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강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0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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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화자의 대부분이 여자이고 1인칭 시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며, 사건과 상황을 중심으로한 작은 서사구조가 있다. 내가 다시 오정희의 책 『불의 강』을 들었을 땐 그런 『유년의 뜰』과 비슷한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나 그런 예상은 빗나갔다. 화자가 1인칭이라는 것은 비슷하였으나 남성이 주인공인 것도 있었으며, 사건 중심의 서사 보다는 상황 중심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상황은 일정하게 독백으로 채워져있으며 비루하고 벗어나고 싶은 '일상'이다.

답답하고 욕구불만으로 채워진 현실의 독백이라고 하면 과한 것일까. 『불의 강』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일탈과도 같은 것을 꿈꾼다. 이런 것들이 현실과 상황을 담담하게 조망하고, 자신의 주변을 성찰하게 하기도 한다.

다만 나 자신이 그런 이야기들에 익숙치 못하며, 서사구조가 없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그래서 『불의 강』을 읽는 시간은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걸렸고, 내용 또한 지루하게 다가왔다.

내 흥미를 고쳐야 할까, 아니면 내 흥미에 맞추어 글을 읽어야 할까. 전자쪽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흥미에 맞추어 글을 읽기에는 내 경험과 독서량은 부족하며 지식 또한 협소하다.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편식에 가까운 내 글읽기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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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 (구) 문지 스펙트럼 6
이청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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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의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떠올려본다면 누구나 황순원의 '소나기'를 상상하며 징검다리에서 소년과 소녀의 아련한 만남을 그리게된다. 이렇게 모든 이에게 소설 '소나기'가 생각나는 것은 학창시절 국어나 문학교과서에 실려 원하든 원치않든 한 번쯤 그것을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3년 동안 학교 수업시간에 배웠던 문학 중엔 쉽게 잊혀지지 않고 자주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 수탉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다툼이 결국 사랑의 확인으로 이어졌던 김유정의 <동백꽃>, 어린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어머니와 사랑방 손님의 사랑을 그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달빛으로 마치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하얗게 빛나는 메밀꽃이 떠오르는 <메밀꽃 필 무렵>,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켜주기 위해 붕어값을 버찌씨로 받은, 지금은 제목을 알 수 없는 이야기...

학교에서 배웠던 이런 소설을 떠올릴 때면 표현력과 감성이 부족한 나는 그저 '참 이쁘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하곤한다. 그래, 그 이상 그 이하의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참 이쁜 이야기들이다.

이청준의 『눈길』을 읽으며 나는 계속 예전 학교에서 배운 그런 이쁜 소설들이 떠올랐다. 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은 물론이고 내용이라는 것도 무난하여 읽는 내내 내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특별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일상, 그렇지만 삶의 순간순간 마다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이야기. 그래서 더더욱 생활에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 참 이쁜다.

책에 나온 서문과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삶을 삶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권력지향성이 없는 어쩌면 동화와 같이 편하고 마냥 아름답기만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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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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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경제활동을 한다하더라도, 새벽에 나가 좆뺑이 치고 저녁에 피곤한 몸으로 들어오는 하루하루라 하더라도 한달이 넘도록 책 한 권 읽지 않았다는 건 정말 너무했다. 그것도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그랬다는 건 정말 심했다. 밤이면 밤 마다 무엇을 했기에 그동안 책을 읽지 않았는지... 무지 창피하다.

'영화와 소설'이라는 과목을 수강하고 있다. 영화 감독을 중심으로 발표하는 작가론 수업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처음으로 발표하게 되었고, 그 주제는 '이창동의 영화세계'였다. 이창동은 감독이 되기 이전에 소설가였다. 좋은 발표를 위해 그의 소설도 읽었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 90년대 초반에 발표된 이 책은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운동'과 관련있는 이야기들이다. 일반 민중이 투사가 되어가는 이야기, 좌익 아버지의 알 수 없는 행위, 수배자가 되어 도망다니는 동생, 탄광촌으로 가 레지가 된 여학생.

이런 이야기의 단편들은 운동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 외에 이창동씨의 개인적 경험처럼 느껴지는 공통점도 있다. 특히 '진짜 사나이'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경험을 그냥 옮겨놓은 듯 하다. 그리고 '용천뱅이'는 좌익이었다는 이창동 아버지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 이렇게 단 두편의 영화로 우리나라 리얼리즘 계보를 잇는 대표 감독으로 평가받는 이창동. 그의 소설도 영화와 같이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 속에 긴박되어 파괴되어 가는 존재를 그린 이창동 영화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이창동의 『녹천에는 똥이 많다』 또한 그러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지만 그보다 더 강한 질문,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를 독자에게 던진다.

기억과 경험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쁜 상황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잘 살 수'을 있을까. 시간과 공간의 비루함을 넘어서 인간은 이상을 간직하며 살 수 있을까.

수 많은 질문이 던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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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범우문고 13
김승옥 지음 / 범우사 / 198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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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 자주 간다. 앞으로도 자주 갈 것 같다. 특별한 이유랄 것은 없다. 그냥 그 산이 좋고, 그 산에 안기면 푸근하기 때문이다. 지리산으로 떠나기 전,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오는 설레임을 사랑한다. 그 산 어느 봉우리에 가만히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그 바람소리를 들을 때 난 행복하다. 저 멀리 보이는 숲의 더없이 신선하도록 푸르른 빛과, 검푸른 도화지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아찔하게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빛을 사랑한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리산에 오른다. 그러나 이런 것은 내 육체의 오감으로 직접 느껴지는 것으로, 내 의식과 마음의 어떤 부분이 그 산을 찾게 하는지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다.

어찌되었든 나는, 언제나 지리산으로 떠나는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비단, 지리산만이 아니다. 현재로선 박경리 『토지』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하동군 평사리를 걷고 싶고, 벚꽃이 피면 그토록 아름답다는 쌍계사에도 가고 싶다. 그리고 남도 들녘과 마을을 구비구비 적시며 흐르는 섬진강 처음과 끝을 걷고 싶고, 소나기 쏟아지는 여름날 자전거를 타며 경주를 돌고 싶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감은사지 탑 앞에 서면 참 좋겠다.음... 그리고 작년 봄에 걸었던 진도, 야트막한 언덕이 자주 나타나고 그 언덕길이 참 이쁜 진도에도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또... 어디에 가고 싶더라....

이렇게 가보고 싶은 곳을 떠올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설레이고 당장이라도 배낭을 꾸려 휑하고 떠나고 싶어진다. 그렇지만, 현실에 속해있고, 그 현실에 발붙이고 살고 있는 이상 마음이 끌리는 대로 떠날 수는 없는 법.

사람에게 현실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항상은 아니지만, 자주 현실 너머의 삶을 꿈꾸고, 그리며, 떠나는 것일까. 『무진기행』에서 남자주인공은 안개가 짙은 무진으로 떠나, 그곳에서 얼마간 생활한다. 그는 그토록 짙은 안개에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싶었던 것이고, 희미하고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안개와 자신이 일치하는 것에 안도했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왜 지리산으로 가는 것일까.
왜 나는 평사리, 섬진강, 진도에 가고 싶은 것일까.
너무도 궁금하지만 난 아직 명확히 모르겠다.

여전히 내 현실은 답답하다는 것, 그래서 오늘도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것.
이것만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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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세트 - 상.하권
열린책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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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기 때문에 영원한 문학에게 억지로라도 그 역할을 부여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 역할은 인간 뇌에 저장되는 기억의 유한함, 그로인해 자주 망각하는 어리석음에 저항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문학은 허구와 실재 사이에 위치한다. 상상력으로 충만한 환타지, 혹은 실존의 인간 질서를 그대로 그려놓은 듯한 리얼리즘 작품이라 하더라도, 허구와 실재의 외줄타기는 환타지와 리얼리즘 모두에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그러하듯 문학작품에게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재현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우리가 알지못한 것들을 일깨워주는 것이 있기에 미완에 실망하고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가끔, 사극이나 역사소설을 볼 때면 그것이 정녕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알고보면 사실의 한 부분 혹은, 작가가 상상해낸 조작임에도 종종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혹은 설마 저러했을까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본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의 한 단면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소설이 아닌 역사책의 기록처럼 세밀하고도 생생하기에, 재미있는 사극을 보는 것처럼 그것이 실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책은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에서 미궁의 장서관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연쇄 살인 사건을, 현명한 윌리엄 수도사가 추리, 기호, 상상으로 풀어가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중세 기독교의 암울함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당시 종교가 가지고 있던 극단적 독선의 모습도 등장한다. 이것 때문에 『장미의 이름』은 서양 중세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필독서로 되어있다.

한 선배는 이 책을 백과사전 같은 책이라고 했다. 그만큼 많은 정보와 사실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나는 중세 역사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다. 게다가 출퇴근 길에 이 책을 조금씩 읽었기에 내용연결이 무난하게 되지 않았다.

책의 내용과 구성 자체가 익숙한 것도 아니었고, 참으로 생소했으니 이해와 받아들임이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장미의 이름』은 적어도 두 번 정도는 읽어야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에 안도하며, 훗날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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