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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아저씨의 오두막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3
해리엣 비처 스토 지음, 이종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1/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1851년에 신문 연재를 시작하여 1852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소설이다. 19세기 후반에 미국과 유럽에서 300만부 이상 판매되는 대기록을 세워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반열에 올랐다. 사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명명된 책들이 너무 많아서 이 말이 그냥 수사학적 의미가 아닌가 의심이 가기는 하지만, 일단 19세기 후반 시점에서는 그 정도로 인기 있던 책이라고 이해하자. 지난 160년간 32개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퍼진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펜으로 슥슥 그린 듯한 분위기의 삽화가 실린 동화책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었다. 굉장히 오래 전에 읽었는데도 아이를 안고 도망치던 흑인 여성 노예가 반쯤 얼은 강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얼음을 징검다리 삼아 디디며 강 건너로 도망치는 장면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40년도 넘는 세월이 흘러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북하우스)를 읽다가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브라우닝은 편지에 이런 말을 썼다고 한다.
스토 부인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읽어야 합니다. 스토 부인의 책은 이 시대의 기호이고 내적 힘도 상당하지요. 나는 한 여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녀의 성공이 기쁩니다. 아, 당신은 여자가 노예제도 같은 문제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이제 펜을 들지 않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노예제도에 굴종해서 첩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828. 재인용)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미국 노예 해방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건 그냥 동화책일 뿐이잖아? 이 정도 평가를 받기에는 너무 ‘소품’ 아닌가? 이런 의아함을 안고 계속 책을 읽어나가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검색을 한 결과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번역본으로 8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나는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서둘러 책을 주문하고(그렇다. 또 샀다. 이번 벽돌책 프로젝트는 내내 이렇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분량이 상당하니 꽤나 오래 걸릴 것이라는 것은 나의 착각. 베스트셀러는 괜히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3일반에 훌쩍 다 읽고 말았다.
2/ 누구든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 소설을 따라가는 여정일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지만, 톰 아저씨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톰 아저씨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구김 없이 반듯한 사람이라 이런 사람을 원탑 주인공 삼아 소설을 쓰면 ‘정의는 승리한다, 무조건!’ 같은 평면적인 이야기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19세기 중반 노예제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썩 괜찮은 노예주, 그런대로 괜찮은 노예주, 악독한 노예주, 더 악독한 노예주, 노예상인, 노예상, 똑똑한 도망 노예, 도망 노예를 돕는 사람들, 백인 남편의 횡포에 고통 받는 백인 여성, 노예제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북부 여성 등등.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이 많은 사람들이 가로 세로로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그당시 사회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이 소설에는 괜찮은 노예주, 양심적인 백인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현실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스토가 이 소설을 ‘노예제도 폐지’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집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소설을 통해 사회 문제를 고발하면서 공감과 지지를 얻어내려면 ‘당신들 모두 나빠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세상에는 ‘당신처럼’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잘못된 사회 제도가 당신처럼 좋은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행동하는 것을 막고 있어요, 하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 싸움의 기본은 ‘내 편’을 많이 만드는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스토는 영리한 선택을 했다.
스토가 공략한 지점은 셸비 부부나 세인트클레어 같은 노예 주인이 아무리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는 것이었다. 톰 아저씨의 첫 번째 주인인 셸비 씨는 노예들에게 매우 관대한 사람이고, 톰 아저씨를 비롯한 그 집의 노예들은 매우 ‘행복한’(음... 상대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셸비 씨는 재정난이 닥치자 톰 아저씨를 노예 상인에게 판다. 톰 아저씨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것도, 평생을 살아온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도 큰 고려 요소가 되지 못한다. 셸비 씨 역시 이 상황이 괴롭지만, 그렇다고 재정난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다.
톰 아저씨의 두 번째 주인인 세인트클레어 역시 좋은 주인이다. 그는 딸을 구해준 톰 아저씨에 대해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원래 천성이 자유주의적인지라 톰 아저씨에게 너그러운 주인이다. 하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죽는다. 남편이 평소에 노예들에게 관대했던 것이 계속 불만이었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죽자마자 톰 아저씨를 팔아 치운다. 톰 아저씨는 악독하기로 소문난 리그리에게 팔린다.
스토는 ‘좋은 마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신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량한 노예주가 맞아요, 이렇게 독자의 자존감을 높여준 다음, 그래도 우리게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고, 그럴 때 당신의 노예들은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답니다, 라고 설득한다. 독자들은 스토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결국은 ‘제도’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3/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한다.
우선 셸비 부인. 그의 남편은 우유부단하고 선을 행하는데 소극적이지만 셸비 부인은 그보다 훨씬 결단력 있다. 셸비 부인은 남편이 사업 부진을 이유로 톰을 노예 상인에게 팔 때에도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며 남편에게 올바른 행동을 촉구한다. 결정권이 남편에게 있어 톰을 팔게 되지만, 결국 남편이 죽은 후 문제를 바로 잡는 것도 셸비 부인이다.
다음으로는 악덕 노예주 리그리의 노예이자 첩인 캐시. 캐시는 자신을 성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어린 두 아이를 백인 노예주에게 팔아버린 남편 때문에 ‘미친’ 여자이다. 캐시는 셋째 아이를 스스로 살해함으로써 리그리로부터 아이를 ‘구한다.’ 캐시의 탈출장면은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박진감 있고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캐시는 어디로 도망갔을까? 대대적인 탈출쇼를 연출하고 다들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캐시가 몸을 숨기는 곳은 바로 자기 집의 다락방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원리를 영리하게 활용한 것이다.
그는 충동에 이끌려 섣부르게 탈출을 감행하지 않는다. 신중하게 계획하고 숨어 있는 동안 먹을 양식과 양초, 시간을 보낼 책까지 차근차근 준비한다. 누군들 목숨 걸고 도망친 여자가 자기 잡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겠는가. 게다가 다락방에 유령(리그리가 학대하다 죽음에 이르게 한 여자)이 있다고 굳게 믿는 리그리는 다락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락방은 수색 장소에서 처음부터 제외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캐시의 탈주 장면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스토는 여자들이 자살하거나 남을 살해하지 않고도 조상의 저택에 갇히지 않을 방법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 버사 메이슨 로체스터나 버사 그랜트, 도러시아 캐저반이나 로저먼드 리드게이트보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마지막 장을 지배한 미친 노예는 더 성공적으로 여성적 보복을 자행한다. 엘리엇이 <미들마치>에서 분노를 넘어서고, 초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남성 역할의 전유를 넘어서 작업하고 있듯, 스토 역시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해방의 고유한 여성적 형태를 그린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p.911)
캐시는 홀로 도망가지 않고 리그리의 다음 첩이 될 것이 분명한 노예 소녀 에멀린과 함께 탈출하는데, 탈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리그리의 돈을 훔치는 캐시를 보고 기겁을 하는 에멀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몸과 마음을 훔치는 자들이 우리한테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어. 이 돈 한 푼 한 푼이 다 훔친 거야. 불쌍하고, 굶주리고, 땀 흘리다가 끝내는 죽어버린 사람들로부터 훔친 거라고. 자기 배를 불리려고! 그자가 누구한테다 감히 훔치는 것을 말해!” 343
4/ 이 소설은 당시 사회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은 노예제도만 아님을 지적한다. 노동자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실상 물질적 토대를 갖지 못한 노동자의 자유란 실은 굶어죽을 자유에 다른 아니라는 것을, 살아남기 위해 죽음과 같이 고통스러운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질서 또한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설파한다.
“영국 노동자들은 팔리거나 교환되거나 가족과 떨어져야 한다거나 매질을 당하지 않는데.”
“마치 고용주에게 팔린 것처럼 고용주의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요. 노예의 주인은 말 안 듣는 노예를 죽도록 매질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들은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들을 해고하여 굶어 죽게 할 수 있죠. 가족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게 더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 아이가 다른 데로 팔려가는 것과 아이가 집에 있으면서 굶어 죽는 것이.” 32
최근 연쇄적으로 보도되는 교사 노동자들의 자살 소식을 접하며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정말 자유로운가? 매일의 밥벌이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존의 기반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의 노동과 그에 수반되는 모멸을 견딘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생각하는 순간, 나의 비천한 처지를 자각하게 되니까.
자유가 국가에게 그토록 영광스럽고 귀중한 것이라면, 한 인간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국가의 자유란 것은 결국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가? 저기 앉아 있는, 넓은 가슴 위에 팔짱을 낀, 뺨에 옅게 아프리카의 피가 흐르는, 눈에 검은 불꽃이 타오르는 젊은 남자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조지 해리스에게 자유란 무엇인가? 여러분의 선조들에게 자유란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기 위한 권리였다. 조지 해리스에게 자유란 사람이 짐승이 아닌 사람으로 살기 위한 권리였다. 또한 가슴에 안긴 아내를 아내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였고, 무법적인 폭력으로부터 아내를 지킬 수 있는 권리였으며, 타인의 의지에 구속되지 않을 권리였다. (2권 304)
자꾸 외면하려 하지만 실은 나의 본질적인 존재 방식은 ‘임금 노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수시로 나를 괴롭힌다. 나는 과연 타인의 의지에 구속되지 않을 권리를 온전하게 가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