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왕의 반지 - 그레이트북스 2
콘라트 로렌츠 / 문장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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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우리 또래는 몇 가지 책을 자주 권유받았다.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의 위인전과, 파브르 곤충기, 시튼 동물기는 그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책들이었다.

그런데 종종 함께 거론되던 파브르의 곤충기와 시튼의 동물기는 내게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개인적 성향 탓에 시튼의 시각이 거슬린 탓도 있었겠지만, 파브르의 곤충기는 엄연히 객관적이고 대단한 노고를 요구하는 '관찰기록'이고, 시튼의 글은 기록이 아니라 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사람들이 흔히 동물이나 원시인에 대해 투영하는 감상적인 시각을 답습한 미담일 뿐이라고까지 여겼었다.

그런 면에서 콘라드 로렌츠의 수필집, '솔로몬왕의 반지'는 파브르의 곤충기에 비교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 즐거움과 경이로움을 갖고 읽을 수 있고, 재치있는 문장과 생각지 못한 사건들 너머에서 깊이있는 애정, 동물에 대해서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 가진 저자의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노벨상을 받은 바 있는 생물학자인 저자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일상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을 무너뜨린다.

저자는 '솔로몬왕의 반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솔로몬 왕은 짐승과 새와 물고기와 벌레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나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다. ...(중략)...모든 동물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나는 솔로몬 왕보다 못하지만 그처럼 마법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그보다 낫다.
...(중략)...나 개인으로서는 동물과 사귀는 데에 마법의 반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어쨌든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살아있는 존재는 마술이나 요술 없이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즉 진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의 애정, 그의 해박함과 재치, 그리고 그 참을성에 경의를 표하며 내가 어릴 적 느꼈던 그 경이로움에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 특히 요새 너무나 많은 숙제와 입시의 무게에 찌들어있는 후배들에게, 어린시절에 읽어야 할 책이란 바로 이런 것, 참고서 100권보다 나은 양식이라 말해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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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세계제국 - 아시아총서 제7권
임대희 / 신서원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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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하면 떠오르는 것. 초원, 유목민, 그리고 칭기즈칸. 사람들은 몽고제국이 엄청난 규모였다는 것, 서구인들에게 아직도 최대의 악몽으로 기억될 만큼 대단한 정복자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도 그들의 침략을 받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작 몽고가 어느 정도의 제국이었는지, 어떤 식으로 그 제국이 이루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막연히 대단했나보다고 생각하거나, 중국과 고려를 침공한 야만적이고 파렴치한 나쁜 놈들로 생각할 뿐.

몽골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든 얼마 안되는 유목민족들이 이룬 제국은 유사 이래 가장 넓은 -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 이상의 제국은 생기기 힘들 것이다 - 땅을 정복했다. 오랜 세월동안 실개천이나 다름없는 정도의 교류만을 지속해오던 동서양에 단숨에 엄청난 물꼬를 터, 양쪽 세계 모두에 변혁을 일으킨 것 또한 몽골이다. 이른바 근대 세계를 이루는 많은 나라들이, 몽고가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거나 적어도 그들이 존재했던 방식으로 존재하지 못했을 세력들이다.

후대의 사가들 - 특히 중국 - 은 몽골에 대해 많은 것들을,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하고 때로는 왜곡하거나 무시했다. 정주민 - 농경민족의 잣대로 유목민족을 평가하는 것은 언제나 왜곡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유목인들에게 있어 땅이나 성, 소유는 농경민들과 다른 의미를 지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상 진짜 세계 제국이라 할만한 판도를 휩쓴 정복자는 많지 않다. 그 중에서도 유독 몽고의 영향은 크고 길었다. 저자는 그 이유, 단순히 정복과 파괴가 아니라 몽골이 진짜 '세계 제국'으로 여러 민족과 나라를 아우를 수 있었던 이유에 주목하고 있다. 종교적 관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들. 중국에서도 몽고 지배하의 원나라에서 뛰어난 서민 문화가 꽃피었음을 상기해 보라. 이 책은 그런 모든 면을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몽골 제국의 '세계성'을 이해할 수 있게 쓰여 있다. 이 책만으로 몽골에 대해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입문서나 참고용으로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인이 쓰는 역사교양서에는 다 비슷한 분위기가 실리는 건가 생각했었다. 로마와 이탈리아사를 쉽고 재미있고 자기 취향에 맞게(!) 재구성하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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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 창비신서 143
노마 필드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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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다면 감동받을 만한 책.

1988년은 나를 비롯한 대다수 한국인에게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해로만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 해, 수많은 아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전쟁의 시작을 선언하고 또 그 종결을 선언했던 천황 히로히또가 죽음의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그는 '빛나는 평화'라는 모순적인 시호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전후에 이루어낸 풍요 이면에 숨어있는 희생자에 대해서도 입을 다문 채. 일본의 여론은 천황의 죽음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전후 40년의 번영은 강하게 부각시키면서 전쟁 그 자체는 간주곡처럼 어물쩍하게 처리'하는 데 주력했고 대다수 일본인이 그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어떤 이들에게 천황의 죽음을 앞두고 조성된 사회 분위기는 그때까지 망각 속에 묻어두려 했던 문제들을 환기시키고 생각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저항의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모습은 힘겨웠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오끼나와에서 개최된 체육대회에서 일장기를 끌어내려 불태운 슈퍼마켓 주인, 남편의 위패를 호국 신사에 봉헌한 일 -즉 남편의 죽음을 국가가 이용한 일에 대해 항의하여 15년간 재판을 한 야마구찌의 한 주부, 그리고 공식석상에서 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고 발언한 나가사끼의 시장. 저자는 '그들의 삶이 현재와의 연관성 속에서 역사적 책임을 지는 인간의 능력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세 사람의 행동은 모두 "천황", 그 이름이 상징하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연결된다. 일본의 천황이라는 존재가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 권위의 응집이며, 복종의 대상으로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쟁 이전에는 군국주의의 모습으로, 그리고 전후 4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자본주의와 근대화의 모습으로 일본인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언론이 만들어낸 추모의 분위기에서 어느 때보다도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며, 그야말로 "죽음 직전의 군주에게 욕된 언사를 퍼붓"는다는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이들 세 사람이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천황의 죽음을 앞두고 고조된 긴장과 억압의 분위기 덕분일지도 모른다. 이들 세 사람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는가를 따지거나 전적으로 동조할 필요는 없다. 이들의 행동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수많은 욕설과 죽음의 협박, 말도 안되는 비난과 또 한편으로는 나름대로 진지한 성찰 안에서 나온 비판, 그리고 격려의 편지와 지지가 이어졌다. 지지와 격려는 이들의 주장 자체에만 호응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 자체가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 외면했던 일들을 생각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역사와 인간의 관계, 역사를 책임지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언제나 과거와 연결되는 것. 현재 안의 과거, 삶 속의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망각케 하는 '현대의 풍요'에 대해 저항과 성찰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저항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소수, 약자, 차별받는 자들을 억누르는 권력의 문제, 은폐되어 있고 스스로도 깨닫고 싶어하지 않는 부당함의 문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일본이라는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종종 일본의 왜곡된 역사와 막혀 있는 언로, 민주적이라 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를 비웃는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우리 사회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과연 그들을 비웃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천황은 없다. 그러나 어중간한 보수 우익 외의 정당이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상대주의 관점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압박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는 요미딴촌 촌장의 말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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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대변인 1 - 엔더 위긴 시리즈 2 엔더 위긴 시리즈 2
올슨 스콧 카드 지음, 장미란 옮김 / 시공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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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외계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적어도 이제까지는 확실히 그렇다. 인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자들을 모두 외계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에게 적대적이 되기 쉽다. 고작해야 200년 전에, 인류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사냥한 다음 단 하나 남은 생존자가 죽은 후 박제하여 박물관에 전시했었다. 그것이 인류란 족속이다. 백인에게는 흑인이 인간이 아니었으며, 중국인에게는 북방민족이 인간이 아니었고, 중세 기독교인에게는 이슬람교도들이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이제 타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답은 여전히 No!이며...종교학이니 인류학이니 하는 학문은 모두 그 문제를 붙안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바로 그 딜레마, '타자와 나'라는 문제를 이 소설만큼 열심히, 훌륭히 풀어내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특히나 피기들에게 문명을 전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갈등은, 현대 인류학자들이 안고 있는 딜레마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찍기 위해 집안에 있던 TV를 치우고 일부러 전통복을 갖춰입는 오지인들, 다른 일은 다 팽개치고 관광객과 인류학자들에게 자신들을 보여주고 사진을 찍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는 원주민들. 그것이 지금의 현주소이며, 결국 문화는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건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조금 어려운 방향으로 흘렀는데 ^^;; 여하튼 그 복잡한 구성 속에서 하나씩 풀려가는 수수께끼와, 진실을 쫓아가는 지적 즐거움 외에도 나를 더욱 감탄시킨 것은 저자가 인간, 인류, 혹은 우리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에 대해서 날카롭게 통찰하고 소설 안에서 그로 인한 실수와 어리석음을 말하면서도 그 어조 속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웃기는 쉽지만 감싸안으며 질타하기란 힘든 일. 그것도 나같이 마이너스 자장이 강한 사람에게서도 조소를 사지 않을 정도니까, 이건 진짜라고 생각한다. ^^;;

전작, <엔더의 게임>은 엔더가 '사자의 대변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훨씬 모험소설다운 그릇에 담아내고 있었다. 조금 더 가벼운 테마인 대신 숨돌릴 틈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에 비해 후속편인 (혹은 완성편인) 이 작품은 훨씬 무겁다. 그러나 전작과 비교해서 어느쪽이 낫다는 우열을 가린다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각자의 가치가 있으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가능한 한 시야를 넓히려 한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미국'의 '백인' '남자'임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누가 자기 자신을 완전히 지울 수 있겠는가.

이 책은 SF작가 뿐 아니라 SF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것이라 생각하며, 실제로 그랬다. <엔더의 게임>부터 읽는 편이 좋겠지만 그냥 읽어도 좋을 듯. 정신없는 몇 시간의 여행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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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월드 그리폰 북스 11
제임스 발라드 지음, 김진경 옮김 / 시공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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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이면 기괴한 모양을 한 새들이 석화(石化)된 숲속을 날아다니고, 결정화한 강기슭에는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악어들이 문장(紋章)속의 샐러먼더(Salamander)처럼 반짝였다. 밤이 되면 반짝이는 인간이 나무들 사이를 뛰어다닌다. 그 팔은 황금의 수레바퀴, 그 머리는 유령의 왕관 같았다......>

크리스탈 월드라는 소설의 첫머리를 펴보고 내가 호감을 느낀 것은 바로 윗 문장, 제목 앞에 발췌되어 있는 이 부분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내용에는 어딘가 기괴한 끌림 같은 것이 있었다. 고대 도시의 폐허, 관광객들이 바글거리지 않는 폐허가 가진 아름다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크리스탈 월드가 가진 아름다움도 그와 비슷하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어찌 보면 별 것 없는 내용이지만, 보는 내내 숨을 죽이고, 떨리는 마음으로 읽어야 했으며, 책을 덮은 후에도 작가의 필치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광기 같은 것을 몰아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책. 제임스 발라드라는 작가는 아무리 봐도 사이코임에 틀림없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그 누구보다도 '현대'의, 현대인과 그 문명의 반영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단, 헐리우드 액션 영화만 보는 사람들은 읽지 말 것. 이게 뭐냐며 화를 낼 가능성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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