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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지키는 아이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김정화 옮김 / 꿈꾸다 / 2023년 1월
평점 :
어린이들에게 인기 있는 책인 <전천당>의 작가 히로시마 레이코가 돌아왔다. 조카들도 사달라고 말했었고 영어 수업을 위해 어린 학생들 집에 방문하면 책장에 여러 권 줄지어있던 <전천당> 시리즈를 많이 봤던 터라 이미 익숙한 작가의 이름이었다. 이번에 청소년 독자에서 성인 독자까지 아우를 수 있는 인간 욕망에 관한 판타지를 선보인다고 해서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졌다.
표지에서 감도는 느낌은 섬뜩하고 뭔가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어졌다.
간략 줄거리
치요라는 아이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저택을 들어가는 중이다. 치요는 본채와 여러 채의 곳간 및 별채를 이어주는 정원수까지 아름다운 이런 저택엔 천황님은 살지 않을까 감탄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만나는 이들의 시선은 서늘하다. 병약한 어미를 대신해 밥도 짓고 옷도 고치며 살아온 치요는 여기에 일하러 왔다. 밭일도 했고 숲에 들어가 약초나 버섯을 따서 살림에 보태기도 했던 치요이기에 웬만한 일은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어떤 이의 수발을 들고 이야기 상대가 되라는 말을 듣는다. 독방에 개인 목욕실까지 후한 대접을 받은 치요에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함부로 저택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아고 가문을 지켜주는 보호신의 수발과 말상대 임무를 받은 치요. 소녀의 모습이던 보호신은 갑자기 짐승 같이 울부짖는다. 보호신의 눈은 새빨갛게 불타오르고 입은 귀까지 찢어지며 날카로운 엄니를 드러내는 데다 머리카락은 솟구쳐 불꽃 덩어리 같다. 정신을 잃었던 치요는 눈을 뜨자마자 걱정이 앞선다. 보호신을 기쁘게 하기는커녕 화나게 했으니 어떤 벌을 받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치요가 이곳에 온 목적은 오로지 보호신을 모시게 하려는 것이니 보호신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몇 번이라도 별채로 가서 그 보호신을 만나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말을 듣는다. 하지만 마을을 떠나올 때 치요를 배웅한 이 하나 없고, 심지어 엄마가 죽었을 때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허전함과 고독함에 힘들었는데, 그 마음을 보호신인 아구리코가 처음으로 알아차려 주다니 치요의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치요는 아구리코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란 다짐을 한다.
별채에서 일하는 하녀들 사이에서 아구리코의 공식적인 존재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아고 유사이의 여동생이고, 치요는 그 '공주님'을 돌보는 중이다. 치요는 이곳에서 아기가 태어나지 못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구리코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알고 보니 아구리코는 아구리 숲에서 태어난 여우 혼령이고 나이는 백오십이 넘었다. 아구리코가 백 년 전 아고 집안을 도우려 했을 당시 아고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아구리코가 모내기를 도와주면서 모종들이 병충해를 입지 않아 수확이 껑충 뛰자 아고 집안은 조금씩 살림이 피기 시작했고 아구리코를 신처럼 받들어 주었다. 하지만 아고 집안 인간들의 마음은 변하기 시작해 다시 가난해질 것에 대한 두려움에 아구리코를 영원히 잡아둘 계획을 세우고 잔치라는 명목으로 아구리코를 초대한 뒤 억지로 마구 눌러 비틀어 붙잡는다. 아고의 논밭은 해마다 풍요로워지고 행운은 또 다른 행운과 재물을 불러들인다. 마침내 주변 일대를 다스리는 호족으로 번성한 아고는 저택을 지으며 '아고'라는 가문의 이름을 짓는다. 아고의 '아'는 아구리코를 뜻하고 '고'는 힘으로 누른다는 뜻이다. 그렇게 탄생한 아고 가문에선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
기억하고 싶은 부분
p. 27
"넌 운이 좋아. 보호신이 죽이지 않았으니까."
치요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운이 좋다. 죽임을 당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치요가 죽임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헤이하치로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치요를 그 방에 보냈다는 뜻이다.
문득 생각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 방 안에 있는 보호신이 아니라, 아고 가문 사람들이 아닐까 하고.
p. 47
그러나 아구리코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은 치요의 이야기였다. 치요가 본 하늘색, 구름 모양, 처마 밑에 생긴 고드름 수,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일을 몹시 듣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구리코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애절한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p. 87
이때 치요는 분명히 깨달았다. 헤이하치로는 확실히 아구리코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아구리코를 자유롭게 해 줄 마음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난 달라. 나는 꼭 아구리코 님을 밖으로 빼낼 거야. 햇살과 대지를 아구리코 님에게 돌려드려야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면서 치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생각
판타지에 스릴러까지 가미된 책을 한 장씩 넘기며 궁금해서 참기 힘들었다. <전천당> 시리즈 작가답게 흡입력 있게 독자를 유혹한다.
욕심이라는 게 참 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이없다가도 치요와 아구리코의 사연을 읽으면서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바라는 게 인간의 본능이면서도 어느 정도의 선을 지켜야 하는지, 또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리고 조절하며 살아야 할지 깨닫게 하는 바가 많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이라는 소재로 극단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확대해 보면 이 이야기는 비단 책 속에만 존재하는 일이 아니기에 더욱 씁쓸하다. 바라던 뭔가를 이루면 처음엔 고마움을 느끼다 거기에서 멈춰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이 바뀌는 건 한순간이고, 탐욕으로 번져,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스스럼없이 벌이게 된다. 누군가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나 또한 가질 수 없는걸 가지려 욕심부린 적이 너무 많기에 잠시 반성을 해본다. 같은 이야기라도 누군가 내게 '욕심부리지 마라!'라며 훈계하면 거부감이 들 테지만 흥미진진한 등장인물과 그들의 애처로운 대사가 생동감 있게 들려와 자기개발서보다 이런 글이 더 끌리는 것 같다.
학부모님들의 욕심에 자녀들이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학부모님을 욕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더 잘 해보려고, 자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영어 공부를 강요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 십분 이해된다. 수업 외에 매일 이루어지는 전화상담을 통해 나와 학부모님은 어려움을 나누고 최대한 더 나은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성적 외에도 수업 중 아이에 대해 관찰한 바를 자세히 말씀드린다. 부모님이라도 교실에서 어떤 특정한 순간에 자녀가 내뱉은 말과 행동을 다 알 리가 없다. 의외의 모습일 것 같은 찰나를 잘 기억하고 메모했다가 전달하며 아이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제는 내가 예전보다는 더 자신 있게 아이가 힘들어하면 영어 공부를 조금 쉬게 해달라고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수업 중에 방긋방긋 웃으며 즐거워하는 귀염둥이들의 얼굴만 봐도 가끔 애처롭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좋으나 싫으나 영어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기에 일단 학습자가 즐겁고 소화할 수 있는 정도를 찾아가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의 이런저런 말과 철학도 나만의 욕심일 수 있기에 교육엔 정답이 없고 나도 알아가는 중이라고 조심조심 말씀드린다.
책을 읽으며 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남들에게, 특히 내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에게 욕심을 내비치진 않았는지 돌아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인 견해를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