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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 ㅣ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평점 :
저에게 어린 시절의 추리소설은, 라디오 옆에 앉아서 여름방학 탐구생활을 조금 끄적이다 마루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가던 한량같은 시절의 좋은 친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루에 엎드려 발을 동동구르며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 중에서도 조금 친하다고 여긴, 친구같은 추리소설이 바로 셜록홈즈 시리즈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제목의 셜록홈즈 시리즈를 읽었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책 속의 우중충한 삽화너머의 베이커가 221B 하숙집의 산만한 모습과 희뿌연 런던시내 안개 속에서 어둡게 다가오는 마차 소리는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을 하고 왓슨에게 서두를 것을 주문하는 홈즈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사냥이 시작되었네, 왓슨!
그동안 저작권이 묶여 있던 셜록 홈즈 시리즈가 100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 곁에 찾아왔습니다. 세상에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왔던 수많은 셜록홈즈 이야기 중에서도 이번 셜록홈즈 이야기는 그것들과 다르다고 하는데요, 앤터니 호로비츠의 <셜록홈즈 실크하우스의 비밀>은 코난 도일 재단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셜록홈즈 시리즈이고, 앤터니 호로비츠가 현재 유일한 셜록홈즈 시리즈의 공식 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셜록홈즈 실크하우스의 비밀>이 코난 도일 이후의 첫번째 홈즈 시리즈라고 하니, 그 이야기가 어떤 모습일지 대단한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공식인정'을 그렇게나 강조하고 있는지 그 점도 무척 궁금했습니다.
제가 즉석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설명할 방법이 대여섯 개 정도 됩니다. 저는 항상 모든 증거가 다른 편을 가리키지 않는 한 일련의 사건들을 어떤 식으로든 해석할 수 있고, 설령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51쪽)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역시 대단하구나' 입니다. 솔직한 말로, 정말로 무엇이 그렇게나 공식인정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으로 매의 눈을 하고 꼬투리를 잡을 요량으로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이어진 왓슨의 독백을 들은 이후로 모든 부정적인 생각과 삐딱한 태도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세월의 흐름이라는 우주의 대법칙 앞에서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 그리고 오로지 그때만 경험하고 느낄 수 있었던 꿈과 모험에 대하여 이번 모험담을 정리하던 왓슨이 느꼈을 그리움에 무한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크하우스의 비밀은 커녕 아직 본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모험이 그리워지는 이상야릇한 감정이 솟아 올라서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 속으로 순순히 빨려 들어갔다고나 할까요. 그만큼 오랜 시간동안 홈즈를 그리워하던 팬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좋은 선물이 될 소설이란 생각이 듭니다.
"왓슨, 자네는 보기만 하고 관찰을 하지 않아." (…) 내가 아니라 홈즈였다면 이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홈즈는 물을 한 방울 보여 주면 거기에서 대서양의 존재를 유추하는 친구다. 나는 그걸 보여 주면 어디 수도꼭지가 있나 보다고 생각할 사람이다. 그것이 우리 둘의 차이점이었다. (247쪽)
개인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래도 소설 속 홈즈의 말처럼 왓슨이 되지 않기 위해 재미있게 보기만 하지 않고 관찰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셜록홈즈 실크하우스의 비밀>은 앤터니 호로비츠가 이 소설을 위해 8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 속에 묻어있는 방대한 지식과 시대의 묘사를 통해 작가가 이 소설을 위해 준비한 시간과 노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나오는 소설과 같은 세련된 모습으로 변해버릴려고 할 때마다 정말로 100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도록 구식적인 문체와 표현들이 시기적절하게 등장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 입을 열면 몇페이지를 훌쩍 넘겨버리는 장문의 대화-오히려 연설에 가까운-와 이 시대 사람들이 격식을 차리는 듯해보이는 대화 중간의 수식어들이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책에서 느낄 수 있었던 번역투의 묘사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지만 분위기를 몰아가야 했던 도입부에서 이 소설이 100년 전 셜록홈즈 이야기의 연장선이라고 믿게끔 하는 묘한 마법을 발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소설이었으면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되었을 그 부분이 셜록홈즈였기 때문에 대단하게 보였고, 그런 점이 혹시 의도한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결국엔 대단한 소설로 인정하고야 말았습니다. 괜히 꼬투리잡을 생각부터 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소설은 머리로 읽을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한다는 아주 식상한 표현이 이 경우에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만은 나도 이성이 아니라 직감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네, 왓슨.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한 걸까? 마부 양반, 어서 출발해 기차역으로 가 주시오! 너무 늦지 않았기만을 기도할밖에. (127쪽)
또한 과거 셜록홈즈 시리즈에서 보여줬던 여러 장면들에 대한 반가운 '다시 보여주기'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셜록홈즈가 지내던 베이커가 221B 하숙집의 풍경과 베이커 가의 탐정단 아이들의 수색장면들이 그러했고, 안개가 잔득 낀 런던 골목의 어디선가에서 울려퍼지는 한마리 개의 메마른 짓음과 눈섭을 휘날리며 목숨을 걸고 범인을 향해 따라붙는 마차 추격전이 그러했습니다. 홈즈에 대한 정확한 묘사로 원작과 완전히 동일한 인물을 만들어냄은 당연한 것이었고, 저는 왓슨에 대한 가장 왓슨다운 생각과 행동에 대한 묘사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정도로 왓슨을 연구하고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저라도 공식 인정하려 들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홈즈 시리즈에 대한 이 정도 수준의 패러디라면 논리적으로 보아도 이건 패러디를 넘어선 원작의 연장선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싶은 생각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정답은 그것밖에 없는 듯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답안을 모두 제하면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더라도 남은 것이 정답이라고 홈즈가 수없이 강조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226쪽)
한편으로 최근에 나오는 영화와 드라마도 혹시 코난 도일 재단의 공식 인정을 받은 이야기인가 궁금해졌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많이 늘어나면 앞뒤가 맞지 않은 경우가 더러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 등장한 홈즈의 형과 모리아티 교수가 최근에 본 영화에서도 등장했었는데, 왓슨의 기억력을 토대로 쓰여진 셜록홈즈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여러모로 신경쓸 부분이 많아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이제 셜록홈즈의 공식적인 이야기는 더이상 없을지도 모를 일인데 앞으로 나올 이야기들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옛 친구 셜록홈즈의 이야기를 오래간만에 보고는 향수병인지 뭔지 모를 괜한 그리움과 뜬금없는 설레임에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기다려 집니다. 악당들을 물리칠 셜록 홈즈와 왓슨 박사의 모험이 계속해서 나오길 바랍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가 않다. 나는 오늘날까지도 그를 그리워하며 가끔 "사냥이 시작되었네, 왓슨!"이라고 하는 그 낯익은 대사가 들리는 듯한 환청에 시달린다. 그 소리를 듣고나면 믿음직한 리볼버를 손에 쥐고 어두컴컴한 베이커 가를 휘감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 일이 두 번 다시 찾아올 리 없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다. 모든 인간의 운명이라 할 수 있는 그 거대한 어둠 너머에서 홈즈가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 때면 솔직히 나도 그의 곁으로 건너가고 싶다.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