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차이, 차별, 처벌 - 혐오와 불평등에 맞서는 법
이민규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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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에 의해 쓰였음이 절절히 녹아있는 책. 정체성 정치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이것을 호명한 이유는, 해당 정체성에 의한 서술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



이전에 쓴 100자 평에서 '비장애인 비퀴어 이성애자 남성에 의해 쓰였음이 명백한 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른 페이지를 넘기기 전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저자가 강조하는 공정성과 형평성(^^)을 위해 꾹 참고 끝까지 읽었다. 결론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 좋았을 법했다.



읽어야 할 좋은 책이 산더미인데 '이런' 책을 리뷰하느라 시간을 들이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이 구조적 차별(과 차별 금지법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담론의 전부라고 비춰질 것이 우려되어 한 마디 적어본다. 



왜 그렇게나 별로인 책을 읽고 굳이 열을 내느냐는 생각이 이 책을 끝까지 꾸역꾸역 읽으면서도 몇 번이나 치밀어 올랐으나 구태여 변명을 하자면, 나도 이 책의 제목이 '구조적 차별에 대한 신자유주의자의 단상' 정도였으면 애초에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차이, 차별, 처벌>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결국 '기회의 공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논지의 흐름은 애석한 정도가 아니라 차별과 평등을 다루는 수많은 사회•인권운동에 유해한 지경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법조인으로 활동 중이라고 하는 저자의 약력을 읽고 <차이, 차별, 처벌-혐오와 불평등에 맞서는 법>이라는 이 책의 제목, 그리고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서 언급하는 "차별금지법"이라는 키워드를 접한다면 당연히, 법률가의 관점에서 차별금지법의 역사와 개요, 그 필요성과 적용 방식에 대해 논하는 내용을 담고있으리라 예측해봄직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자는 '구조적 차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구조적 차별이라는 인식의 핵심은 말 그대로 '편견과 차별'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 사회의 구조에 이러한 차별과 편견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앎의 방식은 사회구조적 약자에게 제도와 관습이라는 방식으로 편견과 차별이 가해지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차별적 사회구조를 개선 또는 철폐해나가고자 하는 성격을 지닌다. 예컨대 '남성/백인 혐오도 나쁘고 여성/흑인 혐오도 나쁘다'는 문장은 '모든 혐오는 나쁘다'라는 점에서 언뜻 맞는 말 같아보이지만, 구조적 차별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자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백인/남성이라는 카테고리에 구조적으로 가해지는 공고한 차별과 편견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이 결국 거대한 인종차별/가부장제 여성혐오의 구조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평가해보라. 여기서까지 이 뻔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는 않다.) 요컨대 구조적 차별과 혐오는,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저자도 중간에 '개인적 차원에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기분 나쁨의 문제는 혐오의 문제라고 보기 힘들다'고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더 다루기로 한다.)



이 책은 제목처럼 <차이>, <차별>, <처벌>이라는 세 개의 소주제로 구성되어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차이>라는 말이 한 챕터를 차지하며 등장하는 시점에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저자는 훌륭한 본질주의자이다. 2021년이 다 저물어가는 중인데도 "양성평등"(95)을 이야기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의 성별'에 호르몬과 염색체 등의 작용으로 인한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애석하게도 인간의 염색체와 호르몬은 '여성'과 '남성'으로 자로 잰 듯 구분되지 않으며, 이것을 굳이 성차로써 제도적으로 구분한 것 또한 사회적 인식(그리고 더 나아가 차별적 인식)의 산물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 내용이 더 궁금한 사람은 도란스 총서에서 나온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를 읽어보시길. 연결지어 읽기-<변이의 축제>) 과학은 단 한번도 '중립적'이었던 적이 없다. '정치적인 입장이 없다'는 것 또한 하나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이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결국 어떤 구조적 차별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양성'에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발생한다면,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라고 결론지을 것이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학습되고 양육되기에 그러한 성차가 관찰되는지, 더 나아가서는 그 두 개의 젠더가 그렇게 구성된 방식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야기할 것도 없이 그렇게 신봉해 마지않는 '과학적 근거'를 대자면, 여성과 남성의 뇌가 '생물학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신경과학의 연구도 파다하다. (<젠더 모자이크>) 권김현영의 지적처럼 “성차에 집중하는 연구들은 그 자체로 뉴로섹시즘, 즉 뇌과학과 진화심리학의 융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성차별주의를 양산”함에도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177) ) 뉴로섹시즘에 힘을 실어주는 연구 결과들만 골라 언급하며 급기야는 스티븐 핑커의 차이와 차별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이 책을 만드느라 잘려나갔을 나무들에 대한 생각에 가슴이 아파올 지경이었다. <차이>와 <차별>에 대해 말하는 낡은 사회심리학 연구들을 굉장히 표면적으로, 아주 약간씩 탈맥락화해서 예로 드는 것으로 미루어보건대 애초에 이 부분에 대한 공부나 이해가 애처로울 정도로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은 이러한 본질적인 '차이'를 차별로 가져가지는 말자는 말이 하고 싶은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애초에 그런 차이가 있다고 단언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으로 무용하거니와 오히려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회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가져와 결론을 이런 식으로 짜깁기하는 것은 사회심리학에 대한 모독이다.) 차별에 대항하는 일은 존재와 몸을 둘러싼 투쟁이다. '너와 나는 생각하는 것이 다르구나 우리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스탠스를 취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저자 본인이 비장애인 비퀴어 이성애자 남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동성애를 지지"(40)와 같은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이 부분은 이제와 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인의 성적 취향은 개인이 지지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동성애 인권 운동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스탠스조차 살피지 못하면서 이런 책을 쓸 생각을 했지? 다음으로 넘어가자. 



<차별> 파트에서는 저자 본인의 정제되지 않은 편견과 계급의식, 신자유주의적 발상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정말 읽기 힘들었다. 너무 많아서 다 꼽을 수 없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다면, 출신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사회적 상승이 가능할 것이다." (87) - 능력주의에 대한 담론은 한국 사회에도 이미 널리 알려져있는 가운데 진짜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지적 능력을 지닌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적 성공 격차에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 변수가 ‘(중산층 이상의) 가정 환경’이었다는 결과를 언급하며) “이런 결과가 부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층이 늘 입시 비리와 같은 부당한 방법만 동원해, 자녀에게 이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90) - ???? 이쯤되면 이 책의 집필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기회와 결과의 평등을 실현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행복과 만족의 측면에서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 점에서 만큼은 우리 모두 평등하다."(91) - 게으른 결론이다. 어차피 무한 경쟁의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속에서 다같이 허우적거리고 살 거라면 국가와 사회가 지녀야 하는 최소한의 책임은 모든 개인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만큼은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결과적 평등 상태를 달성불가능한 목표로 설정해놓고 기회의 공정을 운운하며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가 늘 차별을 용인하는 태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102)라고 결론짓는 것은 차별과 평등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 얼마나 얄팍한 수준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여태 ‘기회의 공정’을 강조하다 결론에 와서 이것을 ‘(달성 불가능한) 결과의 평등'과 동급으로 치환하며 '평등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차별 해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더 나아가 구조적 차별에 적극 기여하는 본질주의적, 신자유주의적 이야기를 앞서 실컷 해놓고 '사회적 약자에게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보는 관점은 결과적으로 차별을 조장하지는 않습니다용~' 해버리면 끝인가??? 이 근본 없는 논리에 짜증이 치민다. 게다가 사회 구성원들간의 본질적 차이는 존재하나 이것이 곧 차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과의 평등보다는 기회의 평등에 힘써야 하고, 그렇지만 결국 ‘진정한 의미의 평등’은 없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여초/남초 직업군의 성비 균형을 맞추려는 제도가 무용하다는 점 또한 지적했는데 이 부분의 서술도 아주 흥미롭다. 저자는 다양한 나라에서 이루어진 학업적성테스트 결과 여성들이 거의 모든 항목에서 남성보다 더 우수한 성적을 거뒀음을 언급하면서도, 이공계로 진출하는 여성이 적은 현상에 대해서는 여성이 '더 많은 비교우위를 지닌 문과 계열로 진출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이것을 "성별간 차이를 더욱 면밀히 분석해 도출한 합당하고도 신뢰할 만한 연구 결과"(97)라고 한 부분에서는 감탄하고야 말았다. 본인이 구조적 차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을 해소하기 위한 근본적인 접근을 하고 있지 못하니 자꾸만 헛다리를 짚고 논리 오류에 빠지게 되는 거다. 요컨대 이런 것이다. '기회의 공정'에 천착하니 여초/남초 직군의 성비 문제를 두고도 '성비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는 무용하다/잘못되었다'는 결론 밖에는 내지 못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개인의 선택권이지, 그 반대가 아니"(98)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제해놓고 연구 결과를 보니 여성이 대부분의 적성 평가에서 남성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엥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 이제 잘못된 믿음으로 인지부조화를 해소할 시간이다. '여자들이 그럼 더 많은 비교우위를 지닌 문과 계열의 직업을 선택하나보다.' 적고 나니 아무래도 본인도 부실한 근거가 민망하긴 했나 보다. 별안간 ‘이것은 성차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합당하고 신뢰할만한 연구 결과이니 이것을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려는 시도나 평등이라는 대의를 저해시키려는 의도로 몰아붙여서도 안 된다."(97)'고 한다. 이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 전개인가. 



다시 말하지만, '적성'이나 직업의 '선택' 역시, 젠더 역할이라는 사회적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이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합의된 수많은 개념들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온전히 본인의 의지만으로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순진한 발상이다. 우리는 원하도록 만들어진 것을 원하고, 그렇게 갈망하도록 요구받는 것을 갈망한다. 직업군을 선택할 때 어떤 성차가 발생한다면, 이 또한 '개인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각 개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선택하게 만든 구조적 요인이 없었는지를 살필 일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저자가 간과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있다. 저성장시대의 후기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요즘 인간들은 그저 돈이 되기 때문에 혹은 안정적이니까 그 직업을 선택한다. (요즘 누가 적성 따라 취직하나?) 사회보장제도가 비교적 잘 되어있는 북유럽의 경우 여성들이 문과 계열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연구 결과를 가지고 '먹고 살만한 여성들이 문과 계열로 진출하는 현상은 문과 계열이 정말로 ‘여자’의 적성에 맞는 일이라서 그렇다는 증거이다. 따라서 직업군에 성비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는 무용하다'고 안일하게 결론낼 것이 아니라, ‘먹고 살만하지 않은 여성들이 (적성도 아닌데)(!)굳이 이공계 직업군으로 몰리는 이유’에 주목했어야 한다는 거다. 성차라는 현상을 놓고 정말로 <차별>과 <평등>을 말하고 싶었다면, 기회의 공정을 말하기에 앞서 남초 직군의 평균 급여가 여초 직군의 평균 급여보다 더 높은 점, 그리고 그 와중에도 남초 직군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평균 급여가 동일 직급의 남성 평균에비해 훨씬 더 낮다는 점을 먼저 지적했어야 옳다. (‘유리 천장’은 덤이다.)



이렇게 구조적 차별에 대한 몰이해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계급주의적 발상을 뽐낸 저자는 <처벌> 파트로 넘어간다. 이 부분이 화룡점정이다. 


 

저자는 "한국인의 등산복 사랑"(108)을 비판하며 이 장을 시작한다. '한국인의 등산복 사랑' 이야기는 이미 애국가 4절에 만세삼창까지 부른 이야기라 이것을 반박하는 일조차도 아주 구태의연하게 느껴지지만 굳이 조금 말을 보태보자면, '한국인은 (때와 장소를 못 가리고 비싼) 등산복을 즐겨 입는다'는 비난은 주로 1세계 (또는 ‘1세계 물을 먹은’) 인간들이 본인들이 정한 '문명인의 기준’에 못 미치게, 즉 ‘tpo 못 가리고’ 옷을 입는 한국인들 (그러나 돈자랑은 하고 싶은)을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본인은 '이해가 안 된다'고 썼지만 답습된 1세계 식민주의적 관점에서의 한국인 혐오를 한국어 화자가 구사한다는 것 자체가 자기 혐오적이고 부적절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지 못한 듯 하다. 더구나 이후에 말하고자 하는 바와 조금도 관련이 없는 내용인 것으로 미루어 (이어서 한국의 취준 행태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저자가 '미개한 한국인들'에 대해 '1세계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로서 얼마나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어떻게 아냐면, sns만 가봐도 이런 논조로 한국인들을 비난하는 제국의 아들딸들이 몇 트럭씩 쏟아진다.)



이어서 비판하는 대목은 "이력서에 사진을 첨부하는 문화"(110)이다. "나는 이것이 합법적이라는 사실이 가장 놀랍다."(110)며 선민 의식을 과시한다. 한국에서 차별을 위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취업 차별을 받는 당사자들이 이 사실을 모를까? 이 사실에 가장 분노하고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한국에서 ‘취준’도 해보지 않은 저자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열심히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당사자들일까? 한국 밖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것도 한국 밖 사회에서 어떤 계급적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거나 본인의 셀링 포인트로 삼은 사람이),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단어 선택에 정말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굉장히 애석하게도 이것은 본인이 스스로를 얼마나 한국 사회와 가깝게 느끼고 있는지와는 정말!! 조금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발화자로서의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고 쓰는 글은 오만이고 무례이다.


 

가장 의아한 대목은 (사실 여기서 저자가 읽는 것을 관두길 권하길래 나도 잠시 읽기를 관두었다.) 이 모든 논의의 종착점이 '외모 차별'이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수많은 차이와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놓고 반복적으로 "외모 차별 또한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과 마찬가지로 부당한 행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114)라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저자는, 외모 차별을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과 동일한 구조적 차별이라고 보는 것일까?


 

물론 루키즘도 사회적 편견과 차별임은 확실하다. 이것이 외모의 정치학과 결합하는 순간 장애를 억압하는 상호교차적 계층화에 의한 차별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듯, 저자가 이 지점을 섬세하게 다룰까? 당연히 아니다. 저자는 한국의 '취준 행태'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획일적인 미의 기준이 취업시장에서마저 강요되는 점을 문제 삼는다. 그러면서 매력적인 외모를 유능함과 연결 짓는 사회심리학 연구를 몇 가지 소개하며 "아름다운 외모는 능력을 넘어 권력이라 칭할 만하다."(113)라고 말한다. 여기서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강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미적 기준이 오직 여성에게만 강요된다는 사실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더해 사회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말할 때도 남성들은 매력적으로 생길수록 '능력 있음'으로 평가되지만 여성들은 일정 수준 이상 매력적이라고 인지되는 경우 오히려 '능력 부족'으로 평가된다는 이 실험의 핵심 연구 결과 또한 언급하지 않는다. "데이팅 앱이나 소개팅 자리 등 사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차별 행위는 삶이나 일상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다."(136)고 말하며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기분 나쁨의 문제는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루키즘이 성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사실은 간과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비퀴어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에 대한 ‘외모 차별과 억압’이 데이팅 앱이나 소개팅 자리 이외의 그 어느 공간에서 작동한단 말인가? 문장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을 더는 보기 힘들어 150쪽 쯤에서 읽기를 멈추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이야기한다면서 현실과 더 밀접하게 맞닿아있는 구조적 차별은 언급하지도 않고 외모 얘기만 얄팍한 선에서 구구절절 하고 있는 부분에선 그저 눈물이 났다. 미적 기준이야말로 유구한 여성/동성애/장애/퀴어/유색인종 혐오에 비해 시대에 따라 유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고, 본인이 앞서 열거한 것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기분 나쁨'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물론 거듭 강조하듯 모든 것이 루키즘이고 루키즘 역시 아주 해롭다. 그러나 굳이 루키즘의 문제만 다른 구조적 차별과 혐오로부터 따로 떼어 놓고 구분해서 말할 수도 없거니와, 다른 구조적 차별과 혐오의 범주에서도 루키즘 이야기는 ‘정상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충분히 다룰 수 있다. 비만에 대해서라면 굳이 이야기해볼 수 있겠지만 당연히 이 부분도 언급조차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미적 기준이라는 것이 다른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외모 차별'이 구조적 약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 예컨대 본질적으로는 성차별이 문제라는 지점 (한국 남성의 비만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사실을 떠올려보자)을 적시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못생긴 남자도 살기 나빠요 그러니까 외모 차별은 나쁩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리고 이것을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은... 저자에게 어떤 결핍이 있지 않나를 의심하게 만든다.



차별금지법에서 시작해 외모 차별은 부당하다는 성토 대회로 끝나는 책이다. 쓰다 보니 생각보다 말이 더 길어져서 놀랍지만 이 글이 이 책을 구매하려고 고민중이거나 이미 읽어본 사람들에게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를 그저 웃음짓게했던 문장 몇 개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정말 마지막 질문만 남았다. 외모 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할 차별인가?" (142) - 정말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질문이 고작 그것인가?



"과거에는 성별이나 부, 혹은 피부색으로 인해 투표권이 주어졌음에도 문제를 지적하는 지식인이 없었다." (140) vs "사회 현상과 인간의 행동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를 일반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145)  - 일반화하기 vs 일반화 할 수 없다고 하기가 5페이지 범위 안에서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이 장관이다.



"데이팅 앱이나 소개팅 자리에서는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는 것이 엄청난 사회적 논란으로 번지거나 기사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일이 없다는 소리지, 개인적으로는 평생 싱글로 살게 될 확률이 높다." (135) - 1.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차별>을 말하는 사람의 태도여야 하지 않을까용 2. 모든 것을 이성애로맨틱 규범의 범주에서 판단하는 것이 그저 한숨이 나옴 



"차별의 맥락을 따질 때 고려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자 첫 번째 요인은 의도이다." (122) - ???? 저도 좋은 의도를 가득 안고 한 대만 때려도 되죠



"외눈이 차별적 표현이라면 그 누구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 듀피트렌 구축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왜 '손발이 오그라든다'라는 표현은 허용하는가? (...) 이 역시 장애인에 대한 차별 발언이고 지양해야 할 표현일까? 답답한 상황에서 흔히 사용하는 '암 걸린다'라는 표현은 어떤가? 암 환자나 그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미치겠다'라는 표현 역시 정신 질환자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121) - 뒷걸음 맞말 대잔치 중임



"고용주나 임대인의 각기 다른 요구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지원자의 자유만 우대하는 것은 과연 옳은 정책일까?" (117) - 와우~~~~~~~~~~~~~~~~~~~~~~~~~~~~


 


**덧) 차별금지법에 대해 읽고 싶은 분은 이주민씨가 쓴 <왜 차별금지법인가-평등은 우리 모두에게 이롭다>를 일독할 것을 권한다. http://aladin.kr/p/tPV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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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0-25 15: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저자의 스탠스가 “너는 나랑 다르지만 차별하진 않을게~”라는 시혜적 느낌인 것 같은데 맞나요? 분개하시는 포인트들에 공감이 갑니다. 추천해주신 이주민씨 책 담아야겠네요.

적막 2021-10-25 15:56   좋아요 0 | URL
표면적으로는 아주 노골적으로 시혜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국 들여다보면 ‘여성과 남성은 유전자와 호르몬 때문에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성소수자는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ㅋㅋ) (비퀴어) 이성애자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확연히 구분되는 인종적 특질은 분명히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면서 차별에 대해 말하고자 글을 썼다는 바로 그 부분이 아주 시혜적으로 느껴진달까요 ㅋㅋ 아 이사람 차별 받은 경험이 별로 없구나 싶어요^^; 본문에도 썼습니다만 사회적 약자와 기득권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그러한 차이에 대한 인식이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싶었다면 논리를 보다 탄탄히 했어야 할텐데요, 결국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명확하지 않게 중언부언하다 외모 얘기를 하며 끝마치다 보니, 이게 차별을 하지 말자는 것인지 뭔지, 도대체 이 글을 무슨 목적으로 썼는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ㅋㅋ 솔직히 처음에는 조금 거슬리는 표현이 있어도, ‘그래 이건 대중교양서니까 나같은 꼴페미 보라고 쓴 책은 아니더라도 (구조적) 차별에 대해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차별의 위험성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줄 수 있을거야’ 라고 믿으며 책장을 넘겼는데요, 종장에 가서는 ‘같은 차별이라도 맥락을 고려해야 하며, 의도가 선하다면 처벌할 수 없다’고 말하질 않나 결과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차별은 괜찮으므로 차이에 기반해 차등을 두자는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장으로마저 읽히는 지경입니다. 그정도로 형편없는 졸작이에요. 그렇다고 차별금지법의 당위나 내용에 대해서 진지하게 설명하는 글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