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서 읽고 제 의견을 담아서 작성하였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본 조조에 대한 첫 인상은 그렇게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촉한의 유비를 중심으로 기록된 이야기여서 유비의 대척점에 있었던 조조를 그렇게 좋게 그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조를 유비와 대척점에 있었던 존재가 아닌 한 사람의 리더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의 제목이 <운명을 탓하는 자는 결코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가 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운명을 탓하는 일은 달콤하다. 모든 책임을 외부로 미룰 수 있고, 나는 그저 가엾은 피해자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달콤함의 대가는 가혹하다. 탓하는 동안 나의 시간은 흐르고, 나의 가능성은 닫히며, 나의 천하는 점점 더 작아진다. 결국 누군가가 정해준 좁은 방 안에서, 그 방을 만든 자를 원망하며 늙어가는 삶이 남는다.'
저자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조조의 모든 행적을 미화하려는 책이 아니다. 서주에서의 학살, 무고한 이들에 대한 잔혹한 처분, 권력을 위한 비정한 결단들, 그가 남긴 피의 흔적은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비판해야 한다. 다만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잔혹함이 아니라 그의 시선이다.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보고, 세상의 규칙을 의심하며, 남의 평가에 자신을 맡기지 않은 그 시선 말이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한번 시도해 보자. 누군가의 부탁에 반사적으로 "네"라고 답하기 전에, 잠시 멈추어 내 곡식 창고를 떠올려 보는 일. 그 한 번의 멈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자신만의 들판이 펼쳐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과거에 누군가가 부탁을 하면 반사적으로 "네"하고 대답을 하고 나서 불필요한 야근을 하며 후회를 했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은 누군가가 부탁을 하면 여러 모로 고민을 해보고 불가피하게 거절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쿠션어를 사용하면서 거절하는 요령이 생겼지만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의 배신에 그토록 오래 아팠던 이유는 그 사람이 미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믿었던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서였는지도 모른다. 진짜 회복은 상대를 용서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책망하지 않는 데서 온다. 이렇게 자신에게 말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번의 배신이 평생의 상처가 되지 않고 한 권의 교과서가 된다.'
'자기를 진짜로 아는 사람은 자신의 패를 함부로 타인에게 펼쳐 보이지 않는 법이다. 펼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거짓을 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안에 자기만의 방을 한 칸 마련해 두고, 그 방의 열쇠를 자기가 쥐고 있을 뿐이다. 그 방이 있는 사람은, 어떤 관계 안에서도 결국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자리가 있다.'
'조조는 천하를 얻기 전에 먼저 자신을 얻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누구의 시선에도, 누구의 칭찬에도, 누구의 비난에도 자신의 중심을 넘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중심은 시끄러운 자리에서 자라지 않는다. 오직 조용한 자리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 앉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단단해진다. 그 단단함을 갖춘 사람만이 비로소 자신의 천하를 품을 자격을 얻는다. 천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단단함 안에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조의 삶을 통해서도 이렇게 배울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유비 중심의 <삼국지연의>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조조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조조가 비록 잔혹하고 비정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조조가 보여 준 리더십과 인재를 중용했던 점 등은 후대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이 조조에게 씌어있던 부정적인 시각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