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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의 봄
강경애 지음 / 다봄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을 꼼꼼히 읽으며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을 골랐다.
- 밑줄
p. 10
대중은 중하요, 현실은 판로라 하였으나 이와 반대로 대중은 ‘힘’이요 현실은 ‘길’이라 하고 싶다. 우주에 상하가 없는 것같이 문명과 야만도 상하 분별이 없을 것이니 반드시 문명을 산봉우리로, 야만을 산기슭으로 비유할 것도 아니다. 대중의 힘은 그때그때 현실의 길을 문명, 야만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하는 대로 쉴 새없이 몰아 나갈 것이니 여기 있어서 즉 핸들이 필요할 것이며 또 핸들을 잡는 영적 동물을 요구할 것이다.
p. 42
나는 언제나 글을 쓰게 되면 맨 먼저 남편에게 보입니다. 그는 한참이나 말없이 묵묵히 읽어본 후에 나에게로 돌리며 다시 한번 크게 읽어보기를 청합니다. 나는 웬일인지 그 순간만은 가슴이 떨떨해지며 남편이 몹시도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울울한 가슴으로 읽어 내려가다는 남편이 어느 구에 불만을 품게 되었는지를 곧 발견하고 즉석에서 다시 펜을 잡아 고치는 것입니다. 다 고친 후에 나는 크게 읽으면서 그의 눈치를 살피면 그는 만족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이번에는 좀 나아진 듯하오!”
이 말을 듣는 나는 어찌나 기쁜지 그만 가슴이 뛰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거의 늘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없어 혼자 쓰게 될 때에는 이보다 더 갑갑하고 안타까운 때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세 번 읽어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쓴 채로 내버려 두거나 하게 됩니다.
* 생각하고 싶은 부분: 글을 쓰고 나서 소리 내어 읽는지, 가장 먼저 읽어주는 이가 있는지, 어떤 독자가 내 글을 읽길 기대하며 서평을 쓰는가? 출판 번역가(사실 밝히고 싶진 않지만 여기에 이렇게 써야 숨지 않을 것만 같아서 ^^;;;)를 꿈꾸는 내게는 번역 스터디를 같이 하는 두 명의 벗이 있다. 그분들은 나보다 번역 실력도 훨씬 뛰어날뿐더러 인품과 태도 등 배우고 싶은 점이 많은 분들이다. 그들은 나의 서툰 번역을 가장 먼저, 나보다 더 꼼꼼하게 읽는다. 정말 소중하다. 이 페이지를 읽으며 스터디원이 떠올라 뭉클했다. 내 글을 읽어주는 이가 있으니 나만 글을 잘 쓰면 된다. 바쁘다는 핑계로 후다닥 번역 연습을 한 후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이제 소리 내어 읽어야겠다. 강경애 작가처럼 남편은 없지만 내 글을 읽어 주는 이들이 있음에 더욱 조심조심 퇴고하며 번역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p. 44
눈이 아물아물하도록 펴나간 저 푸른 벌! 그 속으로 반듯반듯 빛나는 작은 시내며 이 산모퉁이 저 산모퉁이 끝에 다정스레 붙어 앉은 농가들, 그리고 들을 건너 깃을 찾는 새무리들은 푸른 하늘가에 높이 떴습니다. 그 날개까지도 파랗게 보이죠. 낮이 저들에게 있어서 엄한 아버지라면 밤은 저들에게 자애스러운 어머니일 것입니다. 그 평화스러운 품 안에 안기어 차츰차츰 잠들어가는 저 푸른 벌, 누가 감히 저들의 고운 꿈을 깨칠 수 있으랴.
p. 50
붓을 들고 쓰지 못하는 이 가슴! 입이 있고도 말 못하는 이 마음! 저 달 보고나 호소해볼까. 그러나 차디찬 저 달은 이 인간사회의 애달픈 이 정황에 구애되지 않고 구름 속으로 또 구름 속으로 흘러간다.
대자연은 크게 움직이고 있다.
p. 56
내 손끝은 물에서 헤엄질 칩니다. 빨래는 희어집니다. 헹구면 헹굴수록 희어지는 이 빨래, 새 옷을 입을 때의 쾌감보다도, 때 묻어버릴 것같이 알았던 이 빨래가 눈이 시어지도록 희어지는 쾌감이야말로 빨래하는 이가 아니고서는 상상도 못 할 것입니다. 무심히 보니 내 손끝은 파란 물결 속에서 붉게 타오릅니다. 나는 손을 번쩍 들며 ‘봄이다!’ 하고 중얼거렸나이다.
pp. 98-99
나는 약수터에 가서 약수를 한 컵 쭉 들여 마시고 나니 심신이 아울러 날아갈 듯한 가벼움에 쌓여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벅찬 가슴을 붙안고 약수터를 벗어나 천천히 걷기로 하였다. 쳐다보니 앞산이 하늘에 닿았고, 그 산을 덮어 떡갈나무, 참나무, 오리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밤나무, 소나무 등이 그 자리를 다투었고, 그 사이를 안개가 벌레처럼 날아다닌다.
…
길가 이름 모를 긴 풀잎에 이슬이 산딸기처럼 무르익었고 어깨위를 어루만지는 나뭇잎에서 생선 비린내가 후끈거린다. 냇물은 귀밑에서 돌돌거린다. 아니 발아래서 사물거린다. 그 소곤거리는 소리에 입김이 섞여 있는 듯, 휘끈 돌아보게 된다. 척척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헤치고 푸른 바위 밑을 돌아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돌돌 굴러내린다. 아침이라 맑음을 더해서 푸른 리본을 달고 나팔거린다. 우악스레 큰 놈, 얄밉게 도드라진 놈, 미욱스레 한가운데 떡 버티고 선 놈, 이러한 바위돌들을 얼리고 달래면서 언제나 그 눈썹에 겸손한 웃음을 띠고 흘러내린다.
원컨댄, 세속에 티 묻은 이 몸과 맘을 저 샘물에 씻어버리고저. 나는 가만히 앉아 물을 쥐어본다. 다정하면서도 차디차다. 손끝을 베어갈 듯한 매움이 들어 있다. 그 속에 산내음새 오이내같아……
* 생각하고 싶은 부분: 자연이 선사하는 감각적인 기쁨을 느낀 적이 언제였고 자연으로부터 위로받은 경험이 있는가? 나는 걷는 게 너무 싫었다. 당연히 운동은 할 리가 없었지. 800미터 거리의 빵집을 갈 때도 차를 끌고 가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작년에 허리 디스크 파열로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 없어서 날씨가 따뜻할 때 한 시간 이상씩 걸었던 적이 있었다. 청계천과 동네 뒷산을 걸으며 두 눈에 푸르른 나무와 들꽃을 담았는데 그 느낌이 퍽 신선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나는 일만 미친 듯이 하며 일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 빵을 흡입하며 고칼로리 음료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그래야 전투적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나 보다. 작년에 아프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자연의 소중함을 걷기를 하며 이렇게나마 발견했다. 왜가리가 작은 천에 살고 있다는 것도 놀랍고, 왜가리를 소재로 독서모임 친구와 한 시간 이상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눈 경험도 참 신기하다. 요새 한참 걷지 않았는데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면서 잠시나마 이런저런 생각에 푹 빠지고 싶다.
강경애는 1906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그 시대에 드물게 하층민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작가로 여러 작품을 집필했으며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을 역임했다. <인간 문제>는 발표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독서 모임의 첫 책인 <간도의 봄>을 읽는 중 첫 글에서부터 대쪽같은 면모가 드러난다. 자신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자신감이라는 게 약 100년 전에, 더욱이 하층민 여성의 입장에서 쉽지는 않았을 텐데 참 멋있다. 또, 여성의 독서 장려를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음을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현실적으로 자신의 유년 시절부터 결혼한 이후의 삶을 서술하는 데 잠시 멈춰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많았다.
산문집으로 이루어진 <간도의 봄>의 짧은 글을 하나씩 읽으며 독서 편식을 했던 내가 몰랐던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결심을 굳혔기에 참 소중하다. 나는 오래도록 영미 소설 위주만 읽었던 것 같다. 강경애 작가의 작품을 더 읽고 싶다는 마음에 설렌다.
한 달 여전, 이 책을 구입한 후 거실 탁자위에 툭 올려놓고 책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다. 하지만 책은 다른 누군가에게 가서 관심을 받았다.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엄마가 이 책을 다 읽었다는 게 아닌가. 엄마는 책을 잘 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다. 한 대가 아니라 두 대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엄마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었다고 가끔 이야기했는데 내가 그걸 마음대로 무시했던 것 같다. 엄마는 어릴 적 고향과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 이 책을 나보다 더 먼저 읽은 엄마의 이야기가 다르게 다가온다. 경외심까지 든다. 문득 엄마와 독서 모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런저런 독서모임에서 활동 중이지만 가끔 혼자만 떠들어대는 모임원때문에 피로감을 느낀 적이 많다. 그런데 우린 가족에겐 에너지를 쏟지 않는다. 그렇게 타인에겐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고개도 끄덕여가며 열심히 맞장구치는 나를 조금만이라도 엄마 쪽으로 끌고 와야겠다. 강경애 작가의 책 <소금>도 얼른 구해와 엄마와 읽어야겠다. 또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거다. 안 하던 걸 하려니 솔직히 벌써부터 걱정이 앞서지만 나중에 분명 하길 잘했다고 생각할 듯하다.
뭐든지 처음은 남다른 의미가 있지 않나.
나는 이 책을 여러 면에서 잊지 못할 거다.
독서 편식에 대해서도,
엄마와의 독서 모임도,
내가 바라보는 엄마의 삶에 대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