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1 밀리언셀러 클럽 64
기리노 나쓰오 지음 / 황금가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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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 고교시절, 수업을 땡땡이 치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때우다 그의 소설 <그로테스크>를 발견했다.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 숨어 들다니 성실한 건지 삐딱한 건지 알 수 없어 웃음이 나온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마니악한 소설을 학교 도서관에 꽂아둔 사서의 취향이 의심스럽지만 다행히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책을 펼쳐드는 순간 기리노 나쓰오가 그려낸 세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상당히 느린 편이고, 소설의 경우엔 모든 장면에서 그 배경과 분위기, 등장인물의 외형과 목소리까지 영상으로 재생하듯 상상하며 읽는 버릇이 있어 완독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은 그런 수고가 아쉽지 않을 정도로 늘 치밀하고 생생하게 전개된다.

일본의 찌는 듯한 여름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과연 기리노 나쓰오답게 기묘하게 뒤틀린채 각자의 어둠을 지니고 있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도시락 공장에서 야간 파트타임 근무를 하는 네 명의 여성, 가부키초의 호스티스, 대부업자, 살인 전과가 있는 불법 도박장 운영자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아웃’된 존재들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로에게 맞물려들게 된다.

살인 사건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이라고 자주 소개되는 것 같은데, 추리소설이나 정통 하드보일드소설처럼 범인을 추적하거나 살인 자체의 잔인함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살인과 시신의 해체(!), 사후 처리는 소설의 초반부 아주 디테일하지만 긴장감있게 지나가고 해당 사건과 관련한 인물간 미묘한 긴장과 내적 갈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은 한국어로도 읽고, 영문 번역판으로도 읽고, 일본어 원문으로도 읽을만큼 좋아한다. 고등학교 입시 지옥에서 살 때는 자습시간에 책을 읽고 나면 왠지 모를 죄책감에 빠져들곤 했었는데 같은 책이라도 영어나 일본어로 읽으면 ‘외국어 공부 했다’고 자위할 수 있었으므로 (그도 그럴 것이 수업 시수가 영어 9시간 제2외국어가 7시간에 달했다) 그의 소설만큼은 편한 마음으로 읽어댔다. 그 때의 묘한 향수가 남아서인지 그 뒤로도 쭉, 겨울이 되면 <그로테스크>를, 여름이 오면 <아웃>을 마치 어떤 의식처럼 읽어 오고 있다.

올 여름엔 공사가 다망하여 (게다가 올해 미국의 여름은 끔찍하리만큼 덥고 길어 진이 빠졌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고 미뤄두고 있었는데 핑곗김에 이북으로 새로 구매한 뒤 한달음에 읽어내려갔다. 확실히 소설은 접근성이 좋다는 면에서 전자책이 더 낫구나. 꼭 ‘더울 때’ 읽어야만 한다는 규칙(?)이 있어 슬슬 식는 것 같은 날씨에 아아 늦었다 싶었건만 날씨가 다시 체감 30도를 웃돈다.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들이 도착했다는 알림을 받고 집 안에 들여놓을 겸 점심시간에 잠시 집에 들렀다 오는 길에 문득 마사코의 어디로든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 정리해고를 당한 이후, 부쩍 건조해진 마음으로 필요 없는 감정은 가지치기하며 살아온 마사코를 몇 년 전의 나는 어쩐지 동경하면서도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는 인물로 생각했던 듯하다. 나도 조금은 성장한 걸까. 역시 여름은 사람을 너무 지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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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30 08: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상으로 재생하듯 상상하며 읽기, 저도 그렇습니다! 영어 일본어로 읽고 매년 반복 읽으신다니 그 매력이 궁금해지네요.

적막 2021-09-30 08:42   좋아요 2 | URL
>.< 독서괭님도 디테일하게 상상하며 읽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기리노 나쓰오 소설은 항상 결말부분이 좀 아쉽긴 해요. 그치만 소재가 소재이니만큼 전개가 상당히 흡입력 있기도 하고, 특유의 음습하고 집요한 심리 묘사와 그린 듯이 와닿는 설명이 연상케 하는 특유의 어둡고 끈적한 분위기가 있어서 참 좋아해요 ㅎㅎ 다른 분들의 후기에도 <그로테스크>와 <아웃>이 주로 언급되더라구요 기회가 닿으면 한번쯤은 가볍게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