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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외 ㅣ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책도 인연이 있어야 만난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책도 사람을 골라 스스로 찾아오기도 하고, 또는 억지로 오지 않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무슨 인연이 있어서 나에게 왔을까. 이 책은 나의 어떤 점을 꽤뚫어 보고 이렇게 스스로 찾아 온 것일까. 왜 나에게 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나에게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인간실격>이라는 책을 모르고 지낼 수도 있었고, 다자이 오사무라는 인물에 대해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어떤 힘에 의해 이끌려서 이 책에 관심을 보였고, 또 이 책은 신기하게도 나의 손으로 들어왔으며, 그대로 방치해두어 될 책을 왜 나는 집어 들고 읽었는가. 그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무서웠습니다.
이 소설이 우울한 시대의 좌절하고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자신의 내면과 닮은 부분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 것도 같다'라는 그 가벼운 말과 태도-―물론 스스로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는 직접 내면의 밑바닥,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 내려가 본적이 있는 사람에게는 아픔과 상처가 될 잔인한 가벼움의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느낀 감정들에 무척 가까웠다고 여기지만 대놓고 그랬다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며 동정을 원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필요없으니 제발, 알 것 같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알량한 공감따위는 집어치우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을 주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쓴 수기형식의 소설을 남겨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타인을 위한 글을 썼던 다자이 오사무가 가장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썼던 다른 글들은 어찌보면 가면을 쓴 다른 얼굴을 한 다자이 오사무가 쓴 글일지도 모릅니다. 언뜻 <인간실격>에서 내비친 숨겨진 본 모습이 다른 글들에서도 순간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깊어지려하면 재빨리 숨기며 무서워하고 바들바들 떨며 순진무구한 가면의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자 번뜩이는 눈을 하고, 깊고 어두운 이야기가 매끄럽게 물흐르듯 줄줄 이어지는데 그것이 제가 본 <인간실격>의 모습입니다. 물론 소설 속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새로 번뜩이는 눈마저 숨겨놓고 내리깔며 바들바들 떨고있었지만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또 이런 생각도 듭니다. 결국 세상에 남겨지는 것은 음악과 그림, 글과 이름 뿐인 세상에서 자신이 살다갔다는 존재의 이유가 될 무엇인가를 남기려했던 작은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모든 것이 다 결정났고, 이 소설을 쓰고 있던 당시에 마음은 이미 끝나있던 상황에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 시간동안 끝을 준비하고 마무리 지으며 장식하는 마음으로 수기를 완성했을 것입니다. 결국에 그런 작은 몸부림이 세상에 남겨져 바다건너 타국에 있는 한 사람에게도 전해졌으니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하나. 아무튼 뚜렷하게 무엇을 위한 성공인지는 모르겠다만 성공이긴 성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의 성공은 아무나 이룰 수 없는 성공이라 그의 '실격'은 수많은 실격 당한 인간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하고 있고 마음먹고 있다고 그들이 다 같은 통찰은 보이질 못할 것이고, 같은 것을 보고 자신은 알고 있다고 인지할 지라도 표현하는 능력에서 격차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의 실격은 외적인 모습과 재능에 의해 한층 더 돋보이고 화려하며 꽤 멋있어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꽃피우지 못한 수많은 실격자들 보다도 반발의 차이만큼은 양지에 있었다고나 할까요. 이 소설을 읽고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참으로 우울해졌습니다. 세상의 인간실격자들과 다자이 오사무와의 단 하나 크고 중요한 차이점은 우린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그런 살아있음 조차도 타의에 의해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입니다. 그마저 결정하지 못한다면 실격이라는 그 '격'도 없는, 그러니까 명함도 내밀어 보지 못한 잉여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니 이 책이 나에게 올 수 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함은 알 것도 같은데 아직까지 또렷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실격>은 알았는데 그럼 나는 어떡해야하는가. 이 책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무엇이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이 소설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에게 전혀 폐가 되지 않을 만큼 전적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공감하는데, 그럼 나는 이 글을 본 다음에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그걸 모르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들이 묘하게 가슴 속에서 불안함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슬프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온 몸에서 힘인지 영혼인지 모를 무언가가 빠져나가 한없이 나약해고, 없던 병까지 생겨서 결국에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아직까지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뜻이겠지요. 내가 가진 행복의 관념과 세상 사람들의 행복의 관념이 전혀 맞물리지 않는다는 불안감, 나는 그 불안감 때문에 밤마다 뒤척이고 신음하고 자칫 미쳐버릴 뻔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어렸을 때부터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지만, 나로서는 항상 지옥 같은 마음뿐이고 나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그 사람들이 도리어 나와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15쪽)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 항상 바들바들 떨면서, 또한 인간으로서의 나자신의 말과 행동에 털끝만큼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그리고 나만의 깊은 고뇌는 가슴속 작은 상자에 감춰두고서, 그 우울과 긴장을 꼭꼭 감추고 또 감추며 오로지 천진한 낙천성만 있는 척 나는 장난꾸러기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그대로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건 얼마나 만만하고 어리석은 짓인가. 대가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자신의 주관에 따라 아름답게 창조하고, 혹은 추한 것에 구역질을 하면서도 그에 대한 관심을 숨기지 않고 표현의 기쁨에 젖는다. 즉, 타인의 생각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화법의 원초적인 비전을 다케이치에게서 전수받은 것입니다. (40쪽)
나와는 또 다른 형태로 역시 이 세상 사람들의 삶에 완전히 유리되어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만은 분명 똑같은 부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광대 짓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게다가 그 광대 짓의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나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45쪽)
아침에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자 나는 원래의 경박하고 가식적인 광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조차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솜에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를 입는 일도 분명 있습니다. 더 이상 상처를 입기 전에 어서 빨리 헤어지고 싶어서 예의 광대 짓이라는 연막을 쳤습니다. (62쪽)
세상. 어쩌면 나도 그것을 희미하게나마 알 것 같았습니다.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게다가 그 자리에서만의 투쟁이며 게다가 그 자리에서만 이기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앙갚음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때 그 자리의 단판 승부에 의지하는 것 밖에는 살아남을 방도가 없다. 그럴싸한 대의명분을 부르짖지만 모든 노력의 목표는 반드시 개인, 개인을 뛰어넘어 다시 개인. 이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큰 바다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개인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상이라는 너른 바다의 환영에 겁을 먹는 데서 약간은 해방되어 예전처럼 한없이 온갖 고민을 하는 일 없이, 이른바 우선 당장 급한 필요에 따라 얼마간 번뻔스럽게 처신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