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반양장) - 제13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96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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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느티나무 아카데미 독서클럽이 종강을 했다. 어제 이번 시즌 마지막 독서클럽이 열렸다. 수능이 바로 다음주라서 교사이거나, 집에 수험생이 있거나, 가족 중에 교사가 있는 분들은 모두 불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그래도 일찍부터 와서 기다려주시는 분들, 감사하다. 아무도 안 오면 간사님이랑 나랑 둘이서 토론해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책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할 얘기도 많았기 때문에 못 오는 아쉬움이 크다고 하셨다는 얘기를 간사님이 전해주신다. 독서클럽이 열리기 직전 오늘의 책인 <유원>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으로 세상에 나온 책인데, 여기에 오늘의 작가상까지. 1993년생 젊은 작가에게 쏠린 이 세상의 기대가 크다. 소설의 주인공 유원이 자기를 구해준 아저씨의 무게가 너무 크다고 느끼는 것처럼, 이 작가가 세상의 기대가 너무 무겁다고 느끼지 말고 씩씩하게 글을 써 가기를 바란다.


2. 우리는 <유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1.이름에 얽힌 이야기. 유원은 바라고 원한다는 뜻의 '원'이 담겨 있는 이름이다. 당신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달라.

-너무 같은 이름이 많다. 이름도 흔하고 성도 흔하다 보니. 지금도 같은 사무실에 같은 이름이 세 명.

-이름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엄청나게 중요하다. 수십년 그 이름으로 호명되면서 이름은 나에게 일정한 세뇌 작용을 할 것이다.


2-2. 유원의 친구 수현과 정현의 캐릭터에 대한 생각을 들려 달라. 수현은 왜 그리 봉사 활동에 열중하고 정현은 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어하는가.

-아버지에 대한 분노, 불만을 건전하게 표출하며 잘 자란 남매

-아버지가 나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해롭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니까.

-유원이 주위의 기대 때문에 힘들 듯이 수현 정현도 힘들었을 것이다.

-정현이 연기하고 싶어하는 인물은 실은 아버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한다. 혹은 이미 거리 두기에 성공했다. 돌에 걸려 넘어진다고 돌을 탓하지 않는다, 는 표현처럼, 아버지를 길가의 돌처럼 생각할 수 있는 거리감을 획득했다. 이미 잘 컸다.


2-3.. 유원은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어 사느라 힘겹다. 유원의 역할과로는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왜 사건 직후 이사를 가지 않았을까?

-이사를 간다고 해결이 되었을까? 오히려 그곳에서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들이 내심을 숨기고 착한 사람을 연기한다. 진심이 아닌 관계는 더 큰 스트레스를 부른다. 서로가 너무 배려하고 서로가 너무 역할에 충실하다. 이것은 유원에게 '너도 역할에 충실하고 배려하라'는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다.


2-4. 마지막 장면은 패러글라이딩 장면이다. 왜 패러글라이딩일까?

-좀 상투적인 엔딩이다. 맞다. 하하하.

-아저씨의 무게로 고통 받아왔으니 중력을 거스르거나 부드럽게 연착륙하는 경험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릴 때 화재를 피해 베란다에서 던져진 것은 타인의 의지였다. 이제 본인의 힘으로 높은 곳에서 지상으로 착지한다.

-언니와의 화해 장면, 상투적이고 뻔하지만 유원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유원은 자신을 짓누르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


2-5.. 주목받는 삶의 고통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아역 배우들,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어려웠던 여러 사례가 있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사회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닐 때도 사회는 그들을 비난한다.

-세월호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건'은 기억해야 하지만 '개인'을 소환하는 일은 멈춰야 한다.


2-6. 유원이 아저씨를 처음으로 거절하자, 아저씨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유원의 인생에서 퇴장한다. 이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저씨가 정말 사라졌을까? 이런 사람은 누군가를 갉아먹어야 살 수 있다. 다시 나타날 것이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그때도 유원이 잘 거절하길 바란다.

-부모는 아저씨를 거절할 수 없었지만 유원은 할 수 있었다. 유원은 성장하는 인물이니까.

-아저씨 같은 캐릭터 의외로 많다.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면서 온갖 민폐를 만들어내지만 겁이 많고 유약하다보니 분명한 거절 앞에서는 빠르게 물러선다. 충돌은 회피한다.

-아저씨 같은 사람은 눈치가 없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 괜찮은 줄 안다. 돌려 말하면 안된다. 유원이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들어요.'라고 분명하게 말해준 것은 확실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다.


3. 재난의 생존자인 유원,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았기에 또 다른 고통을 받는 유원의 이야기를, 또 다른 재난의 시대에 우리가 둘러 앉아 나누고 있으니 각별한 느낌이 생겨난다. 정부 지침에 따라 9시에는 반드시 모임을 끝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야기를 마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년에 다시 모여서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혹시 이것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 책 이야기를 나누는 마지막 기회라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넘실대고 있어서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쉽게 끊을 수도 없다.


4. 책 이야기가 끝났다. 수고하셨다. 건강하시라, 덕담을 나누고 헤어지려는데 누군가가 우리 사진이라도 함께 찍자고 한다. 우리는 모두 모여 사진을 찍었다. 나와 투샷으로 사진을 찍기를 원하는 참가자들과도 차례차례 사진을 찍었다. 애틋한 마음이 된다. 이 책 이야기의 밤을 오래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그나 저나 내년 봄, 우리는 다시 모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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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반려병 - '또 아파?'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도 아무튼 시리즈 35
강이람 지음 / 제철소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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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눈여겨 본 이유는 아무튼 시리즈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아무튼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자기가 사랑하거나 성취했거나 성취 중인 어떤 일들을 가지고 아무튼을 썼다. 말하자면 그 아무튼에는 주체의 적극적인 선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튼, 반려병]이라니. 반려병이라는 말도 낯설지만, 병이란 그냥 나를 찾아온 것이지 내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지 않나.


'아무튼 시리즈'가 표방하는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는 대개 '내가' 좋아서, '내가' 선택한 취미, 관심사,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내 인생을 돌아보면 각종 잔병들이 '나를' 선택해 왔다. 재작년에도 골골거렸는데, 작년에도, 올해도 비슷비슷하게 계속 아팠습니다, 라는 경험치가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혹은 의도해서 만든 능동적인 세계가 아닌, 잔병에 의해 만들어진 수동태의 세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인생의 '아무튼'을 논하자면 이 수동태의 세계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7-8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별로 골골거리지 않고 잘 살아왔던 저자는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에서 각종 잔병들을 달고 사는 사람이 된다. 감기로 죽도록 앓다가 겨우 나을만해졌는데 다시 감기가 심해져서 병원에 갔더니 이 감기는 앞의 감기와 다른 감기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는 식이다. 한 시즌에, 휴지기 없이 두 개의 감기를 연달아 앓는 사람이라니. 감기 뿐이겠나. 치열(치질과 비슷한 질환이라고 한다)에 비염에, 위장장애에, 변비에, 근골격계 질환에,... 여기에 일일이 다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병들을 달고 산다. 어느 하나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은 없지만,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고통과 불편을 수반하는 병들이다.


이렇게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간다면 그 병들은 어떤 식으로는 나의 인생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작가는 담담하게 그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질병을 극복하고 이제는 건강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그 병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스스로는 큰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그는 건강하지 않은 자기 몸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안다. '반려병'이라는 용어를 생각해 낸 것에서부터 작가의 혜안이 엿보이지 않나.


몸이 아픈 이유는 다양하지만, 모든 사람의 몸은 어떻게든 회복을 하려고 발버둥 친다. 심장은 뛰고, 교감 부교감 신경이 들썩거리며, 간이 최대치로 가동되면서 백혈구가 시동을 건다. 이 모든 일들은 내 의식과 상관 없이 저절로 일어난다. 의사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의 회복은 내가 알 수 없는 자동적인 신체 기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런 내 몸을 신뢰하고 응원하는 것은 같은 편인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반응인 것 같다. 아픈 몸과 팀워크를 이루는 것이 병을 대처하는 기본자세임을 몇 년간의 골골이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다. 그 이후로 어딘가 아프면 주문을 외워본다. 고생이 많아, 잘하고 있어, 고마워. 74-75


필라테스를 할 때, 원하는 만큼 고관절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복근이 제대로 작동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와 유사한 정도의 이유들로 내 몸을 원망한 순간들을 되돌아본다.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왜 내 몸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단 말인가, 한탄했던 순간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이런 원망과 한탄에는 나의 오만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몸이 그 동안 나를 위해 해 왔고, 지금도 나를 위해 해주고 있는 일들에 대해 내가 감사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해줄 것인가.


일찍이 신일숙이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말한 바, 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가진다. 지금 건강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해 온 어떤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며, 지금 아프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저지른 어떤 일에 대한 응보가 아니지 않나. 내가 지금까지 건강한 몸으로 살아온 행운에 감사하고, 건강하지 못한 날들이 닥쳤을 때도 그건 그것대로 받아들이는 자세, 내가 배워야 할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계속 나이들어갈 것이고, 나이든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과 멀어지는 일일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될 것이고, 이왕이면 씩씩하고 명랑하게 살아남아야할테니까.


적극적으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도 훌륭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세계를 긍정하고 그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은 더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 [아무튼, 반려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아무튼]보다도 마음에 오래 오래 남는 [아무튼]이다.


우리 모두는 코로나라는 새로운 계절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힘든 계절을 견디는 방법은 수많은 나와 네가 하나의 큰 몸이라는 것을 겸허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치료할 길이 없다고 해서 아픔이 부정될 수 없고, 지금 내가 당장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닌 것처럼, 어느 한쪽이 고통을 호소한다면, 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함께 아파해주는 새로운 의미의 면역력이 절실한 시대인 것 같다.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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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할까 했더니 아직 1라운드 - 미래가 두려운 십대에게 챔피언이 건네는 격한 응원 십대를 위한 자존감 수업 2
김남훈 지음 / 자음과모음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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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프로레슬러, 방송인, 강사, 그리고 작가. 동시에 이 모든 것인 사람이 바로 김남훈이다. 스스로를 '육체파 창조형 지식 노동자'라고 부른다. 멋있다. 창조형 지식노동자도 많고 육체파도 많지만 육체파 창조형 지식 노동자는 매우 드물지 않나. 게다가 무료 프로레슬러라니! 심지어 악역 전문 프로레슬러라나? 글도 엄청 잘쓴다. 나는 [소년이여, 요리하라]라는 책(공저)에서 이 사람이 쓴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 몇 번이고 읽었었다. 자음과모음의 '십대를 위한 자존감 수업' 시리즈로 김남훈 저자의 책이 나와 있기에 얼른 읽어보았다.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진로 강의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쩌면 실제로 저자의 강의를 출판사 쪽에서 녹취해서 그걸 다시 정리해서 쓰는 방식으로 출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술술 읽히면서도 심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슬그머니 질투가 난다. 이 사람의 파란만장한 삶은 그 자체로 이야기거리가 되고, 청소년들에게 바로 먹힐 법한 논리를 갖추게 된다. 별다른 풍파 없이 살아온 나에게는 한방에 먹힐만한 이야기거리가 없지 않은가. 이런 턱도 없는 질투.


그런데 계속 질투만 하고 있을 수가 없는 것이, 뻔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정말 신박한 비유와 사례로 설명해 들어가기 때문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참 휼륭한 육체파 창조형 지식 노동자일세, 라는 쪽으로 마음이 정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생이 불안하다고 느낀다면, 그가 자기 인생의 핸들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앉은 사람은 운전석에 앉은 사람과 같은 부담감이 없다는 것.


인생을 몇 십 년 선행학습한 입장에서 약간의 스포일러를 하자면, 삶이란 다가오는 불안을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과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야. 그리고 이걸 살아 있는 내내 반복해. 사이사이에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찾아오는 보상, 보람, 결과에 웃음 짓는 거지. 146-147


이 육체파 창조형 지식 노동자는 강연도 많이 다니는데, 소년원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것 같다. 일단 압도적인 덩치가 소년원생들을 제압할테니까. 무려 프로레슬러 아닌가. 게다가 전직도 아니고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 중인 프로레슬러다. 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이라도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시합으로 치면 이번 라운드는 당연히 망했지. 망한 거 맞아. 높고 커다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곳에 갇혀 있잖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하지만 다음 라운드가 분명 있거든. 앞으로 최소 50년 동안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라운드가 남아 있다고.

인생은 격투기처럼 라운드별 승점제니까. 이번 라운드는 졌어도 다음 라운드는 잘해서 승리로 가져가고, 다시 다음 라운드를 승리로 가져간다면 인생의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으니까. 136


아이들에게 권해줄 좋은 책을 하나 건졌다. 당연히 어른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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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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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시간이나 때우자 싶어 무심코 집어든 책이 대박인 날이 있다. 며칠 전 그런 행운이 나를 찾아왔다.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조그마한 책에 실려 있는 행운이었다.


책장이 바삐 넘어가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아껴서 읽어야 하는데, 하고 말이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고, 결국 다 읽어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온몸이 쑤신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좋은 책일수록 아껴 읽어야 하고, 나는 한 시간 이상 계속 책을 읽고 앉아 있지 말고 중간중간 움직여 주어야 하는데... 그런 규칙들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좋은 책 앞에서는 별 수 없다.

책을 다 읽은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작가가 쓴 다른 책이 있나 검색해 보았다. 두 권이 더 있다. 만세! <말하기 독서법>과 <어린이 책 읽는법> 중 <어린이책 읽는 법>을 주문했다.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 같지만, 훌륭한 작가를 발견했으니 구입해서 다시 제대로 읽어보려고 한다.

어린이에 대해 이만큼 좋은 관점으로 서술된 책도 없었고, 어린이의 삶을 통해 어른의 삶까지 통찰하는 책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김소영의 눈으로 다시 어린이를 바라보고, 다시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2020년 최고의 에세이를 뽑으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어린이라는 세계>를 밀겠다.

흠. 요즘은 다들 왜 이리 글을 잘 쓰는지. 정말 작가 노릇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옮겨 적었다. <어린이라는 세계>의 맛보기로. 입에 맞으신다면 ... 직접 읽어보시는 걸로.


(슈돌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집들이 너무 호화찬란한 것을 염려하며)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주면 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102


(교사 연수를 마치고 연수에 참가한 선생님들을 생각하며)

더 중요한 건 이분들이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실 거라는 점이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 이보다 중요한 조건이 있을까? 선생님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내가 특별한 사례를 발표하거나 엄청난 이론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무엇이든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과 의지 덕분이다. 117-118


어른 김소영이라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어린이 김소영은 선생님의 사소한 실수들을 쉽게 용서한 것 같다. 아마 내가 자라느라 바빠서 서운한 순간들은 되도록 흘려보낸 모양이다. 120


그때 나는 [말하기 독서법] 원고의 개요를 잡고 작업 일정을 세운 참이었다. (...) 문제는 에너지, 생산적인 힘이었다. 글을 쓰다 막힐 때나 쓰기에 지쳤을 때 어떻게 창의성과 집중력을 유지할까.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새로운 것을 배워 보기로 한 것이다. 일이나 글쓰기 말고 완전히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지금껏 배워보지 못한 것, 읽고 쓰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 피아노였다. 130


"그래도... 그래도 육십 대에 시작하는 것보다는 사십 대에 시작하는 게 낫죠?"

그러자 선생님이 갑자기 정색하셨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육십 대 분들은 여기에만 집중하시거든요. 선생님도 글 쓰시면서 피아노 배운다는 게 멋있기는 하지만, 그냥 기분 전환으로 배운다고 생각하시면 늘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요. '정말 열심히 하겠다!' 결심을 하셔야 해요.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라고도 해 주시고, '싫어도 해야 된다' 그런 마음으로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늘고 그래요. 그런데 어른들은 막상 해 보면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어서 두세 달 하고 그만두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면 저도 힘들고요. 선생님, 진짜 열심히 하실 수 있어요?" 131-132


어린 나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사랑도 감사의 표현인 양 생각했던 것 같다. 고마워서 사랑한 게 아닌데, 엄마 아빠가 좋아서 사랑했는데,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다. 어린 나도 몰랐고 아마 부모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는다. 다만 서툴러서 어린이의 사랑은 부모에게 온전히 가 닿지 못하는지 모른다. 마치 손에 쥔 채 녹아 버린 초콜릿처럼. 179


어쩌다 어린이 친구를 사귀는 행운을 얻었을 때 꼭 존댓말로 관계를 시작하라고. 말을 놓는 게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철없는 어른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193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219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219-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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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대충 하는 미니멀 라이프 - 시시한 미니멀리스트의 좌충우돌 일상
밀리카 지음 / 나는북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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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꽤나 유행하는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책이다.
나는 거의 20년전부터 미니멀 라이프(그때는 주로 심플리시티, 혹은 다운사이징 등의 용어로 지칭되었지만)에 관심이 많았다. 그 관심이 주로 "책 읽기 한정"이라는 것이 함정이지만. 하여튼, 미니멀 라이프에 대한 책을 읽고, 그에 고무되어서 물건을 좀 버리고, 청소를 좀 하고, 그리고 그 책에서 추천한 좋은 물건을 구입하고... 이런 패턴이 계속 반복되어 왔던 것 같다. 일단 미니멀을 달고 나온 책이란 책은 다 읽은 것 같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읽는 책에 비하면 미니멀 내공이 한참 아래다. 그래서 조금은 얕잡아보면서 읽었다.

별거 없네.
이 사람은 애도 없잖아.
결혼한 지 얼마 안되어서 살림이 적으니까.
출근도 안하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 그런 번거로운 일도 가능하지.

그러다 중간에 퍼뜩 깨달은 것. 그래도 이 사람은 실천했다! 그 결과를 기록하고 책도 냈다. 마음 먹고 실천하고 기록하고. 이 이상 뭘 바라겠는가.

이제야 제목이 눈에 다시 들어온다. "마음을 다해 대충하는 미니멀 라이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해서 아무 것도 못하는 많은 이들에게 지침이 될만한 말이다.

"마음을 다해 대충 하자."



올해 새로 맡게 된 업무가 내 일상을 좀 먹게 될까봐
걱정하는 일로 이미 일상을 잠식당하고 있는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래, 다음을 다하되 대충 하자.

그게 결국 끝까지 해내는 비결이도 하고
끝까지 못해도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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