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 - 비움에 서툰 당신을 위한 생활의 기술
아키 지음, 허영은 옮김 / 웅진리빙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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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니멀 라이프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별로 미니멀한 삶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집 안에 건조기를 두고 전기로 빨래를 말리며 생활하는 것이 진짜 미니멀 라이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쓸모 없는 책은 아니다. 직접 생활에 적용해 볼만한 팁들이 듬뿍 있다.

지은이인 아키는 미니멀 라이프의 기본 원칙으로 세 가지를 제안한다.

1. 죄책감 버리기
2. 이상적인 생활을 그리면 쓸데 없는 집안일이 보인다.
3. 정해진 시간만큼만 노력하기

나는 이 세가지 원칙이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1. 내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더라도 그건 잘못이 아니다. 할만큼 했으면 손을 떼어야 한다.
2. 내가 바라는 삶이 완벽한 부엌과 눈 부신 욕실과 관련이 있다면 그걸 위해 노력해야 겠지. 하지만, 바라는 것이 다른 것이라면? 그때는 집안 일을 줄이고 그걸 해야지. 줄이려면 내가 하는 일 중 쓸데 없는 일은 없는지 계속 생각해야 한다.
특히 아키는 옷을 고를 때도 이 원칙을 적용한다. 이 옷은 '이상적인 나'에게 적합한 옷인지 자문한다고 한다.
맞네. 내가 그리는 멋진 내가 입지 않을 옷이라면 아무리 저렴해도 구입하면 안된다.
3. 그리고 정해진 시간만큼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거 가만히 보니 직장에서도 아주 유용한 지침이다. 다시 내 스타일로 해석해 볼까?
1. 내가 열심히 했는데도 일이 잘되지 않았다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다.
이 상황이 문제일 뿐.
스스로를 탓하지 말자.
2. 이상적인 삶이 직장에서의 완벽한 일처리인가?
아니라면, 너무 많이 애쓰지는 말자. 쓸데 없는 일을 찾아 없애고 줄이자.
그들이 요구하는 일을 다 해주는, 일처리 로봇이 되면 안된다. 계속 생각해야 한다. 이건 필요한 일인가?
3.  퇴근시간이 되면, 무조건 퇴근하자.
근무 시간 내내 노력했는데, 아직도 일을 다 못했다면, 그건 내가 야근을 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한 명을 더 고용하던가, 아니면 내가 일하는 방식을 바꾸던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좋아. 정해진 시간만큼만 노력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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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산다는 것 - 학교교육의 진실과 불복종 교육
조너선 코졸 지음, 김명신 옮김, 이계삼 해제 / 양철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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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유령, 학교 괴담

지금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력한 담론 가운데 하나는 학교 괴담이다. 학생들이 수업 시간 중에 아무렇게나 일어나서 돌아다니고, 교사가 앞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상관하지 않고 제 볼일을 본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와 떠들고 쉴 새 없이 스마트폰으로 교신을 한다. 그 소란의 와중에서 끝도 없이 잠을 자는 아이들도 상당수 된다. 교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폭행도 불사한다. 소소한 시비 끝에는 경찰에 신고를 해서 학교에는 수시로 경찰이 드나들고 있다. 따돌림과 폭행이 일상화되어 있다. 심지어... 많은 학교들에는 일진이 살고 있다!

이 아수라장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되어 중학교에서 절정을 이룬다. ‘미친 중2’라는 말도 생겨났다. 오죽하면 북한이 남한에 쳐들어오지 못하는 이유가 중딩이 무서워서라는 우스개 소리가 등장했겠는가.

학교 괴담을 접하게 되면 세상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마저도 학교와 교육, 청소년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절로 토해내게 된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장탄식을 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학교 밖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하나 같이 묻는다. 그 학교는 괜찮으냐고, 학생들이 무섭지 않으냐고, 남자고등학생들은 덩치도 크고 더 무서울 텐데,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냐고. 염려해주는 지인들을 위해 이 자리를 빌려 답하자면, 나는 괜찮다. 학생들이 무섭지는 않다. 남자고등학생들은 정말 덩치가 크지만(진짜 커졌다!) 그래도 무슨 일을 당하지도 않았다. 교사인 나도, 학생들도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잘 살고 있다고는 절대 말 못하겠지만, 내가 매일 매일 전장으로 출근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왜 지금 학교 괴담인가

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구성하는 얘기들이 대부분 사실이 근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담론이 한 사회 전체를 휩쓸고 있다면 일단 의심을 해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너무 많은 이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뒤에는 수상한 의도가 버티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학교 괴담이 형성되고 들불처럼 빠르게 한국 사회에 번져 나가고 있을 때에는 그것이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획득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수많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맞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인가?

하필 지금인 까닭을 여러 경로로 추정해볼 수 있겠지만, 나는 가장 주되게 학생 인권 조례와의 관련성을 의심 중이다. 학생 인권 조례가 제정되자, 많은 이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저 망나니 같은 아이들에게, 안 그래도 미쳐 날뛰는 저 아이들에게 인권 따위를 보장해서 어쩌자는 말인가! 두드려 패서 가르쳐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저것들에게 인권을 허()한다고?

이미 시의회를 통과한 학생 인권 조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명확하다. 학생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만한 자격을 애초에 상실한 존재임을 입증하면 되는 것이다. 학교 폭력이 전 사회의 관심사로 부각되는 동안, “그러니, 보라! 폭력과 욕설, 무질서가 난무하는 학교를. 제정신을 가진 자라면 인권이 아니라 교육을 말해야 한다.”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학교에 대한 뭇 사람들의 염려 덕분에 우리는 등교 시간에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는 학교 교문을 지나 교실로 들어가고, 이런 저런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수시로 복도에서 대면한다. 경찰이 지켜주는 학교에서, 학생들은 전보다 안심하고 지내게 되었을까? ‘폭력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빈사상태의 학교를 살리는 좋은 처방이 될 수 있을까?

 

학교에 부족한 것은 교육이다

지금 학교에 부족한 것은 폭력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아니라 교육이다. 학교 괴담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사실은 교육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학교에 교육이 부족하다고? 맞다. 학교에는 교육인 척 하는 것은 많지만 교육은 턱 없이 부족하다. 우리 사회, 그리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일을 담당하는 학교에는 교육이 아니면서 교육인 척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교육인척 하는 것들의 위장은 하도 교묘해서, 제대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혜안이 필요하다. 이때, 조너선 코졸의 <교사로 산다는 것>이 생각났다.

조너선 코졸은 미국의 차별적인 교육과 사회 불평등에 맞서 싸워온 교육자이다. 인종분리가 가장 심한 지역의 흑인 거주 구역의 학교에서 인종차별에 저항한 흑인 시인 랭스턴 휴스의 시를 읽어줬다는 이유로 해고된 뒤 가난한 사람과 유색 인종에 대해 차별적인 미국 교육의 문제를 고발하는 일에 앞장 서 왔다. 정말 한 평생을 진정한 교육무엇인지 질문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그의 수많은 저작 가운데 하나이다.

<교사로 산다는 것>은 세심한 문제제기를 통해 우리가 교육이라고 믿어 온 것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코졸이 <교사로 산다는 것>에서 첫 번째로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은 학교이다.

학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많은 이들이 개탄을 하지만, 여전히 학교는 힘이 세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좋은 일을 정도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많은 교사들이 말썽을 일으켜서 불려 온 아이들에게 학교를 계속 다닐 의사가 있는가를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에 아니오, 라고 답하는 학생을 나는 여태 만난 적이 없다. 학교가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아 보이는 아이도, 학교를 개똥보다 하찮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도, 몰래 말이라도 맞춘 듯 학교는 졸업해야지요, 하고 답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보통의 평범한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부모에게 학교가 행사하는 힘이야 여전히 절대적인 것이다. 그런데, 코졸은 이렇게 말한다.

 

공립학교에서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공립학교 체제가 갖은 수를 써가며 우리에게 망각시키려 하는 사실, 즉 공립학교가 언제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공립학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이 만든 것이 아니다. 공립학교는 총명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보통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공립학교를 재건하거나 재창안하거나 해체하거나 대체하는 일은 신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23)

 

문화의 힘은 놀라운 것이어서 한 세기 전이라면 매우 기이한 일로 간주되었을 많은 현상들을 그 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당연한 것,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문화의 많은 부분들이 근대 이후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외면한 채, 시공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질병 치료 행위가 제도 속으로 포섭되면서, 백 년 전이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온갖 민간 처방들을 비과학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의사 자격을 만들어 규격에 맞지 않는 자의 치료는 그가 진짜로 질병을 치료할 능력을 가지고 있느냐 여부에 관계없이 불법화한다. 우리는 우리가 건강하다는 것을 믿는데도 의사의 보증을 필요로 한다. 해마다 건강진단을 받으며 그 결과에 노심초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제 건강도 질병도 우리의 손을 떠나 전문가들에게 맡겨졌다.

교육 역시 산업화의 강력한 동력에 의해 급속히 기계화된 대량 생산의 길을 걷게 된다. 규격에 맞는 전문가들이 제도적으로 인정된 기관에서 가르치는 것을 규격대로 배워야만 이 사회는 그의 배움을 인정한다. 백 년 전이면 자연스러웠던 삶과 교육의 결합은 근대적인 형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배격된다. 우리는 왜 배우는가?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만약 교육이 삶과 분리되었다면 그것은 교육인 척 하는 것이지 교육이라고 볼 수 없다.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만나기

코졸은 삶과 분리시킨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의 현장을 놀랍도록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그가 포착해낸 장면 가운데 유난히 내 가슴을 치는 것이 있다. 교사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나는이라는 일인칭의 표현을 쓰지 않고 선생님은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 보편적 존재가 아니면서 보편성을 위장하는 것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나는 자연인으로서 너희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라는 보편적인 존재로 너희들 앞에 서 있는 거야. 너희들보다 우월할 뿐 아니라 오류도 없지. 그러니 내가 가르치는 것을 보편적인 진리로 믿으란 말이야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나를 넘어선 보편적인 무엇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헛된 위장으로 행해진 수업은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교사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취급하는 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인식하거나 옆에 있는 누군가를 3인칭 취급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것은 서로의 전 생애를 만나는 일이다. 내가 만나는 상대방에게 공감하는 일이다. 만남이 갖고 있는 그 엄중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적대시함으로써 거의 존재를 짓밟는 행위를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학교에 폭력이 만연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를, 또 다른 사람을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인칭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거대 산업체의 복잡한 기계 버튼을 누르거나 외국인 민간인 마을에 폭탄과 네이팜탄 발사 버튼을 누르는 완벽한 일꾼이 될 것이다.”(26)

 

코졸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위장하지 않은 일인칭의 열린 자세로 말하고 존재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며 아이들의 눈앞에서 일인칭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일인칭으로 학생들 앞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분노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평범한 인간이며, 때로는 틀리고 때로는 실수하는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진공 속의 가상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에 얽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일인칭으로 학생들은 대하는 이런 방식이야말로 우리 학생들에게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울고 숨 쉬고 살아가고 사랑하고 투쟁할 능력과 권리가 있음을 가르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를 말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말하게 될 것이다.”(30-31)

 

문제는, 이렇게 할 때 내가 가르치는 것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인칭의 내가 가르치는 것은 3인칭의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힘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말했기 때문에(혹은 교과서가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옳은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다면 나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구성해야 할 것이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할 것이며, 그것을 학생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코졸은 말한다. 그가 아는 한 고뇌의 시대에 불의와 혼란이 만연한 땅에서 진지한 교사가 택할 수 있는 윤리적 선택은 이것 뿐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요즘 학생들의 삶이 폭력으로 얼룩져 있다고 염려한다. 하지만 그 폭력은 어디에서 왔을까? 폭력을 휘두른 아이들은 말한다.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자고 그런 거예요.” 다른 사람을 짓밟으면서 그것을 우정이라 말한다. 우리는? 학생들의 삶을 짓밟으며 그걸 교육이라 말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이 아니라 삶을 복제하며 자란다.

진짜 괴담은 여기에 있다. 교육이 아니면서 교육인 척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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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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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물세 살(1951) 체 게바라는 친구와 함께 낡은 오토바이를 몰고 긴 여행을 떠났다.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이 긴 여행에서 그는 사실상 새로 태어난다. 여행 이전의 그가 쾌활하고 의지가 굳으며 실행력이 뛰어난 젊은이였다면 여행 과정에서 그는 투철한 신념으로 다져진 미래의 혁명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때로 한 권의 책이, 한 사람과의 만남이, 또는 한 번의 여행이 어떤 사람의 인생을 급선회시켜 전혀 새로운 길로 이끌기도 한다는 모범 사례를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단 한 방의 무엇으로 변화할 수 있는 인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어떤 한 방으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이미 그에게 가득 찬 변화의 기운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체 게바라는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여행 중에도, 무장투쟁 중에도 독서를 멈춘 적이 없었다. 정조, 뉴턴, 마오쩌뚱, 레오나르도 다빈치...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는 이들의 공통점은 정말 미친 듯이 책을 읽었으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사람이라는 것. 체 게바라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천식 천식과 게릴라라니! 전혀 화합할 수 없는 두 단어는 체 게바라의 삶에서 공존하면서 그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는 평생 천식으로 고통 받았으나 굴복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길로 나아갔다. 나는 인간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에 그 육체가 부여하는 한계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뛰어난 소수가 있고, 체 게바라는 그 중 하나이다. “천식은 체 게바라의 운명과 떼어놓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과도한 활동성과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 세 배로 밀도 높게 살았던 날들, 그리고 그가 럭비 경기장에서 몸을 굴릴 때 조차도 그를 떠나지 않았던 고통들을 모조리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한편으로는 질병이 한 이유가 됐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누구보다도 꽉 찬 시간을 살았다.”(60-61)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 없이 경험하며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되었을까? 아니면 삶의 엄중함을 일찍이 깨닫고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게 된 것일까?

유랑 혁명가 역사상 수많은 혁명가들이 있다. 승리한 혁명가들은 모두 승리와 함께 그 곳에 남았다. 레닌, 마오, 호치민, 가다피, 카스트로... 승리한 혁명을 뒤로 하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떠난 이는 체 게바라 뿐이다. 이것이 체 게바라와 다른 이들을 구별 짓는 가장 특별한 차이이다. 혁명에 뛰어들었던 초창기부터 체 게바라는 스스로를 유랑 혁명가라고 불렀다. 쿠바에서의 영광스러운 직책들을 모두 버리고, 시민권마저 포기하고 그는 벨기에령 콩고로, 볼리비아로 떠났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체 게바라)

군복과 별 달린 베레모 올리브색 군복에 별 달린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의 모습은 수많은 이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누구든 체 게바라를 생각하면 바로 그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체는 게릴라 투쟁의 와중에도, 혁명 승리 후 쿠바의 요직에 있을 때도, 쿠바의 외교 사절로 전 세계를 누빌 때도 늘 한결같은 차림이었다. 늘 같은 차림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일미일까? 먼저, 자신의 차림새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보다는 지금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겠다는 의지. 둘째, 흔들림 없는 하나의 세계가 완성되었다는 뜻도 될 것 같다. 이미 최선을 찾았다는 것, 최선의 삶의 방식을 확립했다는 것이 최선의 차림새를 찾아낸 것으로 외화된 것은 아니었을까. 셋째, 체 게바라는 혁명을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고, 무엇이든에는 자신의 외모를 이용하는 일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는 한결같은 이미지로 언론에 보도되는 자신의 모습이 쿠바 혁명의 진전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흔들림 없이 혁명의 길로 매진하는 이 혁명가의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던가를 생각해 보자. 이게 우연히 얻어진 결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외국인 체 게바라는 외국인이었다.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으나 쿠바인으로, 콩고인으로, 볼리비아인으로 살아갔다. 궁극적으로 그는 한 국가에 귀속되지 않은 존재였다.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설 수 있을까?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의 혁명/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리스 독립 전쟁에는 유럽의 많은 지성들이 참여했다. 시인 바이런도 참전했었다. 스페인 내전에는 유럽의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이 참전했다. 헤밍웨이,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었던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우리에게 국경을 뛰어넘은 연대가 낯선 것은 한국/아시아에서의 연대 경험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우리는 스스로의 자아를 아시아인으로, 세계인으로 확장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왜일까? 역사적 경험? 언어? 지리적 요소? 이 질문에 답을 찾은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아시아인으로서, 세계인으로서 자아를 확장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남아메리카의 낯선 지명, 인물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먼 곳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시아라고 해서 다른가? 체 게바라가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순방하는 부분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이 아니면 철저히 무지해진다는 점에서도 나/우리의 한계가 드러난다. 나는 왜 아시아인이면서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에 더 친숙한가? 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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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잘하는 교사,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유창하고 열정적인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교사.
학생들은 숨죽이며 교사의 강의를 경청하고,
질문을 하면 답이 쏟아지고,
질문 없나요, 물으면 여기 저기서 손이 올라가는,
아, 교사의 꿈!

그러나 핀켈은 <침묵으로 가르치기>에서 이 꿈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핀켈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교육이란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인 것이지요.

좋은 교사는 배움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진정한 배움은 배우는 이의 주체적인 노력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학생을 주체적으로 배움의 장으로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배움의 길로 안내하는 잘 조직된 지도 계획과 인내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켜보고 도와주는 교사야 말로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침묵으로 가르치기'가 무엇인지 짐작해볼 수 있도록 이 책의 목차를 소개해 볼께요.

01. 침묵으로 가르치기는 무엇인가
02. 책이 말하게 하라.
03. 학생이 말하게 하라.
04. 교사와 학생이 함께 탐구하라.
05. 친숙한 글쓰기로 말하라.
06. 학습을 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하라.
07. 민주적인 선생님이 되어라.
08. 동료와 함께 가르쳐라.
09. 경험을 제공하고 생각을 불러일으켜라.

핀켈은 이 책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수업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특히 우화를 이용해 수업하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화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짧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완벽한 상황에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우화에서 전하는 의미는 심오해 보인다. 이야기 이면에 소중한 지혜나 지식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뜻이 다소 모호하다. 진귀한 보물을 쉽게 꺼내 보여주지 않는다. (~)우화에는 단순한 줄거리를 넘어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우화를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우화를 들으면 '무엇을 전하려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명확히 해석되지 않는 모호한 이야기는 진지한 성찰의 자양분이 된다. 뜻이 모호해서 오히려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런 작은 우화를 수업에서 탐구할 문제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을 정신 없이 읽으면서 제 스스로에게 몇 가지 과제를 부여해 보았습니다.

<1> '책이 말하게 하라'를 실천할 수 있는 작품 목록을 만들어보자.
핀켈은 여기서 <일리아드> <오이디푸스왕> <펠레폰네소스 전쟁>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줄리어스 시저> <빌러비드>(토니 모리슨의 소설입니다.)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낯설지요? 우리에게 적합한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학생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전적인 저작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읽기 수준에 적합하고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도 맞는 책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일단 <장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권을 가지고 '목록'이라고 할 수는 없죠. 목록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고전을 읽어보려합니다.

<2> '친숙한 글쓰기로 말하라'에서 제시된 감상 편지 쓰기를 실천해 보자. 학생들의 글을 읽고 빨간펜 선생님만 하지 말고 감상 편지를 써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 수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는 방법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글을 쓰게 한다면 진지하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는 생각은 이전부터 해오고 있었습니다.

<3> 세미나를 할 때, 그냥 줄거리를 요약하고 감상을 나누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개념 연구 수업을 해보자.
부록에 실린 <침묵으로 가르치기에 관한 개념 연구>라는 개념연구 수업 설계를 보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연구해야 '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 생각했지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제들이지만, 일단 이런 것들을 '방향'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대목 하나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그냥 읽지 마시고, 텍스트에서 시키는 그대로 해보세요. 꼭이요.

"종이와 연필을 준비한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아래 질문에 답을 적어보자. 학창시절 경험만 떠올리지 말고 인생 전반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답한다.

지난온 삶을 돌이켜보고 가장 중요한 지식을 배운 경험 두세 가지를 떠올려 보자. 이를테면 살면서 오래도록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배움의 순간이나 사건을 적는다.

한 가지만 떠올라도 종이에 적는다. 여기서 잠깐! 반드시 책을 내려놓고 답을 적어야 한다. 몇 분만 시간을 내면 된다. 답을 다 적었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한 가지든 두 가지든 세 가지든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배움의 순간이나 사건을 적었으면 적은 사례마다 아래 여섯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1. 교실에서 일어난 일인가?
2.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가?
3. 배움의 경험을 얻는데 교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4. 배움의 경험을 얻는데 교사와 유사한 인물(예: 코치, 성직자, 학교 상담사, 무대감독)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5. 3번이나 4번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면 교사나 그 인물이 실제 배움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6. 전체적으로 배움을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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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심리학 -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
토니 험프리스 지음, 안기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8년만에 학교를 옮기고 나니 다시 서툴고 불안한 초보의 마음이 됩니다.
그냥 장소만 바꾸어 수평이동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울의 인문계 공립학교는 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나봅니다.

교육, 가르치는 일, 배움을 돕는 일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요즘 읽는 책들도 주로 그 쪽으로 집중됩니다. 아직 이렇다하게 대화를 나눌 벗들을 찾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책 읽고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빈곤한 사교 생활을 풍성한 독서가 치유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한 치유'라는 부제가 붙은 "선생님의 심리학"을 읽었습니다. 글쓴이는 토니 험프리스.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다른 직장인들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네요. 직업성 스트레스는 요구와 통제가 변수인데, 요구 수준이 높으면서 통제가 낮은 직업(예를 들어 항공 교통 관제관)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교직 또한 계속해서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있는 직업이라고 할 수 있다는군요. 그러니까 요즘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우리 직업에 종사하는 한 당여한 것이라는...

토니 험프리스가 제시한 처방은 '자부심'입니다.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부심을 갖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관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가치 부여'와 '축하'를 생각과 행동에 주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에 대한 가치부여와 축하는 살아가면서 매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매일, 매시간 실패한 듯한 느낌으로 교실을 빠져 나오면서 어떻게 가치부여와 축하를 할 수 있을까요? 일단 험프리스가 강조한 대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마음과 행동을 꽉 채워보겠다고 '결심'한다고 해도 눈 앞에 보이는 실패가 있는데 어떻게 그걸 외면하고 자부심을 택하겠어요?

그래서 이 책에서는 교사가 교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해법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법의 핵심 역시 '자부심'입니다. 학생들을 자부심을 높여주는 것이 교사와 학생이 윈윈할 수 있는 길인 것이지요.

당연한 얘기인데, 그래서 어쩌라고? 토니 험프리스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교실의 학생을 통제하는 것은 선생님이 할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은 내가 선생님으로서 배우고 실천했던 것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훈육 과정을 보다 주의 깊에 살펴보면, 어느 한 사람이 타인을 통제하는 데서 갈등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른을 통제하려 하거나 요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한다면 어른은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아이들과 청소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학급 운영의 기본 원칙은, 학급의 구성원인 학생과 선생님이 각자 자기 통제의 책임을 지는 것이다. 학생 통제는 선생님의 일이 아니라 학생의 책임으로 학생은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생님 또한 자신을 통제할 책임이 있다."(171-172)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저에게 특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처벌의 긍정적인 사용에 대한 대목이었습니다.

1. 가능하다면, 처벌의 사용은 무책임한 행동에 대한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한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 시간을 낭비한 학생에 대한 자연스러운 처벌은 학생에게서 휴식시간이나 여가 시간을 뺏는 것이다. 성질을 부리며 교실에서 물건을 집어 던진 학생에게 자연스런 처벌은 교실 정리를 시키는 것이다.

2. 처벌은 예측 가능하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는 학생이 책임이 무엇인지 알고, 책임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처벌이 따른다는 점을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어떤 선생님이 관련되었든, 어떤 학생이 무책임한 행동을 했든 같은 처벌이 가해진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3. 처벌은 언제나 공정하고 적절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무책임한 행동에 적합해야 한다.

4. 처벌은 비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 학생의 행동에 화를 내거나 선생님 자신의 투자에서 비롯된 처벌을 부과하는 선생님은 학생에게 효과적인 선생님이 아니다.

5. 처벌은 학생에게 기대하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이 보다 책임 있게 행동하고 자기 통제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6. 선생님이 부적응 행동의 심리적 이유를 파악하고, 선생님의 이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면서 처벌을 부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처벌을 보류해야 한다.

7. 처벌은 긍정적이고 차분하게 부과되어야 학생이 선생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8. 처벌로 별도의 숙제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 학습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경험이 되어야 한다.

9. 처벌을 부과할 때는 항상 학생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191-192)

'지금 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 '나는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지?'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겨날 때 '당연한 원칙'을 기준으로 스스로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책은 그 되돌아보기에 많은 도움을 주네요. 혹시 지금 학교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면,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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