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의 균형있는 목회자
유진 피터슨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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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과 기술은 다르다. 그속에서 우리는 눈군가를 즐겁게 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는 의무를 가진다. 실체의 본질을 추구하거나 형성하면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그런 영역에 헌신할 때, 단순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을 할 때보다 더욱 깊은 차원의 유익을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된다. 기술의 영역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실체들을 취급한다. 반면에 직분의 영역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계한다. ... 목회자의 고결함은 하나님(근심을 덜어주고, 평안함을 주며, 종교적인 조직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지식을 소유한 상태로 시작했다. 적어도 그런 사실에 대한 암시를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목회 현장에 들어서면, 목회자들에게는 직업적인 일이 주어진다. 목회자들이 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의식이 아닌 자아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목회자들이 그들의 주된 관심사 - 상담, 교훈, 격려 - 를 취급하는 한, 그들은 목회자들에게 직업적인 업무 안에서 좋은 점수를 부여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든 그렇지 않는 간에 그들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 목회자 주변을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무언가 다른 일을 해달라고 요구할 때 소신껏 일을 해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특히 그 사람들이 매우 지적이며, 목회자를 존경하고, 목회자에게 사례를 지불할 때에는 더욱 그렇다. ... 종종 그런 일들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긴급하게 몰려온다. 그러한 모든 전화와 편지들은 목회자들이 무언가를 자신들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로부터 온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목회자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권면과 훌륭한 충고, 아니면 모종의 기회를 얻기 위해 목회자를 찾는다. 그들은 목회자가 그런 것들을 부여할 자격을 갖추고 있으리라는 헛된 생각을 품고 있다. (23-25) 내가 맡은 일과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일 사이에서 나는 분명한 선을 지키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 그분의 자비하심, 창조와 언약에 나타난 그분의 활동에 주된 관심을 쏟고 있는가? 사람들이 이러한 실체들 속에서 더욱 성숙하며 그 속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주지 못할 일들을 나에게 요구할 때, 나는 그런 요구를 단호히 거절할 만큼 충분히 거기에 헌신하고 있는가? ... 어떻게 나는 그 선을 정확하게 지킬 수 있는가? 종교적인 일을 하도록 나를 고용한 사람들의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나는 목회적 소명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가? 오랫동안 비교가치에 따라 쇼핑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목회적 성실함이라는 건전한 관점에서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이 직분의 고결함을 보존할 수 있는가? (26-27)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유진 피터슨이 관심을 두는 것은 바로 “균형”이다. 직분과 직업 사이의 “균형”,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하는 목회자의 본래적 직분과 그들의 요구하는 일을 들어주어야 하는 직업 사이의 균형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위해 그가 내놓은 것은 기도, 성경읽기 그리고 영적 지도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답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은 기도와 성경읽기, 영성을 말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 피터슨은 이를 다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조금 다르다. 그는 주목하지 않았던 것들을 주목하면서, 이 단어들이 담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고 환하게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딱딱한 규칙이나, 엄격한 제도, 때로는 하기 싫어지는 잔소리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마땅히 해야할 당연한 것들을 말하고 있음에도 그의 이야기는 따뜻하고 깊다. 그러나 그것이 도리어 그렇게 하지 못하는 부족한 모습을 더욱 뒤돌아 보게 한다. 마지막 장에 그는 영적지도의 다섯 가지 유형을 다섯 명의 목회자를 통해 이야기한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충분히 숙고하면서 자신의 유형을 만들어가는 좋은 시금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는 대략의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다.

목회의 삼각형에서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는 기도다. 이 때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와 계몽주의 시대가 이끈 변화를 지적한다. 그것이 이끈 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일을 이해하는 것, 그 자신의 실존을 말하는 것에 중심이 있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을 인간이 아닌 신으로서 살아가게 했다. 한계는 사라졌다. 이와 유사하게 목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일어난다. 기도가 연설로 자리 잡으면서 외관상 전면으로 등장하지만, 그 실질적인 가치가 심하게 손상되는 경우가 다반사이게 된 것이다. 이 속에서 저자는 다시 “기도”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반응의 언어”로서 제시된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일부로 되돌리고, 인간의 실존을 하나님께 대한 반응으로 다시 위치시키는 노력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이 바로 히브리의 기도, “시편”이다. 그리고 그 반응을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저녁시간과 일주일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안식일에 위치시킨다. 그리하여 기도는 “휴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기도하는 것, 그것은 시편으로 삶을 들여다보고, 저녁과 안식일의 실제적인 리듬 속으로 들어가 쉬는 “삶의 반응”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성경읽기다. 여기서 그는 성경을 “들을 것”을 말한다. 기록된 문자로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파헤지는 작업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지만, 그와 동시에 기록된 문자 이전의 언어를 기억하는 것, 곧 음성적인 언어를 들어야 함을 그는 말하고 있다. 이 때 듣기의 힘이 제시된다. 그것은 인격적인 상호 교류가 가능하고, 마음과 몸의 구분이 사라지며, 내면과 외면, 외부의 세계와 내부의 영혼이 통합되도록 이끈다. 그래서 “듣기”에서는 “찾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 강조된다. 이를 위해서 “묵상”이 필요하다. 그 묵상도 마찬가지로 말씀을 소리로 듣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는데, 이 때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말씀이 들려진 상황과 컨텍스트를 포괄하게 된다. 그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크고 광활하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가 들려진 곳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을 소리로, 이야기로 제대로 듣는 것은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곳으로부터 오는 놀라움이 있고, 그 놀라움에 대한 반응은 삶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그 때마다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영적 지도다. 이것은 매일의 일상적인 사건에 관련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일들과 평범한 삶의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경우들에 마음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탐구하며 발전시키는 사역의 한 측면이다. 그리하여 소홀히 취급한 것들을 진지하게 여거 '삶에 속한 복잡한 문제들'을 고귀한 거룩함을 위한 원재료로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222)이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거나 엄청나게 복잡한 직무 설명서에 또 다른 항목을 추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228)한다. 따라서 이는 충분한 관심을 요구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영역이 곧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리고 이 사역을 위한 최고의 준비 단계는 정직한 삶이다. 그것은 순례자가 되는 것과 연관된다. 그 순간 순간마다 대면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만나는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를 더욱 사랑하시는 주님을 향한 두려움, 감탄, 존경이 그 마음 깊이 항상 상존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목회자에게 맡겨진 것은 주연의 역할이 아니다. 무지함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겸손하게 기도하게 된다. 따라서 영적 지도는 목회자가 누군가에게 행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자리에 있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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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톰 라이트 지음, 김재영 옮김 / IVP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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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를 주목하게 만든 책이다. 오밀조밀한 짜임새 속에 발랄한 이야기들이 생동감을 부여하며 한 편의 멋진 드라마를 본 듯한 느낌이다. 그가 소개한 기독교 드라마는 네 가지 영역에 대한 질문 속에서 시작된다. 정의, 영성, 관계, 아름다움. 이 네 가지 영역은 인간의 삶 한 가운데서 언제나 갈급함을 일으키는 '그 무엇들'이다.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은 이 영역들, 무언가 희미하게만 들려오는 질문들, 그래서 그는 이것을 '메아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 메아리들이 한 곳으로 모아지며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는 것을 기독교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단순히 종교적 체계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역동성이 상당하다. 그 곳은 "하늘과 땅이 겹치고 맞물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곳은 하늘과 땅이 단순히 하나로 합쳐진 범신론, 범재신론의 세계나 혹은 하늘과 땅이 간단하게 두 개로 나뉘어져 있는 이신론, 영지주의의 세계과 구별되면서, 상상할 수 없는, 그래서 제대로 보고 표현하기 힘든 저 너머의 그러나 바로 이곳의 기이하고 신비한 "임재"를 드러낸다. 그것은 약속된 것이기도 했다. 저 멀리 이스라엘 시대를 건너와 예수에게 이르기까지,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마침내 이 땅에 드러난 하나님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이 세계를 본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을 이어 이 세계를 향해 뛰어든 이들의 삶은 그래서 쉽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그 세계에 숨어있는 힘, 그들을 이끌어가는 손길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이다. 이렇게 이 곳을 펼쳐내는 톰 라이트의 이야기는 숨 쉴틈 없이 그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했다. 드라마의 절정부분으로 숨가쁘게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 그는 점점 이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삶으로 유쾌하게 초대하고 있었다. 이제 그 삶이 잔잔한 음악처럼 펼쳐진다. 그것은 예배, 기도, 성서읽기, 선교, 교회에 대한 것으로서 전혀 식상하지 않게 제시된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폭과 깊이, 그것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삶의 방법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처음에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문들, 갈급함이 가득했던 정의, 영성, 관계, 아름다움의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열어내어 보고 만지고 듣고 실제적으로 살아가게 한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 겹쳐지는 임재의 장소"가 단지 꿈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펼쳐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 진리의 깊이와 신비를 오롯이 마음에 담고 삶으로 품어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찌하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의 그 가슴 벅참을..     
 

이 책의 목적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추천하고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 기독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그려 보려는 데 있습니다. ... 첫째로 저는 네 가지 영역 - 정의에 대한 갈망, 영성에 대한 탐구, 친밀한 관계에 대한 주림, 아름다움에 대한 환희 - 을 탐구했습니다. 이 영역들은 오늘의 세계에서 한 목소리가 퍼져나가 만들어 내는 여러 메아리라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각각의 영역이 그 자체 너머의 세계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 제2부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 사항을 제시합니다. ... 제2부가 진행되면서 첨차적으로 우리는 제1부에서 듣기 시작했던 그 목소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세계를 바로잡으시려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성찰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라 불리는 인물에 대해 숙고하면서 그리고 이 세상과 인간의 삶에서 광풍처럼 부는 성령에 대해 숙고하면서 그 목소리를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3부로 들어갑니다. ... 특히 저는 교회의 존재 이유를 탐구합니다. ...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 세계, 바로잡힌 세상의 도구들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새 창조 세계는 이미 예수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이들은 단순히 그 세계의 수혜자들이 아니라 그 세계의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행위를 비롯하여, 다양한 주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책의 결론부에 도달하면서 다시금 되살아 제1부의 '메아리들'이 우리가 알아야 할 어떤 신에 대한 암시로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는 그리스도인의 소명의 핵심 요소임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 들어가는 말, 8-10쪽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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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소설로 그린 자화상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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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자신의 말"의 지면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한계를 스스로 말하고 있음에도 작가는 이 이야기는 자화상을 그리듯이 쓴 글이라고 말했다. 이 부분은 소설의 마지막에서 다시 읽을 수 있다. "우리 가족에게 참아 내기 힘든 가혹한 고통의 시기가 닥쳐왔다. (253쪽) ...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돼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254쪽)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 했다. ...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255쪽) ... 그 때 문득 막다른 골목가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269쪽)"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그것이 한계에 봉착하고, 정직하기 어렵더라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서 발견된다. 그것은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록 제한이 있을지언정 완전히 감추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껏 드러내 보이는 것, 가장 수치로운 순간 마저도 감추지 말고, 진정한 공포는 망각에서 온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최선의 증언을 선택하는 것, '벌레'로서의 삶을 보임으로써 '벌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자신을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생명과 삶 속에 자리잡은 역설과도 같은 진실이 아니겠나.

이러한 작가의 흔적은 이야기에 흠뻑 젖어들게 만들었고 그 속에서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벌레같은 삶의 모습을 넘어선 주옥같은 삶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행복함 속에서 함께 웃고, 그녀의 슬픔 속에서 함께 울게 만들었다. 박적골의 이야기는 싱그러운 싱아를 찾아 맛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일제 시대의 암흑기와 해방기, 전쟁기를 거치는 시공간 속에서 들려진 이야기는 아린 가슴을 더욱 아리게 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벌레'로 만들었던 해방과 전쟁기의 이야기는 읽는이로 하여금 그녀가 어서 그 곳을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읽게 했다. '순진하지만 허약했던' 오빠를 통해 자연스럽게 접했던 급진적인 사상,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서 그것의 "황폐의 극치(248쪽)"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며 지쳐 나자빠졌던 그녀,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삶의 깊이가 매몰되고 단순한 흑백논리와 미치광이와 같은 광기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그 모습을 읽는 것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희망을 찾는 절망과도 같았다. 이 가운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버린 그녀의 마지막 순간은 그래서 더욱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조목조목 하나 하나 말해줄 수 있는 작가의 "기억과 묘사"는 놀라웠다. 아니 그와 더불어 그것을 "상상"으로 엮어가는 것이 더욱 놀라웠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상상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대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성을 더했다. 그리고 희망을 현실화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감동을 더했다. 그녀의 이야기에 귀울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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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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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그게 어떻게 거짓말이냐, 농담이지."  "농담?" "그래, 농담이지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다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거, 그거 농담 아니니? ... (142쪽)"  "텍사스에도 파리가 있냐?" "없지. 사람들은 다들 이 세상에 없는 데를 가고 싶어해." "그럼 느네 집도 거기 있게꾸나. 그리고 날 보내줘" "취했어, 가봐. 차 태워줄게.(312쪽)" 어쩌면 사람은 현실을 살고 있지만 그보다는 알수 없는 그 어느 곳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거짓말인줄 알면서도 들으면 즐거운, 그걸 철썩같이 믿는다고 해도 절대 손해를 입지 않는, 어쩌면 여분의 보험과도 같은 것 말이다. 때로는 그 보험이 과하게 될 때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질지도 모르겠다. 현실과 현실 너머의 어느 곳 사이의 경계선이 갖는 긴장관계다. 그 속에 인간의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현실에 있지만,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현실은 벗어날 수 없는 그래서 갖게 되는 모순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모순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빈이 현금을 향하는 마음과 아내와 가족을 향하는 마음의 이중성, 그 속에서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하며 둘을 지탱하는 허구적 가족 관계는 아마도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하나 그 모순은 돈을 통해서 더욱 무지막지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사람보다 돈이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하다. 돈이라는 것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느순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경호의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면서 알면서도 그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영묘는, 그 모든 허울 마저도 돈으로 해결해 버린 영빈의 형은 이미 돈 앞에서 인격을 상실해 버린 듯한 사람의 모습을, 반대로 돈의 절대적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순 속에 깊이 빠지면서 더욱 거짓말이지만 듣기 즐거운 농담같은 이야기를, 보험과도 같이 든든한 그 어떤 것을 기대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삶은 살아가야하는 현실일텐데, 사람도 그리고 돈도 그 현실을 잊게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래서 농담과도 같은 이야기를,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닌 듯 하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뭔가 그 곳을 넘어서는 것을 바라봐야 하지 않겠는가. 빨간 능소화의 생명력이 그것이라면 그 생명력의 모습을 한 번 눈여겨 봄직도 하다. 갑작스러운 현금의 변화가 그리 쉽게 납득이 가질 않지만, 삶은 이미 납득할 만한 이유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법. 그래서 한 번 가능성을 찾아보아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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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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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체호프는 기 드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가장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특별히 놀라운 사건을 도입하기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 사건이 있더라도 그 자체의 외부적인 측면보다는 사건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다양하고 모순된 반응에 주목한다는 점, 대체로 매우 느슨한 플롯인데다가 그 결말이 미결정의 상태로 끝나고 주인공들도 이에 대해 어리둥절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 등장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의 단절 등 여기서 이루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런 체호프의 특징들은 현대 단편소설의 출현을 예고하는 핵심적인 징후들이기도 하다. ... 체호프는 한없이 차갑지만 따뜻하고 단호하지만 부드럽다. 그의 익살 뒤에는 천근 같은 우수가 기대어 있다. 그의 페시미즘 속에는 질긴 낙관이 숨쉰다. 그의 비밀은 가장 단순하기에 결코 알아낼 수 없다.          - 작품해설, 현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체호프, 191-192쪽 -
 
체호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마치 삶의 속내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삶의 짙은 그늘을 여지없이 그러나 아주 무덤덤한 듯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도리어 그 삶에 대한 진한 여운을 드러내는 듯 했고, 삶의 아름다움을 즐거이 노래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겹쳐지며 한 쪽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죽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차갑도록 냉정하게 이야기의 끝을 내는 그 결말은 인간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가벼운듯 그러나 무엇보다 심각하게 드러내며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한다. 때로는 그 끝이 한 개인의 알 수 없는 마음의 문제인 것처럼(관리의 죽음), 때로는 미처 깨닫지 못한 사소한 행복을 잃어버린 막심한 후회인 것처럼(베짱이), 때로는 나로 인해 일어난 너무나 가슴아픈 불행인 것처럼(티푸스), 때로는 삶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어내는 실타래처럼(주교) 말이다. 그래서 삶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통찰은 날카롭다. 특히나 삶을 살아가는 가장 구체적인 실존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의 세계, 심리적 상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어 때로는 흠칫 나 자신의 이야기인양 놀라게 된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몽환의 세계 속에서 인간의 처절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작은 몸짓과 말 한 마디에서 인간 군상의 실재를 재현하며,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세상의 얽힘을 보여준다. 이 삶을 무덤덤히 살아가는 것, 아둥바둥 무언가를 쫓고 무언가에 쫓기며 허우적 대는 것, 그러나 무언가를 꿈꾸고 갈망하는 것, 그 모든 이야기 속에는 바로 나도 있었다. 그렇다면 또 질문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삶은 무엇인가?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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