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시피씨의 결혼 서문문고 178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지음 / 서문당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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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곡을 좋아하지 않는다.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때로는 불가사의하게 여겨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묘사도 하나 없이 대사만으로 이어지는 상황과, 인물들간의 팽팽한 긴장감 - 종종 이해할 수 없는 - 과 재치,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정되어 있는 무대. 대체 뭐가 재미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희곡이란 따분한 장르다. 그것이 내 믿음이었기에, 이 책을 추천받고 또 선물받아서 읽으면서도 마음은 내키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이렇게 통쾌하고 재치있을 수가! 빠른 사건 전개와 뒤통수를 후려치는 반전, 그리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통렬한 비판은 그야말로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케 했다. 특히 이 책 표제작인 '미시시피씨의 결혼'보다도 뒤에 있는 '로물루스 대제'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무릎을 쳤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로물루스는 로마가 게르만인의 손에 함락되기 직전에 닭이나 치며 무심히 살고 있는 마지막 황제로 나오는데,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태도와 대사들이 중요하다.

감탄한 대사들 중 일부를 적어보고 싶지만,진정한 묘미는 앞뒤 정황을 함께 읽어야만 와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하겠다. 짧고 가벼워 지하철에서 읽기 좋다는 장점도 있으니 읽어보시길. (...이러니 꼭 책장사 같군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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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기질 - 이화문고 50
마가렛 미드 지음, 조한혜정 옮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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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이라는 생소한 이름. 재미없어보이는 제목. 학술서일 게 분명하다 싶은 책표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독서가들조차도 이 책의 제목을 들은 적이 없거나 보았어도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겉모습에 속지 말라. 이 책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추천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이다. 무엇때문에 고전이냐고? 물론 인간의 본성에 대한 뛰어난 고찰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세 부족사회에서의 성과 문화'라는 재미없는 제목의 의미는 단순하다. 그대로 읽으면 된다. 이 책은 고립되어 살아온 인접한 세 부족에 대한 민족지 기록이다. 그런데 세 부족사회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참으로 우리와 '다르다'. (사실 현대 인류학은 그렇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인류학이라고 하면 신기한 원시부족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감안한 말이다) 분명 7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부족들도 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통을 잃고 혼란을 겪었겠지만, 이렇게 다른 문화, 이렇게 다른 가치관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가치는 있다.

세 가지 사회의 특성을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다른 인류학의 명저 '문화의 패턴'(루스 베네딕트)와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관점은 약간 다르다. 베네딕트와는 달리 미드는 성차라고 하는 문제에 주목한다. 그녀는 미국 사회의 엄격한 성격 구분, 즉 남성은 진취적이고 공격적이며 독립적이고, 여성은 모성적이고 의존적이며 수동적이라는 규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남녀 모두 온화하고 수동적이며 다정다감한 것이 이상적인 아라페쉬 사회, 남녀 모두 공격적이고 거칠며 과격한 것이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먼더거머 사회, 끝으로 미국의 성역할 구분을 뒤집어놓은 듯 여성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챔불리 사회가 그것이다.

이들 세 사회의 생활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로움을 불러 일으키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들의 모습을 통해 미드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성차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길러지는 것이라는 이 책의 기술은, 여성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들어보았을 법한 이야기이다. 물론 실제 책을 읽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가 규정해버린 '이상적인 사람', '이상적인 여성', '이상적인 남성'이라는 개념들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항상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이상에 맞지 않는 기질을 타고 났기에 고통받는다. 그 점을 아는 것, 더 나아가 그 사실을 알고 개개인이 규정된 이상을 향해 억지로 끼워맞춰지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진정으로 '진보한' 사회일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여자다운 여자, 남자다운 남자를 강요받음으로써 고통받은 기억이 전혀 없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문화를 만드는 것은 사람인데도 그 문화의 틀에 갇혀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이란 얼마나 안타까운 것인가.

이 책에 결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한바탕 감탄을 늘어놓은 주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는 점, 이해하기 쉽게 쓰여있다는 점 등이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일 것이다. 진심으로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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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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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라는 말은 어째서인지 밤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모든 그로테스크한 것, 환상적인 것, 신비스러운 것, 꿈과 같은 것들은 태양이 내리쬐는 낮보다는 밤에 더 어울리듯이 평야와 인간의 도시보다는 숲 속에 더 어울리는 것이다. 아직 인간의 침범을 받지 않은 곳, 오래 전부터 인간의 영역 밖에 남아있었던 곳. 그것이 아직까지도 숲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느낌이 아닌가.

그리고 이 소설 속의 숲은 그런 이미지를 한껏 응축시키고 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손상되지 않은 숲. 침입자를 물리치고 끝없이 이어지는 깊고 어두운 내면을 간직한 숲. 그 숲속에서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모든 환상이 실체를 갖추고 튀어나온다.

수수께끼같은 발단에서부터 소설을 읽어나가며 나는 태양빛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어두운 숲 속 오솔길을 걸어들어가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저 안에 뭔가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게 있다는 느낌. 신화적인 비극을 예감케 하는 글의 전개는 그런 불안감과 매혹을 불러 일으킨다. 환상문학, 혹은 SF라는 장르에 속해 있으면서도 장르와 무관한 독자들에게도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진정 궁금한 것은 이 책의 속편이 나올 날이 있을까 하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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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전쟁사 까치글방 199
존 키건 지음, 유병진 옮김 / 까치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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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TV 드라마 중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드라마 '왕건'의 인기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 개인적으로 왕건을 좋아하는 시청자 중 한 사람의 자격으로 말하자면 역시 그 큰 스케일과 전국시대라고 하는 배경, 전술과 전략이 얽혀드는 호쾌함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가슴 두근거리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전쟁사와 그 에피소드들에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아마 전쟁터라고 하는 상황이 극단적인 드라마를 연출하고 인간성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 매력이 전쟁의 참혹함과 비참함이라는 뒷면을 간과하게 만들어서는 곤란하다. 제아무리 화려하게 그려진 전쟁이라도, 그 속에서 죽고 다치고 무너져간 사람들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화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면에서 더더욱, 전쟁을 다각도에서 파악해 보려는 움직임에는 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을 빼놓을 수가 없는 이상에는.

전쟁이란 인류의 필요악이며, 천적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또 인간은 - 특히 남자들은 천성적으로 폭력성을 가지고 있어, 일정 숫자 이상에 도달하면 전쟁을 하게 되어있다고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이란 정치의 연장선상이며, 지금과 같이 전국민을 동원한 전면전이 이상적인 전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중세 이탈리아처럼 용병집단을 고용하여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의 피해만으로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사람도 있다...그만큼 전쟁은 인류사에서 빠진 적이 없음에도 그 정체는 모호하기만 한 것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우리'는 대체 왜 전쟁을 할까? 그 질문은 다음 대전에서는 전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음이 명백해진 지금,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 책이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전쟁사를 단순히 전술사나 전사(戰史)로써가 아니라 전쟁문화사로, 사회와 문화, 역사의 맥락 속에서 보여주려 한 시도는 재미있을 뿐 아니라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뭐 거창하게 말했지만 순수하게 전쟁사라고 하는 흥미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만으로도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석기, 동물, 철기, 화기 등으로 장을 나누고 보론으로 요새화, 군대, 병참과 보급 등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정리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도 충분하다. 덧붙이자면 저자 존 키건 교수는 최근 M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전쟁과 문명'(이 제목이 맞길 기도한다)에 조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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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 칼비노 선집 3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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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전쟁터. 수많은 기사들 사이에 반짝이는 백색 갑옷을 입은 (아니 갑옷으로서만 존재하는) 아질울포라는 기사가 있다. 그는 실체가 없는 인물이다. 때마침 신참내기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는 혈기에 불타는 젊은 기사가 도착한다. 그는 아질울포에게서 안정감을 느낀다. 전쟁터에는 강력한 여자 기사가 한 명 있다. 그녀는 아질울포를 사랑한다. 젊은 기사는 그녀를 사랑한다.

아질울포가 기사 서임을 받은 것은 어느 귀족 여인의 순결을 지켜준 일인데, 그녀가 순결하지 않았다는 고변이 들어온다. 아질울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는 이 말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전쟁터를 떠난다. 그는 자신의 거울상인 종자 - 실체가 있으나 존재를 모르는 - 를 달고 떠난다. 그 뒤를 여기사가 뒤따른다. 그 뒤를 젊은 기사가 따른다.

모험은 '아더 왕 이야기'에 나올 법한 패턴대로 따라가지만 기묘하게 뒤틀려 있고, 마침내 사건은 뜻밖의 오해로 종결을 맺는다. 아질울포가 존재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그게 끝이냐고? 아니다. 시종일관 이야기를 서술하던 정체모를 수녀가 아직 남아있다. 그녀는 소설 끝에서야 정체를 밝히고, 수녀복을 집어던지고 뛰쳐나간다. 그녀가 바로 여기사였다.

조금은 침침하게 뒤틀린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이 소설에서 사실 줄거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모든 사건의 중심에 놓인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있다. 이 말 자체가 대단한 역설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아질울포는, 투명인간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갑옷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일들을 신경쓰고, 실제로는 아무도 챙기지 않는 기사도를 곧이 곧대로 행하는 미덕의 화신이며, 놀라울 정도로 여성에게 친절하고도 헌신적이며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 기사 중의 기사다. 당연히 그런 인물이 존재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의 특수성 -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 을 접어두고 보면 이거야말로 영웅소설에 나오는 이상적인 기사상이 아닌가? 내가 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거기에 있었다.

아질울포의 '비존재성', 그러니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성격은 현실적인 인물들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그는 갑옷 마디를 철컥이며 환상적인 전쟁터 위를 걸어다닌다. 그 전쟁터에는 고딕소설에서 나올 법한 사건과 인물, 사랑과 우정이 있지만 그 모두가 기묘하게 뒤틀려 있다. 어떤 것도 그리 진지하지 않으며, 누구도 아질울포만큼 신념에 충실하지 않다.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것도 한 가지 재미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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