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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3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이종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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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톰 아저씨의 오두막>1851년에 신문 연재를 시작하여 1852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소설이다. 19세기 후반에 미국과 유럽에서 300만부 이상 판매되는 대기록을 세워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반열에 올랐다. 사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명명된 책들이 너무 많아서 이 말이 그냥 수사학적 의미가 아닌가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일단 19세기 후반 시점에서는 그 정도로 인기 있던 책이라고 이해하자. 지난 160년간 32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진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펜으로 슥슥 그린 듯한 분위기의 삽화가 실린 동화책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었다. 굉장히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 아이를 안고 도망치던 흑인 여성 노예가 반쯤 얼은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얼음을 징검다리 삼아 디디며 강 건너로 도망치는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40년도 넘는 세월이 흘러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북하우스)를 읽다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브라우닝은 편지에 이런 말을 썼다고 한다.

 

스토 부인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읽어야 합니다. 스토 부인의 책은 이 시대의 기호이고 내적 힘도 상당하지요. 나는 한 여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성공이 기쁩니다. , 당신은 여자가 노예제도 같은 문제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이제 펜을 들지 않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노예제도에 굴종해서 첩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828. 재인용)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미국 노예 해방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건 그냥 동화책일 뿐이잖아? 이 정도 평가를 받기에는 너무 소품아닌가? 이런 의아함을 안고 계속 책을 읽어나가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검색을 한 결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번역본으로 8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서둘러 책을 주문하고(그렇다. 또 샀다. 이번 벽돌책 프로젝트는 내내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분량이 상당하니 꽤나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은 나의 착각. 베스트셀러는 괜히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3일반에 훌쩍 다 읽고 말았다.

 

2/ 누구든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 소설을 따라가는 여정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지만, 톰 아저씨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톰 아저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김 없이 반듯한 사람이라 이런 사람을 원탑 주인공 삼아 소설을 쓰면 정의는 승리한다, 무조건!’ 같은 평면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세기 중반 노예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썩 괜찮은 노예주, 그런대로 괜찮은 노예주, 악독한 노예주, 더 악독한 노예주, 노예상인, 노예상, 똑똑한 도망 노예, 도망 노예를 돕는 사람들, 백인 남편의 횡포에 고통 받는 백인 여성, 노예제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북부 여성 등등.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이 많은 사람들이 가로 세로로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그당시 사회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이 소설에는 괜찮은 노예주, 양심적인 백인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스토가 이 소설을 노예제도 폐지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집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소설을 통해 사회 문제를 고발하면서 공감과 지지를 얻어내려면 당신들 모두 나빠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세상에는 당신처럼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잘못된 사회 제도가 당신처럼 좋은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고 있어요, 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 싸움의 기본은 내 편을 많이 만드는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스토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스토가 공략한 지점은 셸비 부부나 세인트클레어 같은 노예 주인이 아무리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는 것이었다. 톰 아저씨의 첫 번째 주인인 셸비 씨는 노예들에게 매우 관대한 사람이고, 톰 아저씨를 비롯한 그 집의 노예들은 매우 행복한’(... 상대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셸비 씨는 재정난이 닥치자 톰 아저씨를 노예 상인에게 판다. 톰 아저씨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도,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큰 고려 요소가 되지 못한다. 셸비 씨 역시 이 상황이 괴롭지만, 그렇다고 재정난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다.

톰 아저씨의 두 번째 주인인 세인트클레어 역시 좋은 주인이다. 그는 딸을 구해준 톰 아저씨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원래 천성이 자유주의적인지라 톰 아저씨에게 너그러운 주인이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죽는다. 남편이 평소에 노예들에게 관대했던 것이 계속 불만이었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자마자 톰 아저씨를 팔아 치운다. 톰 아저씨는 악독하기로 소문난 리그리에게 팔린다.

스토는 좋은 마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신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량한 노예주가 맞아요, 이렇게 독자의 자존감을 높여준 다음, 그래도 우리게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그럴 때 당신의 노예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답니다, 라고 설득한다. 독자들은 스토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결국은 제도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선 셸비 부인. 그의 남편은 우유부단하고 선을 행하는데 소극적이지만 셸비 부인은 그보다 훨씬 결단력 있다. 셸비 부인은 남편이 사업 부진을 이유로 톰을 노예 상인에게 팔 때에도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남편에게 올바른 행동을 촉구한다. 결정권이 남편에게 있어 톰을 팔게 되지만, 결국 남편이 죽은 후 문제를 바로 잡는 것도 셸비 부인이다.

다음으로는 악덕 노예주 리그리의 노예이자 첩인 캐시. 캐시는 자신을 성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어린 두 아이를 백인 노예주에게 팔아버린 남편 때문에 미친여자이다. 캐시는 셋째 아이를 스스로 살해함으로써 리그리로부터 아이를 구한다.’ 캐시의 탈출장면은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박진감 있고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캐시는 어디로 도망갔을까? 대대적인 탈출쇼를 연출하고 다들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캐시가 몸을 숨기는 곳은 바로 자기 집의 다락방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원리를 영리하게 활용한 것이다.

그는 충동에 이끌려 섣부르게 탈출을 감행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숨어 있는 동안 먹을 양식과 양초, 시간을 보낼 책까지 차근차근 준비한다. 누군들 목숨 걸고 도망친 여자가 자기 잡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겠는가. 게다가 다락방에 유령(리그리가 학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이 있다고 굳게 믿는 리그리는 다락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락방은 수색 장소에서 처음부터 제외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캐시의 탈주 장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스토는 여자들이 자살하거나 남을 살해하지 않고도 조상의 저택에 갇히지 않을 방법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나 버사 그랜트, 도러시아 캐저반이나 로저먼드 리드게이트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마지막 장을 지배한 미친 노예는 더 성공적으로 여성적 보복을 자행한다. 엘리엇이 <미들마치>에서 분노를 넘어서고, 초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남성 역할의 전유를 넘어서 작업하고 있듯, 스토 역시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해방의 고유한 여성적 형태를 그린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p.911)

 

캐시는 홀로 도망가지 않고 리그리의 다음 첩이 될 것이 분명한 노예 소녀 에멀린과 함께 탈출하는데, 탈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리그리의 돈을 훔치는 캐시를 보고 기겁을 하는 에멀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몸과 마음을 훔치는 자들이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이 돈 한 푼 한 푼이 다 훔친 거야. 불쌍하고, 굶주리고, 땀 흘리다가 끝내는 죽어버린 사람들로부터 훔친 거라고. 자기 배를 불리려고! 그자가 누구한테다 감히 훔치는 것을 말해!” 343

 

4/ 이 소설은 당시 사회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은 노예제도만 아님을 지적한다. 노동자는 자유로운존재이지만 실상 물질적 토대를 갖지 못한 노동자의 자유란 실은 굶어죽을 자유에 다른 아니라는 것을, 살아남기 위해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질서 또한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설파한다.

 

영국 노동자들은 팔리거나 교환되거나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거나 매질을 당하지 않는데.”

마치 고용주에게 팔린 것처럼 고용주의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노예의 주인은 말 안 듣는 노예를 죽도록 매질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해고하여 굶어 죽게 할 수 있죠. 가족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게 더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 아이가 다른 데로 팔려가는 것과 아이가 집에 있으면서 굶어 죽는 것이.” 32

 

최근 연쇄적으로 보도되는 교사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정말 자유로운가? 매일의 밥벌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노동과 그에 수반되는 모멸을 견딘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생각하는 순간, 나의 비천한 처지를 자각하게 되니까.

 

자유가 국가에게 그토록 영광스럽고 귀중한 것이라면, 한 인간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국가의 자유란 것은 결국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가? 저기 앉아 있는, 넓은 가슴 위에 팔짱을 낀, 뺨에 옅게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는, 눈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젊은 남자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조지 해리스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여러분의 선조들에게 자유란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기 위한 권리였다. 조지 해리스에게 자유란 사람이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한 권리였다. 또한 가슴에 안긴 아내를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였고, 무법적인 폭력으로부터 아내를 지킬 수 있는 권리였으며, 타인의 의지에 구속되지 않을 권리였다. (2304)

 

자꾸 외면하려 하지만 실은 나의 본질적인 존재 방식은 임금 노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나는 과연 타인의 의지에 구속되지 않을 권리를 온전하게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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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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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열세 명의 소녀들이 사라졌다. 사라진 소녀의 행방을 추적하던 아버지도 사라졌다. 아무도 진상을 규명해주지 않으니, 직접 진실을 밝히겠다고 나선 소녀 환이가 <사라진 소녀들의 숲>의 주인공이다. 목숨을 건 추적 끝에 마주한 진실은 소녀가 짐작한 것보다 더 어둡고 섬뜩하다. 몇명의 소녀를 구해내는데 성공했으니 구하지 못한 이들이 더 많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이것으로 끝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괜찮다. 어쨌든 환이는 성큼 한 걸음을 나아갔으니까. 환이는 더 이상 규방에 갇혀서 '착한 규수'가 되고 시집을 가는 삶에 속박되지 않을 것이니까. 서먹했던 자매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손을 맞잡았으니까. 공포와 절망에 지지 않았고,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의심을 지워냈으니까. 

<사라진 소녀들의 숲>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유배지 제주를 배경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까지 이어져 온 '공녀 제도'를 모티브로 한 판타지 소설. 작가는 판타지 속에서 현실의 15세기 소녀들은 꿈도 꾸지 못한 모험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나는 이 자매들이 장화홍련처럼 규방에 갇혀 살해당하지 않고 씩씩하게 길을 떠나고 살아남았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 


한국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란 작가가 영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작품을 읽는 일에는 색다른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낯설게 보기.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그냥 지나가버릴 일들이,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는 설명이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읽기가 새롭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청록색 물이 짙은 푸른색으로 변했고, 해녀들이 깊은 바다에서 올라오면서 휘파람 같은 소리를 냈다. 수 세대에 걸쳐 여인들에게서 여인들에게로 전해진 호흡 기법이다 빈곤과 굶주림의 섬, 왕이 가장 내치고 싶은 신하를 유배 보는 이 섬에서 해녀들은 거친 물살에 굴하지 않고 맨몸으로 잠수하며 생존법을 터득했다." (196쪽)


제주 해녀들의 숨비소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낯설게 보기를 경험할 수 있는 대목들이 도처에 있으니 그걸 찾아보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책으로 독서모임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활용해 보고 싶다.


1. <사라진 소녀들의 숲>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든다면 환이와 매월의 역할을 어느 배우에게 맡기고 싶나요? 꼭 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에피소드나 대사가 있나요? 왜 그렇게 생각했나요?

2. 관계가 소원해진 가족이 있나요? 왜 그렇게 되었나요? 관계의 회복을 원한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3. 내 가족만 괜찮으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4. 한국계 작가가 한국적인 모티브를 가지고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쓴 작품들이 속속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도서를 지원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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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잘하는 교사,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유창하고 열정적인 강의로 학생들을 사로잡는 교사.
학생들은 숨죽이며 교사의 강의를 경청하고,
질문을 하면 답이 쏟아지고,
질문 없나요, 물으면 여기 저기서 손이 올라가는,
아, 교사의 꿈!

그러나 핀켈은 <침묵으로 가르치기>에서 이 꿈과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일까요? 핀켈의 정의에 따르면 좋은 교육이란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사의 '가르침'이 아니라 학생의 '배움'인 것이지요.

좋은 교사는 배움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진정한 배움은 배우는 이의 주체적인 노력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학생을 주체적으로 배움의 장으로 나서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한걸음 뒤로 물러설 필요가 있습니다.
배움의 길로 안내하는 잘 조직된 지도 계획과 인내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켜보고 도와주는 교사야 말로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침묵으로 가르치기'가 무엇인지 짐작해볼 수 있도록 이 책의 목차를 소개해 볼께요.

01. 침묵으로 가르치기는 무엇인가
02. 책이 말하게 하라.
03. 학생이 말하게 하라.
04. 교사와 학생이 함께 탐구하라.
05. 친숙한 글쓰기로 말하라.
06. 학습을 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하라.
07. 민주적인 선생님이 되어라.
08. 동료와 함께 가르쳐라.
09. 경험을 제공하고 생각을 불러일으켜라.

핀켈은 이 책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수업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특히 우화를 이용해 수업하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우화에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짧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완벽한 상황에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우화에서 전하는 의미는 심오해 보인다. 이야기 이면에 소중한 지혜나 지식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셋째, 뜻이 다소 모호하다. 진귀한 보물을 쉽게 꺼내 보여주지 않는다. (~)우화에는 단순한 줄거리를 넘어서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우화를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우화를 들으면 '무엇을 전하려하는지'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명확히 해석되지 않는 모호한 이야기는 진지한 성찰의 자양분이 된다. 뜻이 모호해서 오히려 풍부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따라서 이런 작은 우화를 수업에서 탐구할 문제로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을 정신 없이 읽으면서 제 스스로에게 몇 가지 과제를 부여해 보았습니다.

<1> '책이 말하게 하라'를 실천할 수 있는 작품 목록을 만들어보자.
핀켈은 여기서 <일리아드> <오이디푸스왕> <펠레폰네소스 전쟁> <소크라테스의 대화편> <줄리어스 시저> <빌러비드>(토니 모리슨의 소설입니다.)를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낯설지요? 우리에게 적합한 작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학생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고전적인 저작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읽기 수준에 적합하고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도 맞는 책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일단 <장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권을 가지고 '목록'이라고 할 수는 없죠. 목록을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고전을 읽어보려합니다.

<2> '친숙한 글쓰기로 말하라'에서 제시된 감상 편지 쓰기를 실천해 보자. 학생들의 글을 읽고 빨간펜 선생님만 하지 말고 감상 편지를 써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 수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오는 방법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글을 쓰게 한다면 진지하게 지도해 주어야 한다, 는 생각은 이전부터 해오고 있었습니다.

<3> 세미나를 할 때, 그냥 줄거리를 요약하고 감상을 나누는 수준에 머물지 말고 개념 연구 수업을 해보자.
부록에 실린 <침묵으로 가르치기에 관한 개념 연구>라는 개념연구 수업 설계를 보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치밀하게 연구해야 '배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구나 생각했지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과제들이지만, 일단 이런 것들을 '방향'으로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대목 하나 소개합니다. 여러분도 그냥 읽지 마시고, 텍스트에서 시키는 그대로 해보세요. 꼭이요.

"종이와 연필을 준비한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운다. 아래 질문에 답을 적어보자. 학창시절 경험만 떠올리지 말고 인생 전반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답한다.

지난온 삶을 돌이켜보고 가장 중요한 지식을 배운 경험 두세 가지를 떠올려 보자. 이를테면 살면서 오래도록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배움의 순간이나 사건을 적는다.

한 가지만 떠올라도 종이에 적는다. 여기서 잠깐! 반드시 책을 내려놓고 답을 적어야 한다. 몇 분만 시간을 내면 된다. 답을 다 적었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한 가지든 두 가지든 세 가지든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배움의 순간이나 사건을 적었으면 적은 사례마다 아래 여섯가지 질문에 답해 본다.
1. 교실에서 일어난 일인가?
2.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가?
3. 배움의 경험을 얻는데 교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4. 배움의 경험을 얻는데 교사와 유사한 인물(예: 코치, 성직자, 학교 상담사, 무대감독)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
5. 3번이나 4번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면 교사나 그 인물이 실제 배움에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6. 전체적으로 배움을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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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사이 전사 레마솔라이]라는 책을 보면 마사이 족 소년 레마솔라이가 학교 교육을 받는 과정이 나온다. 레마솔라이는 당시 케냐 정부가 추진한 ‘한 가족 한 아이 학교 보내기’ 정책에 따라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책은 학교 교육이, 가난과 무지로 점철된 레마솔라이의 삶을 어떻게 바람직하게 바꾸어 놓았는가를 보여주고 있지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레마솔라이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원래는 장남인 큰 형이 학교에 들어가야 하지만, 레마솔라이의 큰 형은 “학교에 가는 것은 사자와 홀로 맞서 싸우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일”이라며 학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동생인 레마솔라이가 대신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근대화의 시스템을 경험해 보지 않은 채 수렵과 이동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마사이 족 소년에게 하루 종일 건물 안에 갇혀서 글자와 셈을 배우는 것은 사자와 홀로 맞서 싸우는 것보다 두려운 일이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두려움을 이유로 학교를 거부한 레마솔라이의 형은 어쩌면 학교의 태생과 기능에 대해 본능적으로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겸허하고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직관력이 발동된 것 아닐까? 산업 사회의 도래와 함께 등장한 근대적 학교는 산업 사회에 보다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을 키우는 데 온 관심을 집중한다. 학생들은 정해진 시간에 등교해서 정해진 자리에 앉아 정해진 공부를 한다. 학교는 온전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정해진 시간이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는 산업 사회의 일터의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이때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신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일생 수천만 켤레의 신발의 일부를 만들어내지만, 어떤 사람도 살면서 수천만 켤레의 신발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게토는 산업 사회의 산물인 학교 제도에서의 탈주를 모색하는 사람이다. 그의 실천에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그의 수업이 세련되고, 그의 강의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학교 제도 그 자체의 본성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감행했다는 점 때문이다. 게토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학교 밖에서의 배움을 허락한다. 사실 이것은 허락하고 말고의 성질이 아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순간에 모든 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인간의 본성, 이 배움의 과정에서 조금 더 좋은 나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면 게토가 한 일은 그 본성을 충실히 실현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 본성을 억압하는 장벽을 무너트리고 교실 밖에서의 배움을 일구어내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문제제기를 한 장벽이 우리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장벽과 정확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산업 사회에서 쓸모 있게 사용될 수 있도록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사회적 희소가치의 불공정한 배분을 공정한 것으로 위장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동력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인가? 그것은 신체 건강, 국어, 산수, 기술, 영어, 컴퓨터 등 노동 능력이 좋아야 하고, 성실성, 책임감, 신뢰성,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 자세의 측면이 좋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학교가 추구하는 것과 일치한다. 노동 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자격증, 서열화 된 성적으로 측정되고, 노동 자세는 개근상, 생활 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인간을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개조해 가는 과정은 매우 강압적으로 진행되는데, 대부분의 학생은 이 과정에서 자기 존중감을 배우기보다는 열등감과 좌절감, 불안감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교육은 열등감, 좌절감, 불안감과 만날 때 일단 뒷자리로 밀려난다.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기 때문이다.

  게토의 실천을 통해 같은 교사인 내가 배운 점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을 정확히 깨달을 것, 깨달음을 위해 내가 하는 일을 늘 진지하게 성찰하고 또 성찰할 것. 거대하고 힘센 시스템 앞에서 좌절하고 포기하지 말 것, 좌절의 정신적 상흔을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를 ‘강자와 동일시’하지 말 것.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마땅히 가야 할 방향으로 반걸음이라고 걸어갈 것. 그리하여 조금씩 조금씩 교육의 영토를 넓혀 나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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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이아비 추장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나에게는 그 익숙하고 당연한 세계가 학교였다. 나는 학교 교육의 적자(嫡子)이다. 초등학교 때에는 빠듯한 가정 형편 덕분에(그 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체의 사교육 없이 오직 학교를 배움의 전부로 알고 살았으며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시작된 5공화국의 “과외 금지와 교복 폐지” 정책 덕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배움 세계의 전부는 학교였다. 나에게 ‘교육=학교’이다.

이미 학교가 교육을 독점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중 많은 수가 매일 4시간 이상을 학원에 다닌다. 고민거리가 있을 때 친구 다음으로 학원 선생님을 찾는다. 학교 교사는 60만, 학교 밖 교사는 200만이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부분집합이다.

그가 빠빠라기의 당연한 세계에 질문을 던졌던 길을 따라가면, ‘학교’의 이상스러운 진실과 맞부딪힌다. 학교 교사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학교가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지난 100년 정도의 시기를 학교 교육이 제도적 우위를 점했다고 해서 그 우위가 계속될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학교 교사들은 자신들만이 이 세상 배움을 주도하는 유일한 존재라 믿는다. 이때 학교 밖 교사들의 존재는 학교 교사들의 믿음을 뒤흔든다. 익숙한 믿음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보통의 경우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그러므로 학교 교사들은 생각해 버린다. 학교 밖 교사들은 교사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때로 이 ‘자질 부족론’을 위협할만한 증거 사례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개념 정리나 문제 풀이에 놀랄 만큼 능숙하거나, 개그맨이 울고 갈 만큼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학교 밖 교사들을 수시로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한다. ‘그래도 학교는 전인교육이지. 진정한 교육은 학교에 있어.’ 아이들과 수시로 노래방에 놀러갈 만큼 친하게 지내고, 수시로 인생 상담을 해주고, 방학을 맞으면 함께 야유회도 가는 학교 밖 교사들을 보면서도 생각한다. ‘손님 떨어지면 안 되니까. 장사 속이라고! 학교도 학생 수 적고 돈만 많이 주면 그런 걸 왜 못하겠어?’

엄청난 수입을 올리는 것은 그들 중 정말 소수이고, 대부분은 박봉과 해고 위험에 상시적으로 놓여 있는 비정규직 교육노동자라는 엄연한 사실은 가볍게 외면해 버린다. 물론 돈 벌이, 장사 속으로 교육의 본연을 흐리는 학원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 교사들 역시 돈 벌이를 위해 오늘도 칠판 앞에서 분필을 잡는 것 아닌가? 그들의 돈벌이는 장사 속이고 나의 돈벌이는 숭고한 사명으로 파악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믿는 현실 인식은 스스로의 성장에 큰 장애가 된다. 학교 교사들의 수업에 큰 진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평가를 받으라는 국민적 압력 앞에 놓이게 된 것은, 이 왜곡된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바 크다. 익숙한 믿음의 세계가 흔들리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고, 학교 교사들은 지금껏 이 불유쾌한 일을 참고 성장해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놓이지 않았었다. 학교는 늘 옳고, 학교는 늘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봄날은 갔다.’

투이아비가 빠빠라기의 세계를 바라보듯, 학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변하지 못할 것은 없고, 학교의 그 어느 하나도 영원불멸할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학교를 낯설게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보이리라. 학교는 학교 밖에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학교 사회과가 지난 10여년 통합 논쟁을 하는 사이에 이들은 이미 통합 교육을 하고 있고, 학교가 토론 수업의 필요성만 공허하게 외치는 동안 이들은 이미 토론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추구하는 바가 영리라고 해서 사설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성과 전체를 평가절하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있는 곳을 낯설게 바라보기, 내가 알고 있던 세계의 바깥을 바라보기, 그리하여 나의 세계를 확장하기. - 오늘 변화를 요구받는 학교 교사가 선택해야 할 전략이 이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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