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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피 다운 딜리
서지현 지음 / 씨엘비북스(CLB BOOKS) / 2023년 1월
평점 :
이미 여러 권의 책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된 서지현 작가의 신간이다. 출간 전부터 <다피 다운 딜리> 리디북스의 화제작이라니 더욱 궁금해졌다.
표지 디자인이 예뻐서 서평단을 신청한 이유가 꽤 크다. 딱 보자마자 산뜻해서 눈길이 갔고, 제목은 또 무슨 뜻일까 혼자 추측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코끼리의 의미도 조금은 알 것 같아 책을 다 읽은 후 표지를 다시 봤을 때의 느낌은 또 다르다.
주인공 데샤드는 자신의 '꿈'이었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만 어느 날부터 밤에 '꿈'을 이루지 못한다.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해 힘들어하다가 남대륙 세블레 왕국에 사는 마법사를 찾아 도움을 청한다. 새롭게 알게 되는 자연의 소중함과 반려동물 코끼리에 관한 이야기, 요정 페어리가 함께 사는 조금은 신기한 곳에서 데샤드는 성장한다. 우리는 어른이지만 누구에게나 성장은 필요하다. 코끼리는 철학자의 이름 '데카르트'를 얻고 하늘을 별을 바라보는 데샤드에게 여러 가지 생각이 스친다. 데샤드는 그토록 원했던 '꿈'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기억하고 싶은 부분
p. 37
"지식은 현재 삶의 습득이에요. 지혜는 지금 이전의 나로부터 온 것이죠. 한순간에 탄생하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책을 많이 읽으면 다음 생에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예요. 그리고 전 견해가 부족할 뿐 지식은 부족하지 않아요. 다음 생에도 저는 아주 지혜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겠죠."
p. 44
"이론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어요.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고, 또한 알아내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새로운 것이 나오니까요."
p. 45
보통 꿈의 형상은 일상생활의 기억 표상과도 같은 것을 나타낸다고 알고 있다. 삶의 깊은 의미,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인식, 어떠한 법칙, 일상생활의 여운, 주변 환경의 왜곡된 인상, 그리고 상태. 몸이든 건강이든 그것이 놓인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르며, 모두 상징적이다.
pp. 56-57
당신에게 지혜롭고 고독한 친구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그들이 가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지, 완전한 미치광이처럼 구는지 이해하려고 하지 마라.
.....
단지 세상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치광이가 많다는 것이다. 이 미치광이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으니 비하하는 눈은 삼가도록 하자.
p. 58
"그래, 다포딜. 왜 농사를 짓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죠. 그것도 모르세요?"
다포딜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되묻었다. 물론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데샤드는 이미 다 자란 작물을 그저 돈을 주고 사는 행위만 했을 뿐이다. 먹기 위해서는 그저 돈을 벌어서 그걸로 물건을 사면 되었다.
그런데 농사라니.
데샤드의 알 수 없는 시선을 받으며 다포딜은 그에게 작업복을 넘겼다. 호미, 곡갱이, 삽. 데샤드가 시선을 돌려 데카르트를 바라봤다. 이미 땅을 갈 준비를 마친 코끼리가 뭐 하냐는 듯 데샤드를 바라봤다. 그가 처참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p. 60
"헤이즈먼을 만나고 나서 세상의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죠. 제 세상이 그렇게 좁은지 몰랐어요. 단순히 이 초원과 숲, 마을만 있는 줄 알았죠. 원래 사람들은 자신이 본 세계 속에서만 살잖아요. 마을에서 전 현명한 사람 중 하나였어요. 첫 번째는 할머니였고, 두 번째는 저였어요. 촌장님은 세 번째죠. 어쨌든 저는 현명한 세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다른 누구에게도 침범 받지 않는 모두가 인정하는 똑똑한 사람! 근데 저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만난 거죠. 세상에. 내가 그 세 손가락에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처음 느낀거예요."
pp. 62-64
"죽고 싶으면 나중에 죽어요. 곱게 죽여드릴게요. 전혀 아프지 않게 죽을 수가 있어요. 저에겐 대대로 내려오는 지혜가 있거든요. 그리고 이왕 죽을 거라면 일단 그전에 당신의 삶을 세상의 이바지에 좀 쓰세요. 세상엔 좋은 일이 많은걸요. 농사 같은 거 말이죠!"
.....
"농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요."
.....
"먹지 않고 살 수 있어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지 못한 채, 다포딜이 바로 이어 말했다.
"노예든, 평민이든, 귀족이나 왕족이라도, 하다못해 황제라도 먹지 못하면 살 수 없어요."
데샤드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으니까.
"농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들이죠. 그것만큼 위대하며, 세상에 이바지하는 직업이 어디있다는 건가요?"
위대한 직업이라는 말에 순간 데샤드의 머릿속에 황제, 사제가 떠올랐다. 아니면 영웅? 그래. 영웅도 위대한 직업이기는 했다. 사실 데샤드의 사고방식으로는 농부가 위대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농부는 하층의 직업 중 하나였다.
지금의 나에게 '꿈'이라는 단어는 언제 들어도 설레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아무런 꿈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 형식적으로 자주 물어보는 장래희망을 묻는 순간이 너무 괴로워 가끔은 솔직하게 대답하다 이상한 시선을 마주했다. 또 가끔은 그 한심스레 바라보던 시선이 따가와서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학생들과 자연스레 꿈 이야기를 하게 되면, 꿈이 없다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지금 당장 명확한 생각이 있다고 해도 이루어 지지 않을 수도 있는데, 꿈이 없다고 한심한 아이 취급받는 건 너무 편협한 생각 아닌가.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다. 황당한 이야기, 꿈인 줄 아는 데도 진행되는 꿈, 아직도 무서운 개들이 달려드는 꿈 등등.
딱히 나누거나 기억할 만한 꿈이 아니기에 그냥 잊고 살았는데 한창 내 꿈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던 한 학생이 생각났다. 지금 건축학과 새내기가 된 아이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 나와 공부했다.
어느 날 학생이 묻는다.
"선생님은 꿈꾸세요? 저는 꿈꾸고 싶은데 꿈을 꾼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처음엔 너무 놀랐지만 자기가 그렇다는데,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꾸 꿈 이야기를 해 달라고 보채기에 들려주면 신나게 듣다가,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 재차 묻곤 했다. 내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며,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이제 제발 공부하자고 말린 적도 많다. 자기는 지금 공부보다 내 꿈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며 우기다가 내게 혼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아이는 내게 상상력이 풍부하다면서 칭찬을 해줬다. 처음엔 의아했지만 고마운 아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 학생을 잊고 있었는데 나에게 이 일화 외에도 여러 가능성을 열어준 특별한 아이임에 틀림없다.
책을 읽으며 한쪽으론 주인공 데샤드가 제발 꿈을 이루길 바라는 마음에, 또 다른 한쪽으론 건축가를 꿈꾸는 아이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내 머릿속은 즐겁게 몽글몽글 거린다.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를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