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세월은 사람을 허투루 관통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럽게 조금씩 쌓여 가는 삶의 경험은 존재를 성숙시키고, 작은 깨달음을 안겨주기도 한다. 또한 살다보면 흐르는 시간이 인간 세상의 갈등을 조금이나마 해결해 주고, 아픔을 잊게 해주기도 하는데 이런걸 보면 시간의 흐름은 삶을 농익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경험을 통해 깨닫게되는 모든 것들은 쉽게 변화하지 않고 깊이 있는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 준다. 이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투박하지만 진실되고, 비루하지만 소박하고 질척한 삶을 만든다. 이에 반해 책을 읽거나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깨달음은 그 깊이가 훤히 보이기 나름이고, 넓이는 협소하다. 따라서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은 그 생명이 짧고 삶에서는 은은한 깊이를 느끼기 어렵다.
이문구의 소설 속에는 전자의 사람들, 즉 입으로 그럴듯하게 떠벌리고 외적으로 화려함과 풍요로움을 좇는 대신 투박하지만 진실 된 사람들, 지켜야 할 것은 힘겨워도 우직하게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극적이거나 짜릿한 재미가 없는 대신 은근하고 질철한 감동이 서려있듯이, <내 몸은....> 또한 순간의 재미를 느낄 수 없지만 한 생을 우직하게 살아온 시골 촌로의 한 그루 소나무 같이 한결같은 삶의 감동이 잔잔하게 담겨있다.
책 속의 8편 단편들이 모두 '장평리 찔레나무', '장석리 화살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등등처럼 나무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작가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제목으로 쓰인 나무는 나무이되 나무 같은 않은 나무이지요. 그렇다면 덩굴이냐, 덩굴도 아니지요. 풀 같기도 한데 풀도 아니고 그러나 숲을 이루는 데는 제 나름대로 역할을 하는 나무이지요. 꼭 소나무나 전나무, 낙엽송처럼 굵고 우뚝한 황장목 같은 근사한 나무만이 숲을 이루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존재 가치가 희미한, 그러나 자기 줏대와 고집은 뚜렷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돈 없고 힘 없는 일년살이들도 숲을 이루는 데는 꼭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작가의 말대로 근사하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숲을 이루는데는 꼭 필요한 나무. 사람 사는 세상에도 숲과 마찬가지로 존재 자체로 빛나지는 않지만 세상을 이루는데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작가는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삶과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그러나 숲과 달리 인간 세상은, 존재 자체로 빛나는 사람들이 언제나 빛을 발하기 위해 종종 지켜야 할 것을 쉽게 버리곤 한다. 그에 반해 우직하게 지킬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사회를 지탱해 가는 소시민이다.
인간 사는 세상이 숲의 모습을 반이라도 닮을 수는 없을까. 소나무는 그야말로 소나무처럼 기품이 있고, 찔레나무도 그 나름대로 소중한 숲의 상생 원리가 인간 세상에는 통할 수 없는 것일까. 소나무와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양지만을 좇아 수시로 변신하는 모습을 그만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내 몸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