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잉게베르트 C.헤넬 / 한국신학연구소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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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는 20세기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철학적, 신학적 사상가이다. 이 책은 분명 하나의 <사상사>이지만, 다른 편으로 생각하면 틸리히의 사상이 제대로 드러난 장(場)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사상의 단순한 흐름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틸리히의 독특한 해석과 평가가 그대로 드러난 그리스도교 사상에 대한 틸리히의 평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상의 역사를 통한 그의 사상의 또 하나의 표출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읽어 가노라면 과거의 사상의 유산에 관심을 쏟기보다는 '오늘'과의 의미 연관에서 '어제'를 새롭게 평가해야겠다는 유혹을 강하게 받게 된다. ... 틸리히가 그리스도교 사상의 철학적 근거를 찾고, 역사적 맥락을 짓고,삶의 실존적, 역사적 의미를 묻는 그의 방법과 내용은 정말 탁월하다. 우리는 이 학문적인 자세를 익히는 훈련을 위해서도 이 책을 정중히 대해야 할 것이다.  (옮긴이(송기득)의 뒷말, 441-442쪽)

틸리히는 이 책의 제일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신학은 통일적으로 발전하면서 바다처럼 모든 나라에 파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운동은 언제나 반대의 운동을 일으키는 법이다. 그 결과 신학의 발전은 전체로서는 늘 커가고 있기 보다는 오히려 끊임없이 드나드는 밀물과 썰물과 같다고 비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전의 모든 국면에서 한 가지 물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교적 메시지를 현대적 인간의 정신으로 결합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은 종래의 종합과는 구별된다. 내가 밝히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가 휴머니즘의 자기 비판에 의해서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해결을 제시해 보려는 것이다. 이것은 종합도 분리도 아니고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과의 동일화나 괴리도 아니고, 상관(Correlation)이다. 그리스도교 사상의 역사는 바로 이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435-436쪽)" 

이러한 틸리히의 언급대로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서술은 실존적 물음이 그 기저에 자리잡고 있다. 오늘과의 의미 연관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다시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물음은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단순히 시대별로 존재했던 하나의 신학적 체계, 사고방식, 교리적 진술로 국한짓지 않는다. 대신 틸리히는 이 모든 것을 교회가 처했던 현실적인 삶의 훌륭하고도 뜻 깊은 표현(25쪽)으로 바라본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의 삶을 반추하며 내일을 향해 또 다른 질문과 대답을 열어주는 삶의 진솔한 표현으로 열리게 된다. 또 하나 주목해 볼 수있는 점은 틸리히가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흐름을 크게 두 가지 경향의 대립으로 제시한 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적 경향과 아리스토텔레스적 경향이다. 틸리히는 이를 기준으로 자신의 범주를 밝히기도 했다. 자신을 "종교철학에서 본다면 아우구스티누스적, 반아리스토텔레스적, 반토마스적인 경향의 범부에 넣을 수가 있을 것"이지만 "형태의 철학자로서, 형태의 신학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더 가깝다"고 말이다. (184-185쪽) 틸리히의 사상사 서술에서 아우구스티누스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교해 보면 그 비중이 상당하다. 한 개 장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거의 할애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분량으로 할애된 장이 마틴 루터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중을 고려해 본다면 틸리히는 그리스도교 사상사의 큰 맥락을 루터와 아우구스티누스적 경향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상 이해를 위해서는 아우구스티누와 루터를 반드시 자세하게 읽어봐야 하는 필요를 새삼스럽게 느껴본다. 마지막으로 간간히 틸리히가 사상사의 맥락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을 읽는 즐거움을 말할 수 있겠다. 13세기 중세교회의 신학적 흐름을 틸리히는 이렇게 정리했다. "이성과 계시의 대립이라는 전통적 도식으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보나벤투라는 이성 그 자체는 계시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성이 그 안에 진리의 여러 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토마스는 이성은 계시를 파악할 수 있는 적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둔스 스코투스는 이성은 계시에 대해서 부족합하다고 생각한다. 옥캄은 계시는 이성과 서로 아무런 접촉점도 없이 병립해 있다고 본다." (288쪽) 이러한 간결한 정리가 간간히 등장한다. 거장 신학자의 무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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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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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나'는 역설적인 존재다. '나'는 현실과 관념 속에서 헤메인다. 또한 완전성과 야만성, 이성과 욕망, 삶과 죽음의 역설이 주인공 '나'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순수함, 그리고 이를 향한 호기심은 파괴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어 도대체 구별할 방도가 없어 보인다. 이 모든 것은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성(性)적 정체성이 그 현실을 살아가야만하는 '나'의 실존 가운데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음에서 비롯된다.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살아내기 어렵다. 그 결과 가면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분열이 일어난다. '나'의 말처럼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르다는, 두 분열의 단순함과 직접성(216쪽)"이 그것이다.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사랑, 영적인 것에 대한 사랑,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 플라토적 관념은 실존하는 '나'에게 가면을 덧 입혀 주었다. 그러나 그 가면은 도리어 실존의 불안을 증폭시키며 존재의 심연, 육체의 욕망을 더욱 날카롭게 할 뿐이었다. 그의 실존은 "가늘고 긴 종이를 꼬아 양끝을 맞붙여 만든 원과 같은 측량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겉인가 싶으면 속이었고, 속인가 싶으면 다시 겉이 되는(160쪽)" 순환 가운데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가면과 맨낯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가면이 곧 맨낯이 되고, 맨낯이 가면이 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관념은 남아 현실과 대결하고 불안은 증폭된다. '내'가 확인한 것은 그것이다. 역설적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불안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내'가 극복하고자 했던 이것은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시리도록 슬픈 아픔 속에 그저 재확인하는 것에서 끝나고 만다. 이 소설의 마지막 글자 "1949년 4월 27일(228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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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선교사와 한국근대교육 - 미션스쿨의 설립과 일제하의 갈등, 번역총서 9
이성전 지음, 서정민.가미야마 미나코 옮김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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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다음과 같다. "미국선교사가 조선에서 어떻게 교육에 힘썼는가, 어떻게 미션스쿨을 현지 상황을 감안해가면서 발전시키고 전개해 갔는가? 미국의 교육이 그 모델로 설정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현지에 뿌리내릴 수 있었는가? 또 어떻게 그것이 수용되어 갔는가? 이 선교사들이 주도한 미션스쿨을 통해서 심겨진 서양 근대가 일본 제국지배, 혹은 총독부가 추진한 교육과 일본 통치하에서 어떠한 관계성을 갖게 되었는가?"(21쪽)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밝혀지는 역사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근대사 안에서 발견되는 미국형 근대의 부식, 수용, 발전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서 근대 한국의 다양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22쪽) 이러한 역사 이해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근대 한국의 교육은 조선 정부에 의해서 주도되지 못했고,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면서 교육 제도가 갖추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 선교에 의해 기초가 닦였지고 있었다.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들의 거의 대부분이 개신교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회, 병원, 학교라는 저자의 표현으로 말하면 "트리니티" 선교사업의 결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고 식민통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교육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름아닌 선교사들의 활동임이 분명했다. 시기적으로 세분화하면 교육정책의 강약의 차이가 있겠지만 일제통치 후기로 가면서 "신도"의 강요로 인한 대립양상이 격해지게 되었는데, 이 양상은 "종교와 종교의 갈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제도, 선교사도 서로를 더이상 용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선교사들이 일제와 맺게되는 관계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저자는 "평양과 서울의 갈등"으로 정리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 양상을 저자는 세계교회사 맥락으로 이어가서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갈등"의 맥락이다. 그러나 보다 폭넓게 본다면 이러한 갈등 양상도 결국은 저자의 견해를 빌어 이야기 한다면 미국형 근대의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입장의 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평양이든 서울이든 개신교 선교사업의 한 축이었던 교육사업은 일제와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미국형 근대가 자리잡을 수 없었던 한국의 구조적인 한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한계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역사의 굴절과 왜곡현상을 지적했다. 신앙의 자유를 지켜내며 기독교 신앙을 유지했고 또한 인권적인 측면에서도 저항의 역사를 남긴 긍정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교육에 있어서 총독부 교육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교육공간의 완전한 소멸과 함께 식민지 교육과의 전면적 통합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는 부정성을 동시에 지적한 것이다. 저자의 말 그대로 "전진해도 지옥이요, 물로나도 지옥과도 같은 아포리아적인 상태"였다. 

이 연구와 함께 안종철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의 활동과 한미관계" 를 읽으면 당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될 듯하다. 후자의 연구는 자세하고 세심하며 보편적인 역사실증을 통해 구체적인 역사현장을 재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미에 이런 추기(追記)를 달았다.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근대 조선에서의 미션스쿨이 조선인들에게 어떤 교육공간이었는지, 또는 식민지 하에서 일본의 제국 지배를 상대화하는 공간으로서 어떻게 기능할 수 있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291쪽). 이 부분에 있어 또 다른 연구가 나온다면 보다 당시대를 살아간 한국인들의 삶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제국주의 국가였던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제국주의 국가의 영향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했던 한국, 한국인들의 수동적이고 때로는 주체적이었던 근대화의 노정을 기독교와의 연결 속에서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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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마음을 놓다 - 다정하게 안아주는 심리치유에세이
이주은 지음 / 앨리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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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정말로 힘듭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도 힘들고, 강한 사람이 되는 것도 힘들고, 착한 사람으로 사는 것도 힘듭니다. 집으로 운전하며 가다가 눈에 눈물이 가득 차서 시야가 흐려진 적이 있었습니다. 며칠 사이 가슴이 좀 답답한 것 같기는 했지만 그날은 그저 평범하게 지나간 하루였고, 뚜렷하게 서글픈 일도 없었습니다. 무심코 듣던 구슬픈 연주곡에  심취하여 덩달아 심금이 울린 모양입니다. 정말로 사람들  마음 속엔 거문고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삭이면 병이 됩니다. 반드시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림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 그림으로 그려진 빨간 사과는 여러 가능성들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그리운 고향의 사과나무를 눈앞에 가져다줄 수도 있고, 빨갛게 달아오른 열정을 떠오르게 할수도 있으니까요. (5-6쪽)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살림살이 방법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해도 자신의 살림살이 방법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모양짓는다. 살면서 부딪히는 여러 일들, 사랑의 문제, 관계의 문제, 자아의 문제 등은 자신의 삶의 모양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사실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 정답이 있다면 이 세상은 너무나 불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세상은 어떠한 정답을 만들어 내고 강요하는 듯한 면이 없지 않다. 그래서 불행이라는 단어가 삶을 위협하는 듯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 허상의 위협이 만들어내는 두려움이 우리의 살림살이를 옥죄어 올 때 이를 자연스레 풀어내지 못하고 그 속에 갇혀버리게 되는 양상은 우리들 몸에, 마음에 실제적인 생채기를 내게 된다. 어쩌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두들 저마다의 살림살이 방법을 가지고 있기에, 또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처리 방법을 이미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시시콜콜이 이야기하면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 알고 있는 건데 새삼스럽기는..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한 번 속는셈 치고 그 이야기 한 번 더 들어봐도 큰 손해는 없을 것 같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그저 맘편하게 볼 수 있는 한 길이 되어줬다면, 그림 이야기와 덧붙여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과 이를 담아내고 있는 문학작품들, 영화이야기들도 함께 즐거이 읽어봤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나는 마음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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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조선과 미국 선교사
류대영 지음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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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여쪽의 내용을 어느 것 하나 낭비되는 글 없이 꽉꽉 채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는이로 하여금 쉽지 않는 길을 걷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참고 걸어가서 그 종국에 이르렀을 때 쓰여진 내용을 꽉 채우고도 넘치도록 부어지는 듯한 깨달음, 통찰, 배움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가능한 것일게다. 이 책은 그렇게 꽉 채워져 있고, 또 채워지도록 한다. 마지막 결론 부분을 읽는 것은 딱딱한 역사로도 가슴이 설레이게 만들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참 잘 읽었다. 이 모든 내용을 머리 속에 다 기억하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구한말 문명개화를 꾀하고자했던 조선 조정, 고종과 그를 둘러싼 여러 정치 세력들의 움직임과 조선을 향하고 있는 세계 열강들, 그런 것과는 아랑곳이 종교적 열심을 최우선에 안고 영혼구령의 열정으로 기독교 선교의 기치를 올렸던 미국의 선교사들, 이들의 역학관계가 보여주는 제국주의적 힘의 구도. 미국 선교사들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보여준 서구 문명의 영향력과 그것을 받아들인 조선의 지식인들의 다른 꿈, 조선의 미래를 향했던 그들의 노력과 선교사들의 종교적 희망이 빚어내는 또 다른 갈등 양상. 이것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지면서 개화기의 역사가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때로는 거대한 담론으로 그러나 때로는 한 개개인의 세세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이렇게 적어가면서도 한숨이 나오는 것은 이것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꽉찬 알맹이들 때문이다. 

USA 라는 나라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 만들어낸 미국이라는 이름을 보더라도 한국에게 있어 미국은 뭔가 아름다움의 대상, 추구의 대상이 되어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것이 가깝게는 6.25를 겪으면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통해 극단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생산되고 고착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실상 그러한 이미지, 실제적 영향력은 그 오래전부터 역사의 흔적 가운데 지울 수 없는 커다란 유산처럼 쌓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개화기 조선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들과 그들이 행한 인도적 차원, 종교적 차원의 여러 가지 일들이 양산한 긍정적 이미지들과, 철저히 상업적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가운데 정치적 제국주의의 침략을 피해가며 정교분리의 허울을 통해 선한 나라의 이미지를 쌓아간 미국 국무부와 한국 주재 공사관의 노력은 이미 조선 조정에게 미국에 대한 환상을 낳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 조선 민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00여년지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을 외치고 미국을 따라가기에 여념이 없는 한국의 현실은 개화기에서부터 이미 그 역사적 노정을 암시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환상은 너무나 순진해 보인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인간은 알면서도 애써 그 앎을 무시하면서 환상을 추구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앎 자체가 없을 경우도 허다하겠지만. 그래서 앎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알아버리는 순간, 환상의 묘약은 사라져 버리니. 현실을 마주하기에는 내가 감당해야할 책임이 너무나 커 보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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