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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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대학 여후배의 노트북으로 프리젠테이션을 하기위한 사전 조사로 해외 사이트에서 자료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장벽에 막혀 어떤 것을 클릭해야하는지 난감해하는 찰라에, 무엇인가를 잘못 건드렸는지 팝업창이 와르륵 쏟아져 나왔습니다. 므흣한 사진들이 모니터 한가득 넘쳐나고 있고, 하나를 닫으면 두개가 튀어나오는 난감한 상황에 어쩔줄 몰라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당황해하고 있으니, 뒤쪽에서 여후배들이 바둥바둥거리는 제 모습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더군요. 태연하게 '이 싸이트 뭐가 이래.'하고 투덜거렸으면 그 상황이 잘 무마되었을 것을, 급히 리셋버튼을 누르며 빨갛게 닳아오른 얼굴로, '아, 헤헤헤.' 거리고 있었으니 더 수상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 뒤로 컴퓨터실에 앉아있는 제 모습을 보고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후배들의 수근거림이 귀속에서 메아리쳐 한동안 잠을 이루질 못했습니다.



    오해는 사람을 잠 못 이루게 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궁지에 몰리게 합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자신도 어떠한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충동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추리소설을 읽다보면 오해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사건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끝에 가서는 결국엔 별 것 아닌 이야기였나 싶기도 하지만, 그 오해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시작점을 빨리 알아내지 못하면 사건 해결에 난항을 겪기도 합니다. 제5회 본격미스터리 대상에 빛나는 노리즈키 린타로<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작은 오해로 시작된 처참하고 잔인한 살인극을 그리고 있습니다. 



    '라이프캐스팅'이라고 하여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석고를 발라 모양을 본뜨는 조각의 한 방법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가와시마 이사쿠는 그쪽으로 큰 명성을 얻은 유명한 예술가지만 라이프캐스팅의 한계를 느끼고 긴 슬럼프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 돌연히 딸인 에치카를 모델로 삼아서 예술의 마지막 혼을 불태우고 갑작스럽게 사망하기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며 달려오지만, 그의 유작을 보고 더 크게 놀라게 됩니다. 그 조각상을 중심으로 미스터리한 일들이 벌어지고, 추리작가 겸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가 사건의 중심에 서면서 본격적으로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육체에 가해진 폭력과는 확연히 차원이 달랐다. 균형이 맞지 않는 일그러진 의사에 그대로 형태를 부여한 것 같은 무서운 인상. 잘라도 피가 나오지 않는 천역덕스러운 잔혹함이라는 것이 만일 존재한다면, 이 석고상이야 말로 바로 그것이리라. (124쪽)

 


 

라이프캐스팅이란 이렇게 므흣한 것. 

질근 감은 모델의 두 눈은 예술가와 눈이 마주치는 게 부끄러워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 책에서는…….



    본격의 한계 중에 하나가 이미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탐정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이중적으로 흘러가는 방식을 많이 쓰고 있는데, 이 작품의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 탐정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미리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흘려놓은 단서를 실시간으로 발견할 수 있고, 수상쩍은 인물의 행동거지를 모두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복선이 되어서 더욱 탄탄한 구성의 이야기가 되었고, 다시 읽어도 이런 복선을 찾는 재미가 존재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의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는 실수를 많이 저지르는 현실적인 인물입니다. 탐정일 뿐 명탐정은 아닙니다. 아무런 말도 하지않고 잠자코 있다가 갑자기 수수께끼의 풀이해설에 나서는 명탐정과 달리, 린타로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아닌 것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소거식의 추리를 합니다. 평범한 인간이 사건을 추리해 나갈 수 있는 바로 그런 방법입니다. 그리고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도 직선적인 경향이 강해 오히려 증인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실수도 저지릅니다. 그런 모습을 인간적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쩌면 탐정 노리즈키 린타로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며, 그리고 사건의 풀이에 고뇌하는 작가 스스로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있는 캐릭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작가 노리즈키 린타로는 소설 속에 자신과 동명의 인물을 등장시켰나 봅니다. 또한 그는 엘러리 퀸의 광팬이라고 하는데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에서 탐정인 노리즈키 린타로와 경찰인 그의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의 관계는 퀸에 대한 오마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뇌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노리즈키 린타로는 이 작품에서도 고뇌의 흔적을 여실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각과 예술에 대한 사전 지식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장면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독자가 지루함을 느끼거나 내용을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의 주제로써 조각과 예술이라는 큰 틀을 이루기까지 새로 쓰고 고쳐 쓰기를 수차례 반복는 등, 오랜 기간동안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고뇌의 흔적이 고스라니 담겨져 두꺼운 두께의 책이 되어버렸지만, 한 단락이라도 버릴 것이 없다 싶습니다. 오히려 클래식하고 전문적인 느낌의 한단계 높은 수준의 추리소설이란 탄생했단 느낌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고전이 될 것입니다.


 

    "잠깐만! 말이 너무 빨라서 못 따라가겠다."

    눈을 깜박거리며 노리즈키 경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린타로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452쪽)

 


    최근에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 대해 재해석한 글을 봤습니다. 본격 추리소설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한 무대 장치가 중요하고, 트릭을 사용하기 위해서 등장인물들이 납득하기 힘든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연기를 펼쳐내느냐에 따라 본격 추리소설의 참 재미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추리소설이라면 퍼진 라면같을 수도 있지만, 모름지기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트릭의 비밀을 알고나서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에도가와 란포는 탐정 소설에 대한 정의로, 본격은 '수수께끼'와 '논리적 해결'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수께끼가 서서히 풀려가는 경로의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그런 경로의 재미가 가득 담겨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추리소설 팬들끼리 자신만의 암호로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즐길 수 있는 유희가 담긴 그런 작품 말입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나에게는 권력이 있소. 하지만 난 제일 낮은 계급의 문지기에 지나지 않지. (11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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