면을 타고 흐르는 향기가 너무 섬세하고 또 강렬해서, 자신의 치부를 꾸임 없이 사실 그대로 적은 글은 원래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었다. 그 향이 그리워 그녀의 글을 꼭 읽어야지 했는데, 두 번째로 펼친 이 책 역시 감당하기 힘든 매력이 느껴졌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p11)
연하의 유부남 A라는 남자로 인하여 이해하기 힘든 강렬한 열정에 사로잡혀 지내던 '나'의 흔적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그녀가 보이는 열정이란 보통 사람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계에 있는 것인데(그래서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사람 덕분에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라 고백하며 삶의 모든 원인이 되었던 그를 향한 집착 같은 열정을 하나하나 기억에서 풀어내었다.
'나'의 생활은 오직 그를 향해 흘러간다. 익숙한 일상을 제외하고 그를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전화가 온 미래인양 그 사람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를 기다리고 기다리는 순간은 기대감, 두려움, 조바심이 한데 뭉친 시간이다. 이후에 찾아오는 행복을 새기고 간직하는 일도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녀가 몸에 남은 정사 자국을 하루라도 더 품고자 하고 그가 마신 술잔이며 목욕 가운도 있는 그대로 그림처럼 간직하고자 함은 설명할 수 없는 광기 같은 열정의 표출이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떠난 후에도 강렬한 사랑의 열정은 그녀를 지배한다.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부터 계속해서 반과거 시제를 쓴 이유는, 끝내고 싶지 않았던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영원한 반복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예전의 기다림이나 전화벨 소리, 만남을 대신하고 있는 나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P52)
불륜이란 거북한 소재가 <단순한 열정>의 중심이 아니다. 아니 에르노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욕망의 자신을 단순히 솔직히 그리고자 하였고, 지금은 아련히 기억에 떠오르곤 하는 그때 자신을 글로써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인 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나의 어떤 면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옳고 그름을 거르며 읽으니 거부감이 어느 정도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그 열정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아했다. 소녀처럼 앞뒤 안 가리는 치명적인 사랑 어떤 것에 빠져본 적 없기 때문일까. 그래서 책 속에 보인 열정이 내 머릿속에선 이해되지 않는 건지... 어딘가에 무언가에 쉴새 없이 빠져드는 열정이 부럽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 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P67)
짧은 글 한 편이 마음을 휘젓는다. 솔직하고 담백한 글의 매력이 정말 대단하다. 한 남자를 기다리는 시간 외에는 어떤 미래도 없던 여자의 사랑이 부러울 때마다 펼쳐 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