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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 사계절 / 2020년 11월
평점 :
그냥 시간이나 때우자 싶어 무심코 집어든 책이 대박인 날이 있다. 며칠 전 그런 행운이 나를 찾아왔다.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조그마한 책에 실려 있는 행운이었다.
책장이 바삐 넘어가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아껴서 읽어야 하는데, 하고 말이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고, 결국 다 읽어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온몸이 쑤신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좋은 책일수록 아껴 읽어야 하고, 나는 한 시간 이상 계속 책을 읽고 앉아 있지 말고 중간중간 움직여 주어야 하는데... 그런 규칙들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좋은 책 앞에서는 별 수 없다.
책을 다 읽은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작가가 쓴 다른 책이 있나 검색해 보았다. 두 권이 더 있다. 만세! <말하기 독서법>과 <어린이 책 읽는법> 중 <어린이책 읽는 법>을 주문했다.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 같지만, 훌륭한 작가를 발견했으니 구입해서 다시 제대로 읽어보려고 한다.
어린이에 대해 이만큼 좋은 관점으로 서술된 책도 없었고, 어린이의 삶을 통해 어른의 삶까지 통찰하는 책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김소영의 눈으로 다시 어린이를 바라보고, 다시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2020년 최고의 에세이를 뽑으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어린이라는 세계>를 밀겠다.
흠. 요즘은 다들 왜 이리 글을 잘 쓰는지. 정말 작가 노릇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일부 옮겨 적었다. <어린이라는 세계>의 맛보기로. 입에 맞으신다면 ... 직접 읽어보시는 걸로.
(슈돌 같은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는 집들이 너무 호화찬란한 것을 염려하며)
어떤 어린이는 여전히 tv로 세상을 배운다. 주로 외로운 어린이들이 그럴 것이다. 어린이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가장 외로운 어린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모습을, 함께 노는 즐거움을, 다양한 가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가족이 아니어도 튼튼한 관계를, 강아지와 고양이를, 세상의 호의를 보여주면 좋겠다. 세상이 멋진 집이라고 어린이를 안심시키면 좋겠다. 102
(교사 연수를 마치고 연수에 참가한 선생님들을 생각하며)
더 중요한 건 이분들이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실 거라는 점이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데 이보다 중요한 조건이 있을까? 선생님들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은 내가 특별한 사례를 발표하거나 엄청난 이론을 제시해서가 아니다. 무엇이든 어린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게 있다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과 의지 덕분이다. 117-118
어른 김소영이라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어린이 김소영은 선생님의 사소한 실수들을 쉽게 용서한 것 같다. 아마 내가 자라느라 바빠서 서운한 순간들은 되도록 흘려보낸 모양이다. 120
그때 나는 [말하기 독서법] 원고의 개요를 잡고 작업 일정을 세운 참이었다. (...) 문제는 에너지, 생산적인 힘이었다. 글을 쓰다 막힐 때나 쓰기에 지쳤을 때 어떻게 창의성과 집중력을 유지할까.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새로운 것을 배워 보기로 한 것이다. 일이나 글쓰기 말고 완전히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지금껏 배워보지 못한 것, 읽고 쓰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 피아노였다. 130
"그래도... 그래도 육십 대에 시작하는 것보다는 사십 대에 시작하는 게 낫죠?"
그러자 선생님이 갑자기 정색하셨다.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육십 대 분들은 여기에만 집중하시거든요. 선생님도 글 쓰시면서 피아노 배운다는 게 멋있기는 하지만, 그냥 기분 전환으로 배운다고 생각하시면 늘지도 않고 재미도 없어요. '정말 열심히 하겠다!' 결심을 하셔야 해요.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라고도 해 주시고, '싫어도 해야 된다' 그런 마음으로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늘고 그래요. 그런데 어른들은 막상 해 보면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어서 두세 달 하고 그만두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면 저도 힘들고요. 선생님, 진짜 열심히 하실 수 있어요?" 131-132
어린 나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사랑도 감사의 표현인 양 생각했던 것 같다. 고마워서 사랑한 게 아닌데, 엄마 아빠가 좋아서 사랑했는데,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응답이었다. 어린 나도 몰랐고 아마 부모님도 모르셨을 것이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는다. 다만 서툴러서 어린이의 사랑은 부모에게 온전히 가 닿지 못하는지 모른다. 마치 손에 쥔 채 녹아 버린 초콜릿처럼. 179
어쩌다 어린이 친구를 사귀는 행운을 얻었을 때 꼭 존댓말로 관계를 시작하라고. 말을 놓는 게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철없는 어른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193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219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219-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