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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사전 - 여성판
밀로라드 파비치 / 랜덤하우스코리아 / 1998년 12월
평점 :
절판


우선 책 뒷면에 적힌 소개글 중 워싱턴 포스트지를 인용하며 시작하는 진부함을 용서하기 바란다.

[ 움베르토 에코 혹은 보르헤스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경우처럼, 이 소설의 작가는 뛰어난 인물의 창조와 묘사, 치밀하고 황홀한 일화의 배치로 텍스트의 환상적 구조를 지탱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

소개글이란 대개 가능한 한 많은 장점과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독자의 눈을 끌어당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 이 소설은 구성면에서나 소재면에서나 서술방식에서나 모두 매우 독특하며 에코, 보르헤스, 마르케스에 비교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음은 분명하다. 굳이 위에 적힌 소개글을 인용한 것은 사실 마지막 언급, '환상적 구조'라는 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어떤 환상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들 중에서도 내용만이 아니라 구성까지 환상적으로 할 수 있는 작가는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내용면부터 보자. 이 소설은 7-10세기 무렵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부 지역에 실존했던 카자르 민족, 카자르 제국의 운명에 대한 미스터리 물이다. 카자르 민족은 11세기 무렵, 바람처럼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으며 그들이 8-9세기 무렵 단행한 개종이 멸망의 한 이유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중 어느 쪽으로 개종했는지...그것을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작가는 그 사건 - '카자르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세 가지 시간대에 걸친 미스테리를, 세 가지 관점으로 짜내고 있다. 세 가지 관점이란 즉, 책 전체를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시각에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사전 형식으로 쓰고 있다는 말이다. 한 항목에 대해 세 부분은 모두 각기 다른 말을 하며, 어떤 항목이나 다른 종교의 서술부분과 얽혀 있다.

그러니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을 수도, 아무 단어나 펼친 다음 그 단어와 연결되는 단어들을 찾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읽든 끝까지 다 읽고 나면, 3중으로 얽혀있던 수수께끼가 하나로 모이며 풀어지게 된다. 내용면에서도 이 소설은 더할 나위없이 환상적이다. 꿈 사냥꾼, 죽지 않는 저주를 받은 왕녀, 1000년의 시간을 넘어서 연결되는 관계들, 서로의 현실을 꿈으로 꾸는 연결된 두 사람, 악마, 시, 사랑... 그리스 정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신화와 상징과 전설들...^^

글자 빽빽한 책도 잘 읽는 사람들. 다소 머리아픈 미스테리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만 덧붙이자면, 작가가 원래 시인인 관계로 복잡한 은유가 많아서 그런지 빨리 읽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일단 미스테리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책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디에서 시작했건 책을 끝까지 읽었을 때, 어떤 추리소설보다 강한 지적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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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군대의 장군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유정희 옮김 / 문학세계사 / 1994년 10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무심결에 지나쳐보던 일간지의 문학리뷰 코너였던가. 그야말로 격찬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글을 보고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이, 서점에서 발견하고는 집어들어 계산대에 가져가는 결과를 낳았고, 그 구매는 이제까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이스마일 카다레를 거론하게끔 만들었다.

이스마일 카다레 - 요 몇년사이, 그의 프랑스어 저작들이 여러 권 번역 출간되면서 새삼 '거장'이라는 칭호가 익숙하게 따라다니게 된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최근작들을 읽으면서, 그 빼어남에는 반복해서 감탄할지라도 처음 그를 접했을 때와 같은 전율은 느끼지 못하겠다.

그의 처녀작인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지구 어느 한구석에 자리한 지도 몰랐던 알바니아라는 나라에 이런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우선 전율해야 했다. 빼어난 (이런 진부한 칭찬밖에 동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자란 어휘력에 한탄을.) 문장력, 유장하게 흘러내리는 문맥, 무엇보다도 잔혹하고 황량하면서도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알바니아의, 어쩌면 더 나아가 세상 전체에 대한 조망... 주제넘지만 카다레의 다른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보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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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찰스 펠리그리노 지음, 형선호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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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세 번 인간을 중심에서 밀어냈다. 첫번째,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이상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두번째, 다윈의 진화설이 나왔을 때.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변했다. 세번째, 프로이드가 '무의식'의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때, 인간의 이성은 동물과 다른 특별함을 부여한다는 믿음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며, 지구에서 가장 발달한 생명체, 진화의 정점,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환경론의 논리는 아직까지도,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지 말고 보호해야 한다 - 는 인간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환경론자들은 전체 생태계의 조화에 있어서 다른 생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더스트>의 작가 찰스 펠리그리노는 그것마저도 깨버리려고 덤벼든다. 작가 후기의 첫머리를, 그는 이 말로 장식한다. '지구의 3분의 1만이 육지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생물의 4분의 3이 곤충이며, 그 중 3분의 1이 풍뎅이이다. 그래서 나는 신이 풍뎅이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멸종해 버린다 해도 지구에는 아무 탈도 없으며, 생태계는 오히려 전보다 더 번성할 수 있다. 그러나 곤충이 없어진다면? 생태계는 완전히 파괴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곤충이 사라져 버렸다면,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더스트>의 전체 줄거리는 이런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저자는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오싹한 출발점 -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진드기 떼와 흡혈 박쥐의 습격, 갑작스러운 변동, 순식간에 다가오는 파국 - 부터 그 와중에서 혼란에 싸여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박진감있게 그려가고 있으며 그 속에 현대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설과 의문들을 녹여내고 있다.

사실,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이론과 가설의 숫자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복제 기술이나 호박에서 곤충 유전자를 알아내는 방법(이 기술은 쥬라기 공원에서 나왔지만 본래 아이디어는 저자의 것이다)은 물론이고 외계에 생명체가 있는가, 공룡은 왜 멸종했는가, 광우병의 메카니즘, 박쥐와 곤충의 역할, 이기적 유전자, 생물학적 시한폭탄에 이르기까지... 충격적인 시작과 숨돌릴 틈없이 위기, 위기로 이어지는 스릴러 식의 진행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대중소설에 더 가깝지만, 풍부하고 정확한 과학 지식과 상상력, 그리고 그 뒤에서 던지는 의문은 SF라고도 할 만하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저자는 자신 또한 인간임을 드러내 보일 수밖에 없다. 신 - 혹은 자연 - 혹은 지구는 아무것도 답해주지 않지만, 우리는 전진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더스트'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기독교의 교리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것. ^^

의심할 여지없이 주인공이 저자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재미있다는 기분이 되었지만(아무래도 억울한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저자는. 대개의 학계에서 이단으로 꼽히는 학자들이 그렇듯), 확실히 현대 과학은 전체적인 조망을 필요로 한다. 새로운 가설은 그것이 아무리 혁신적이라 해도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지금 우리의 현실에 경종을 울리며.

별을 다섯개 줄 수 없었던 것은, 너무 많은 사실을 녹여내려 한 탓인지 깊이가 부족하다는 인상 탓.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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