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의 짝은 지금 행복합니까?
남규홍 지음 / 도모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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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짝'이라는 인기 TV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프로그램을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매주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던 남자 몇 호, 여자 몇 호의 이야기에 일부러 관심을 갖지 않으려하고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한번은 마음을 다잡고 TV앞에 앉아서 '짝'을 보고 있었는데 마음이 무척 불편해짐을 느꼈습니다. 남자가 타고 온 차, 여자의 외모, 직업과 학벌과 같은 외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내실을 드려다 볼 힌트가 되는 행동과 말을 보며 인물들의 순위를 매기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괜찮은 사람은 괜찮은 사람과 만나는 잔인한 현실과 마주하며 선택받지 못한 약자인 짝없는 짝들에게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가장 통속적인 주제인 사랑과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는 따뜻한 프로그램 앞에서 나 자신은 얼마나 세속적인 시선으로 TV밖에서 팔짱을 끼며 지켜보고 있었던가 싶어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짝을 찾는 일은 달콤하지만 때로는 잔인하다. 누구는 수없이 많은 짝을 만나지만 누구는 평생 단 한 번도 짝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만물의 짝짓기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이기적이다. (86쪽)



 



 

    이야기의 시작은 왜 하필 '짝'이었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짝>의 저자 남규홍 피디는 가장 한국다운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 가정의 뿌리가 되는 짝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해 곪을대로 곪아 삭고 썩어버린 사회적 문제들을 짝을 통해 진단하고 처방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붕괴되어가는 가정의 현실을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게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고, 그 책임을 간과하다간 한번 밀려나간 파도가 다시 돌아오듯 병이 병을 만드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짝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나갈 출구를 찾지 못해 헤메이는 구룡포 항구의 바닷가 외기러기 짝들의 모습은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라 더욱 쓸쓸하고 황량해 보였습니다.



 

    그럼 짝의 시작은 어떠했을까. 설레는 첫 만남, 그리고 사랑을 나누고 결혼으로 이어지는 그림은 TV프로그램 '짝'의 애정촌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긴장한 눈빛을 하고 교환해대는 서로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을 전달해 보려는 무언의 외침. 하지만 짝의 맺어짐은 그 어떤 밀림 속 정글보다도 치열하고 잔인한 승부를 통해 승자는 달콤한 과주를, 패자는 쓰디쓴 독주를 마셔야 했습니다. 미스코리아 출신 미녀를 얻기 위한 사법연수생 판검사 후보자의 한결같은 구애의 현장과 그 마음을 받아주는 훈훈한 '짝'의 결말은 더이상 세속적인 사랑의 모습으로 볼 것이 아니라 순수함과 진정성이 묻어나는 러브 스토리를 보여주는 한편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애정촌의 입구는 고즈넉한 경사길 계단이고 저 너머에는 몇 명인지 모르는 남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여자들은 그 순간 백마 탄 왕자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남녀가 만나는 긴장의 순간, 그들의 표정은 떨리고 흥분되어 있다. 여자들이 도착할 때마다 남자들의 시선은 복잡하게 교차한다. 천 분의 일 초로 감정이 쪼개지고 있다. 한 명씩 자태를 드러낼 때마다 남자들의 본능은 꿈틀댄다. (…) 애정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77쪽)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사랑 영화는 결혼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생활 드라마가 되고, 법정 드라마가 되기도 합니다. 시골에서 60년을 함께산 노부부의 모습을 통해 짝의 한국적인 모양을 보여주고 우리에게 짝은 어떤 의미였는지를 사회적인 통념과 문화를 바탕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또 이유와 시작점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게 패인 도시 속 짝의 균열을 보여주며, 혹시 당신의 짝도 이런 모습이지 않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 혹은 당신의 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사회적 통념아래 결혼을 유지하는 이유와 삶의 의미를 각자의 짝에게 두지 않고, 특정한 무엇인가에 두고 있는 우리 사회의 처절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결혼에 대한 처절한 현실을 느끼며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없고 사는 것은 모두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이미 결혼 생활은 몸만 있고 마음은 떠나 있다. 나에게 맞는 짝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265쪽)



    가정 문제로 끙끙대는 동병상련의 남성들에게 술집은 피난처요 구원의 장소다. 술집에 오래 있다고 모두 다 술고래는 아니다. 술잔에 담긴 사연이 그 남자가 취해가는 이유다. 술이 좋아 술을 먹는다고 생각한 것이 세상의 뚜껑을 본 것이라면 그들이 왜 집에 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뚜껑을 따고 진짜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 이것이 사는 것인가? 이것이 정녕 우리가 꿈꾸었던 사랑의 본질이고 결혼의 속살인가? 오늘도 그 남자가 술집 문을 열고 있다. (34쪽)



    연애시절 구구절절한 사랑을 노래했던 우리 부부가 지금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슬픈 한숨이 절로 새어나오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아도 해결책을 찾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시간과 돈의 여유, 그리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스스로의 문제일 수 있다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콕 집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은행 부지점장과 벨리댄스 원장 커플에 대비되는 모습으로 생산직 근로자와 가정주부 커플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으니, 세속적이었던 우리의 시선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고,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이구나를 느꼈습니다. 결국엔 사법연수생을 향한 미스코리아의 선택이 여러모로 옳은 결정이었다는 것이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동물이 인간이라는 프리즘으로 볼 때 짝의 실체는 더 선명하게 보일 수도 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하는가?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서 사랑은 때로는 폭력적이다. (236쪽)



    그리고 결국엔 스스로의 행복은 짝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전에 당신의 짝은 정말로 행복한가에 대해 생각해볼 문제라는 말을 보탭니다. <짝>이라는 화두를 통해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중년의 한 남자가 생각하는 가벼워보이지만 무거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편하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이, 현실적인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불편해서 피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우리들의 진실된 이야기였기 때문에 피하고 묵혀두고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부딛혀서 돌파해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규홍 님이 책 속에서 했던, 이 책을 통해 단 한 쌍이라도 싸움을 그치고 이별을 멈추고 술잔을 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처럼, 저도 이 글을 통해서 그랬으면 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살다 보니 제일 고마운 존재가 바로 옆에 있는 짝이었다는 생각으로 현실에 대한 모든 걱정을 잠시 잊고, 연애시절 때처럼 서로의 짝에게 행동하고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남자는 오늘 저녁 예쁜 꽃을 사들고 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여자의 말에 귀기울여 들어주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꽃을 받고 마음에 있던 고마움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남자 옆에 있어 주는 시간을 가집니다. 대한민국이 행복해지고 건강해지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은 짝의 행복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당신의 짝은 지금 행복한가요.



    지금 이 순간 짝이 던지는 화두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짝이 건강해야 가정도 사회도 평화롭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내 운명이다. 우리들의 인생은 순수하고 황홀한 짝짓기의 처음처럼 끝날 수는 없는가? 당신은 지금 가장 소중한 짝에게 희생과 배려와 사랑을 베푸는 것을 잊고 살지 않는가? 짝의 노래는 그렇게 되돌아가고 있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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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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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의 시효> F현 경찰청의 강력계 형사 반장들의 이야기 입니다. 강력 1반에는 절대로 웃지 않는 무표정의 '파란 귀신' 구치키 반장이, 2반에는 범임을 잡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구스미 반장이, 3반에는 육감을 통해 사건을 읽고 범인을 검거하는 천재형 무라세 반장이 범죄와의 싸움의 일선에 서있습니다. 이들이 맡은 범죄를 중심으로 선후배 형사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옴니버스 형식의 묶음 단편집요코하마 히데오<제3의 시효>입니다. 침묵의 알리바이, 제3의 시효, 죄수의 딜레마, 밀실의 탈출구, 페르소나의 미소, 흑백의 반전라는 제목의 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이야기는 F현 경찰청 사람들을 배경으로 각각의 강력반 형사와 반장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완전히 다른 색깔의 이야기를 그려갑니다. 



    검독수리는 대개 알을 두 개씩 낳아. 그 알은 이삼 일 간격으로 부화하는데, 먼저 태어난 새끼가 나중에 태어난 새끼를 부리로 마구 쪼아대지. 그러다가 결국에는 죽이고 말아. (184쪽)

 

 



    너무나도 다른 색깔의, 개성이 뚜렷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형사들이 펼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의 단편집 묶음이라는 점은 장편 추리 소설을 기대한 독자라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형사들이 겪는 고충과 심리적 갈등, 딜레마에 빠지는 사건, 그것은 소설 속의 범죄를 뛰어넘어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을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이야기 모두가 그렇게 비슷한 공감대를 포함하고 있기에 한편의 이야기로 묶어 두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또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법한 개성 강한 반장들이지만, 그들도 다 같은  나약한 인간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겁이 나서 그럴 수가 없다.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과장이 모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새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득실 따위를 생각지 않고 곧장 내달렸던 시기도 있었다. (130쪽)

 


    휴머니스트 미스터리의 대가라고 알려진 유명한 작가, 요코하마 히데오의 소설. 이번에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의 추천을 받고 구입해뒀다가 오랫동안 책장에 묶혀 두었습니다. 트릭을 풀고 범인을 추리해 나가는 본격 추리 소설에 빠져 있어서, 증거를 수집하고 탐문하면서 언제 발견할지 모를 단서를 쫒아 계속해서 잠복수사를 펼쳐야만 하는 형사소설에서 크게 재미를 못봤기 때문에 <제3의 시효>를 섯불리 읽을 수 없었습니다. 책장에 꽂혀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이 소설을 지금이라도 발견한 것이 천만 다행이란 생각까지 듭니다. 형사 소설의 재미와 맛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수 있었습니다. 범죄와의 싸움, 사건과의 싸움, 트릭과의 싸움 보다도 같은 형사 동료와의 싸움, 수사 과정에서 겪게 되는 용의자와 배경이 되는 법과의 싸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사 자신과의 싸움에 대한 미묘한 감정의 심리전의 참맛을 알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심리전이 굉장히 예리하고 날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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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우 J 미스터리 클럽 3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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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모든 건 우연이라는 이야기야. (135쪽)



    제 7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작이 할 소리인가요? 결국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으로 태연하게 아무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던 일상들. 그리고 그것들은 퍼즐 조각이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소설을 다 본 지금, 경악을 금치 못하며 과연 대상 작품이구나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씁쓸한 여운을 남기며, 앞에서 읽었던 소소한 대화와 행동을 돌이켜 보기 위해 책을 뒤적거려야만 했습니다.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을 처음 접했습니다. 하지만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서평을 많이 봤습니다. <섀도우>, 한 작품밖에 보지 못했지만 그가 집필하는 스타일을 대충 알 것도 같습니다. 그의 작품은 색깔이 없습니다. 대화와 행동 묘사 모두 군더더기 없이 간결합니다. 16g의 밥알을 정확하게 모아서 만든 전통 일본식 초밥의 느낌이었습니다. 정갈하게 쏙쏙 한입씩 들어가고 입안에서  톡쏘는 향이 잠시 난 뒤에 꿀꺽.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에 개성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초밥이 맛이 없진 않으니까요.



    <섀도우>는 동시간대의 일상의 모습을 다섯 사람의 시선으로 보여줍니다. 어른이면 어른, 아이면 아이, 그들이 보는 세상 혹은 환상을 그들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묘사합니다. 작가가 그 사람들의 입장에 완전히 '투영'되어 무색의 자신에게 색을 입히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암 투병중이었던 사키에의 죽음을 시작으로 의문의 자살 사건 그리고 뒤이어 발생한 교통사고, 환각인지 기억인지 알 수 없는 정체모를 영상들.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일상은 점점 비틀리고 있습니다. 마치 뭉크의 그림처럼 말입니다.



    미스터리 소설이고, 추리 소설이고, 더군다나 본격물이기 때문에 단서를 쫓아 사건을 해결해 보려는 독자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가면서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의심스럽습니다. 더군다나 중간중간에 나오는 정신의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증상은 환상인지 상상인지 영상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몇 사람이 길을 같이 달리는데 살인자가 쫓아 왔다고 해보자. 그때 살해당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건 누구일까? (39쪽)



    소설 속에서 요이치로가 아들 소스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살해당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누구일까요. 아니, 살아남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라는 질문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요이치로가 생각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속에 나와있습니다. 그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왠지 공감가는 구석도 많았습니다. 슬픔을 안고 묵묵히 살아가는 무표정한 모습의 얼굴, 담담하게 생각을 이야기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꼭 헌신적인 용의자 X 같았습니다. 이런 것을 '투영'이라고 해야할까요. 요이치로의 모습에 그대로 투영된 묘한 기분이 잠시 들었습니다.



    더는 누군가의 '보호해야 할 존재'일 수는 없다. 의지를 갖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의지로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한다. (295쪽)



 

미친 사람만이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뭉크의 <절규>

뒤에서 커플이 점점 다가오고 있고, 솔로는 분노의 절규를 하고 있다는 그림은 아니겠지.



    소설 속의 요이치로가 어느날 사온 복사본 그림입니다. 거기에 나와있는 낙서 비슷하게 쓰여진 글귀가 바로 '미친 사람만이 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입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 이야기는 말이 안됩니다. 이 작품 하나로 미치오 슈스케에게 미쳐버렸습니다. 다른 작품들도 모조리 다 읽어봐야 겠습니다. 그림에 낙서한 사람이 뭉크 자신인지, 아니면 그의 작품을 본 다른 사람들의 반응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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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연애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8
마키 사쓰지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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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납니다. 콸콸 쏟아질 정도로 펑펑 우는 눈물이 아니라, 이슬과 같은 젊은 날을 그리워하는 씁쓸한 맛의 눈물이 한숨처럼 맺힙니다. 마키 사쓰지<완전연애>는 추리소설이고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슴아픈 사랑을 그린 연애소설일 것입니다. 타인이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죄를 완전범죄라 합니다. 그렇다면 타인이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랑은 완전연애라 해야 할까요? 서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모양새의 사랑, 우리는 흔히 짝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 난 그 사람이 좋다. 언제부터 내렸을까. 차양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기와무는 자연스레 납득했다. 책 속에만 존재했던 '연정'이라는 단어가 소년에게 너무나 친숙해졌다. (53쪽)



    짝사랑은 젊은이의 특권이라고 합니다. <완전연애>혼조 기와무, 혹은 나기라 다다스 라고 불리는 일본 서양화의 대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혼과 열정이 가득한 인생을 살았고, 그 모습은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소년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아마 평생 한 여인을 향한 짝사랑을 해왔던지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젊음을 머금은 소년처럼 살았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소년은 그런 비겁한 자신을 증오했다. 국민학교 시절, 아버지의 책장에 있던 무샤노고지 사네아쓰의 희곡을 읽었다. 착하고 힘없는 주인공이 자신이 여동생도 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창자에서 쥐어짜낸 신음으로 토해냈던 마지막 대사. '나는 힘을 원한다.' (137쪽)



    황순원님의 <소나기>가 생각났습니다. 소년과 소녀의 순수한 사랑이야기. 소녀는 재쳐두고서 소년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소녀의 죽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 자신의 무능력이 한탄스러웠을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 혹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라는 거대한 벽앞에 소년이 할 수 있었던 말은 아마 '나는 힘을 원한다.'가 아니었을까요. 무능력함에 스스로가 느낀 부끄러움은 분노로 변하고 그것이 마른 장작이 되어 열정이라는 불씨와 함께 활활 타올랐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춘기때 흔히 겪는다는 질풍노도의 감정 기복이 아닐까요.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내 모습과 지금도 젊음(?)을 유지중인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 나기라 다다스의 외로웠지만 결코 그의 세계에서 만은 외롭다고 할 수 없었던, 평생이 어렸던(혹은 어리석었던) 인생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은 주위의 누가 뭐라고 한들 절대 불행하거나 외롭지 않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비밀을 끝까지 공개하지 않고 거장이 눈을 감을 때 까지 그만의 세계가 깨지지 않도록 배려해준 주위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대신 전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생각만해도 가슴 설레이는 사랑이 있는가. 

그대는 아직 젊구나.



     그것도 이보다 더 클 수 없을 정도의 대형 밀실이다. 인간 세상은 물론 태양계, 은하계까지 포함하는 광대무변한 밀실 살인이지 않은가? (235쪽)



    동생이 먼저 <완전연애>를 읽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것 같은데, 아무도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자서전이라고 해야하나, 그렇기 때문에 사건과 관련없는 듯한 곁가지 같은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천천히 나열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과연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쓸데없는 이야기들 이었을까요. 미스터리 추리소설의 팬이라면 이런 단서들을 빠짐없이 주워 담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사건은 이십년 단위로 총 3번 일어납니다. 제9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에 걸맞게 사건마다 본격류의 미스터리한 트릭이 다수 등장합니다. 밀실 살인, 완벽한 알리바이, 사라진 흉기 등등 미스터리 팬의 구미를 당기기 충분한 트릭으로 작가와 두뇌싸움을 하는 시간들이 즐거웠습니다. 아무튼 왜 사건이 일어났는데 아무도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완전연애 아니, 완전범죄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무도 그것이 범죄였는지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거 본격 미스터리의 규칙이라고 할 수 있죠?

    분명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군. 작가는 독자에게 거짓말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필요도 없다.

    예. 공정하기만 하면 그만이죠. (399쪽)



    추리소설이라는 특정 장르의 소설만 주야장천 읽다보니 이제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구나를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식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추리소설이 있으면 가차없이 책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요즘에는 어떻게 이야기의 모습을 만들어 내느냐, 서술의 형태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탐정이 등장하는 시리즈나 형사의 행동과 시점을 따라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형태의 소설은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서술 형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작가 입장에서 고민을 많이 하게될 것입니다. 독자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지만 사실을 모두 다 털어 놓을 필요도 없다는 대화가 소설 속에 있습니다. <완전연애>는 정말로 그점을 잘 활용한 소설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교묘하게 잘 숨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단서들를 잘도 흘려 놓았습니다. 그런 단서를 주워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 순간 독자들이 다른 곳으로 한눈을 팔게끔 하는 작가의 순간적인 재치도 옅볼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이 복선이긴 복선인데 라고 느끼는 순간, 이야기를 뿌리채 흔들어 정신없게 만들고 추리를 할 겨를을 주지 않는 이런 훼방이 작가의 필력이라고 해야하나, 소설을 다 읽고 이야기를 다시 돌이켜보니 정말 정신없이 일대기를 그려나갔구나 싶습니다. 



    한 사람의 일방적이고 무모하리만큼 어리석은 사랑. 이런 이야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백야행>이 생각납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맴도는 일그러진 형태의 사랑이야기. 마키 사쓰지 <완전연애>에서도 비슷한 모양새였지만 한가지 다른 점은 삐뚫어졌다고 볼 수는 없는 소년의 순수함이 도드라진 사랑이었단 점입니다. 사랑 앞에 순수하지 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하겠지만, 이 소설은 정말로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짚이는 애잔함이 묻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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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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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대학 여후배의 노트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하기위한 사전 조사로 해외 사이트에서 자료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에 막혀 어떤 것을 클릭해야하는지 난감해하는 찰라에, 무엇인가를 잘못 건드렸는지 팝업창이 와르륵 쏟아져 나왔습니다. 므흣한 사진들이 모니터 한가득 넘쳐나고 있고, 하나를 닫으면 두개가 튀어나오는 난감한 상황에 어쩔줄 몰라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당황해하고 있으니, 뒤쪽에서 여후배들이 바둥바둥거리는 제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더군요. 태연하게 '이 싸이트 뭐가 이래.'하고 투덜거렸으면 그 상황이 잘 무마되었을 것을, 급히 리셋버튼을 누르며 빨갛게 닳아오른 얼굴로, '아, 헤헤헤.' 거리고 있었으니 더 수상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 뒤로 컴퓨터실에 앉아있는 제 모습을 보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후배들의 수근거림이 귀속에서 메아리쳐 한동안 잠을 이루질 못했습니다.



    오해는 사람을 잠 못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궁지에 몰리게 합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신도 어떠한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오해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사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끝에 가서는 결국엔 별 것 아닌 이야기였나 싶기도 하지만, 그 오해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시작점을 빨리 알아내지 못하면 사건 해결에 난항을 겪기도 합니다. 제5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에 빛나는 노리즈키 린타로<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작은 오해로 시작된 처참하고 잔인한 살인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라이프캐스팅'이라고 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석고를 발라 모양을 본뜨는 조각의 한 방법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가와시마 이사쿠는 그쪽으로 큰 명성을 얻은 유명한 예술가지만 라이프캐스팅의 한계를 느끼고 긴 슬럼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 돌연히 딸인 에치카를 모델로 삼아서 예술의 마지막 혼을 불태우고 갑작스럽게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며 달려오지만, 그의 유작을 보고 더 크게 놀라게 됩니다. 그 조각상을 중심으로 미스터리한 일들이 벌어지고, 추리작가 겸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가 사건의 중심에 서면서 본격적으로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육체에 가해진 폭력과는 확연히 차원이 달랐다. 균형이 맞지 않는 일그러진 의사에 그대로 형태를 부여한 것 같은 무서운 인상. 잘라도 피가 나오지 않는 천역덕스러운 잔혹함이라는 것이 만일 존재한다면, 이 석고상이야 말로 바로 그것이리라. (124쪽)

 


 

라이프캐스팅이란 이렇게 므흣한 것. 

질근 감은 모델의 두 눈은 예술가와 눈이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 책에서는…….



    본격의 한계 중에 하나가 이미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이중적으로 흘러가는 방식을 많이 쓰고 있는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 탐정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미리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흘려놓은 단서를 실시간으로 발견할 수 있고, 수상쩍은 인물의 행동거지를 모두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선이 되어서 더욱 탄탄한 구성의 이야기가 되었고, 다시 읽어도 이런 복선을 찾는 재미가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의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는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탐정일 뿐 명탐정은 아닙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수수께끼의 풀이해설에 나서는 명탐정과 달리, 린타로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아닌 것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소거식의 추리를 합니다. 평범한 인간이 사건을 추리해 나갈 수 있는 바로 그런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직선적인 경향이 강해 오히려 증인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실수도 저지릅니다. 그런 모습을 인간적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쩌면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그리고 사건의 풀이에 고뇌하는 작가 스스로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있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소설 속에 자신과 동명의 인물을 등장시켰나 봅니다. 또한 그는 엘러리 퀸의 광팬이라고 하는데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경찰인 그의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의 관계는 퀸에 대한 오마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뇌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노리즈키 린타로는 이 작품에서도 고뇌의 흔적을 여실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각과 예술에 대한 사전 지식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장면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독자가 지루함을 느끼거나 내용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주제로써 조각과 예술이라는 큰 틀을 이루기까지 새로 쓰고 고쳐 쓰기를 수차례 반복는 등, 오랜 기간동안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고뇌의 흔적이 고스라니 담겨져 두꺼운 두께의 책이 되어버렸지만, 한 단락이라도 버릴 것이 없다 싶습니다. 오히려 클래식하고 전문적인 느낌의 한단계 높은 수준의 추리소설이란 탄생했단 느낌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고전이 될 것입니다.


 

    "잠깐만! 말이 너무 빨라서 못 따라가겠다."

    눈을 깜박거리며 노리즈키 경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린타로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452쪽)

 


    최근에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 대해 재해석한 글을 봤습니다. 본격 추리소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무대 장치가 중요하고, 트릭을 사용하기 위해서 등장인물들이 납득하기 힘든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연기를 펼쳐내느냐에 따라 본격 추리소설의 참 재미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면 퍼진 라면같을 수도 있지만, 모름지기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트릭의 비밀을 알고나서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에도가와 란포는 탐정 소설에 대한 정의로, 본격은 '수수께끼'와 '논리적 해결'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수께끼가 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그런 경로의 재미가 가득 담겨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추리소설 팬들끼리 자신만의 암호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즐길 수 있는 유희가 담긴 그런 작품 말입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에게는 권력이 있소. 하지만 난 제일 낮은 계급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지. (11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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