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거리는 소리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헝가리 물소도 더 이제 피곤하다고 아우성입니다. 저는 둔중한 피로를 느끼며 소파에 앉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을 바라봅니다. 달콤한 상상 속에서 미미와 몇 시간을 보낸 날은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오오. 밤새도록 허벅지 사이에 베개를 끼운 채 뒤척이며 하얗게 날이 샐 때까지 미미를, 미미의 얼굴을, 미미의 떨림을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크악, 크악. 그녀는 알고 있을까요?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을까요?

그녀가 저를 알아보았을까요? 뒷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저의 얼굴을, 호일펌 을 한 머리를, 통바지 아래에 드러난 구두코가 실은 무릎까지 올라온 롱부츠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아마, 모르겠지요. 이름도, 얼굴조차도 모르겠지요. 크악, 크악.
하지만 미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학기 때의 등록금 인상에 관한 문제부터 여자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 남학생에 관한 처벌까지. 학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슈에 대해 행동을 촉구하는 그녀의 활동을 어떻게 모를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수업시간에는 항상 자진해서 발표를 맡으며, 매 시간마다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는 그녀를 모른다면 이 학교 학생이 아니라는 증거겠지요. 크악, 크악. 종횡무진 가로지르는 그녀의 열정 앞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아. 모두가 그녀의 매력에 빠져 있습니다. 연설하는 그녀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발걸음을 고정시키는 학생들. 아아. 대중적인, 너무나 대중적인.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내 사랑 미미. 크악, 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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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츠. 비- 오- 오- 티. 그리고 -에스.
무릎까지 올라오는 물소가죽 부츠. 가죽 특유의 질감이 살이 있는 매우 고급스런 부츠. 이 헝가리 산 물소가 도착한 날 기분이 좋아진 저는 하루 종일 거울 앞에 서서 자세를 고정시키고는 거울 속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을 껴입고 그 위에 갈색 롱부츠를 신은 후 검은 색 가죽 장갑으로 마무리 한 완벽한 형상의 사내 말입니다. 아아, 아름다웠습니다. 지나치게 아름다웠습니다. 누군들 그의 모습에 박수를 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아이펜슬로 눈이 새까맣게 그려진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도발적입니다. 그는 중얼거립니다. 왜 그토록 고민했을까. 거울 속의 부츠가 형광등의 불빛을 받아 매혹적으로 반짝거립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제 눈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하는 그의 이름은 미미였습니다. 원 뿔 모양의 하얀 조명이 마련된 무대 위에 오르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 둘을 빙 둘러쌉니다. 그들의 얼굴은 부러움을 담고 있었으나 한결같이 어색한 표정들이었는데, 그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탓에 본심이 더욱 드러나고 마는 그런 종류의 표정 말입니다. 미미와 그는 보란 듯이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돕니다. 계속, 돌고 돕니다. 빙그르르 돌다가 휘리릭 회전합니다. 춤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주위는 어둠에 잠겨들고, 테이블 위에 설치된 두 개의 촛불이 노랗게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피자 조각이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리고, 그 옆에는 은빛 칼이 놓여져 있습니다. 둥글게 퍼져나간 빛에 푹 쌓인 그들은 곧 딸그락딸그락 식사를 시작합니다. 서로의 눈은 감겨진 채입니다. 여전히 질시어린 눈빛들이 배경으로 테이블을 빙 둘러싸고 있습니다. 다시,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미미와 그는 어느 새 빙글빙글 도는 회전목마에 함께 올라타 있습니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동화가 그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껑충껑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가긴. 풀 뜯으러 간다. 그래서 팬티에 그려진 토끼가 점점 살이 찌고 있었구나. 산 토끼 토끼야 풀 뜯으러 어디로 가느냐. 그녀에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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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였습니다! 맞은편의 두 사내 사이에 끼인 익숙한 얼굴은 바로 그였습니다! O양 말입니다! O양! 크악, 크악. 우리들은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이번엔 O양이 고개를 먼저 숙이더군요. 크악, 크악. O양을 노려보는 제 머릿속으로 치욕의 기억들이 컹컹 짖으며 개떼처럼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개의 기억이 꼭짓점으로 뚜렷이 떠올랐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가 내무 실에서 모여 앉아 초코파이를 먹을 때 전역을 하루 앞둔 O양이 병장인 저를 화장실로 불러내어 명령했던 기억 말입니다. <야, 더기 더기 구더기, 넌 똥 냄애 맡으면어 먹어.> 그리고 어이없는 3박 4일 포상휴가까지. 일요일에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병사로서 타인의 모범이 될 자격을 충분히 지녔음. 행군으로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물집이 생긴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효과는 더욱 컸겠지요. 아아. 또 다른 기억이 끼어들었습니다. <껌 먹어. 먹으랭지 언제 입으랭어?> 더 이상 저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광이 폭발할 듯 끓고 있었으니까요! 크악, 크악.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저는 서둘러 바지 지퍼를 내렸습니다.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오줌을 잘 조준해 O양을 향해 갈기려 했으나, 그 자체로 의지를 지닌 듯, 어떤 목표도 없이, 어떤 목표도 없는 목적을 향해, 밑도 끝도 없이, 오줌은 노아의 홍수처럼 주위의 모든 인간들을 덮치고 말았습니다. 크악, 크악. 뒤얽혀 둥둥 떠다니는 익사한 시체들을, O양 하나 때문에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고, 저는 제 오줌 속을 유유히 헤엄쳐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크악, 크악. 이미 비는 그쳤고, 햇살 한 줄기가 옅게 깔린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와 있더군요. 집에 오는 내내 구두가 도끼처럼 제 머릿속을 찍어대고 있었습니다. 아야, 아야. 그러고 보니 제가 계속 ‘구두’라고 말하는 실수를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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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줌을 누려고 바지를 끄르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기묘한 소리가, 귀 기울여 가만가만 듣고 보니 끙끙거리는 남녀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소리가 증폭되어, 응응응응응응응응응응, 하는 헐떡임이 두 번째 칸에서 들려왔고, 깜짝 놀란 저는 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몇 분이 지날 동안, 도덕을 지키지 않는 그들에게 점점 분노가 치민 저는 몇 번이나 커다란 헛기침을 뱉어냈습니다만, 아랑곳없이 그들의 헐떡거림은 여전히 스크류바처럼 찰싹찰싹 결합한 채 오르내리며 좌우로 비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맞아, 각자의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나오지 않는 게 아니겠습니까. 오줌이 방광 안에서 노란 달처럼 꽁꽁 얼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힘을 끙 주고 그것을 흔들어보아도 그들의 신음소리만 커져갈 뿐, 제 배는 점점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서둘러 다른 화장실을 찾으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는 고드름처럼 뾰족해지고 말았습니다! <꺄! 오에에에에에엥!> <끼! 오에에에에에엥!> <꼬! 오에에에에에엥!> 크악, 크악! 하얀 벽에다 마구 뿌려대는 절정의 괴성에 눌려 정신이 가물가물 혼미해져 왔습니다. 그러다 정적이 찾아왔는데, 삐그덕 하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타난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덜컹거리는 전철 안이었습니다. 여전히 파르르 떨고 있는 심장을 움켜쥔 채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았습니다. 온 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는데, 터질 듯한 오줌보 때문이었습니다. 눈앞에는 여전히 선글라스와 시커머스가 어른거리고 있었습니다. 숨을 진정시킨 후 고개를 주위를 둘러보았고, 그 순간 저는 또 다시 뾰족해지고 말았습니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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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턱의 동작을 멈추고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빛은 여전히 그곳에 떠 있었다. 세계는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울타리를 가운데 두고 세계는 저쪽에, 나는 이쪽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누나의 망막과도 같은 짙은 어둠 속에서, 뜨거움과 차가움의 경계에서 눈물이 뺨을 지나 턱 아래로 떨어지고 있음을 문득 알아차렸다. ‘황제구이’의 화제 후 뉴스와 시사 잡지를 통해 얼마간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아 환한 대낮으로 떠오른 누나는 죽음으로 그렇게 삶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모든 게 의문이었다. 서울행을 결심할 때부터 ‘우리’를 의식에서 지우려 한 게 아니었을까, 내가 할머니를 버림으로써 다시 누나와 나, ‘우리’가 되었지만 누나는 여전히 나를 짐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한 확신 속에서 밤을 뒤척이다가도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었던 이유는 누나가 떠나면서 내 서랍에 남겨놓은 연락처 때문이었다. 어머니처럼 새벽에 그냥 달아나려고 했다면 굳이 연락처를 남겨놓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날 저녁 허겁지겁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막 현관문을 나서는 누나를 몰래 뒤따라가자는 엉뚱한 생각이 찾아온 것도 이 모든 혼란과 무관치 않으리라. 그러나 밤참을 챙겨온 ‘동생’ 대신 뜻하지 않게 나는 그날 어쩔 수 없이 ‘남자’가 되어야만 했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없었다. ‘에덴동산’으로 휘청휘청 걸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으로 어둠이 황폐해져가고 있었다. 문득 묘한 느낌이 엄습했다. 나는 손에 힘을 넣었다. 전해오는 감각은 뚜렷했다. 주먹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가죽 장갑이 새까만 어둠과 몸을 섞어 만들어낸 착시였던 것이다. 장갑 낀 손을 가만히 응시하자, 다시 손을 감싼 까만 장갑이 밤의 어둠과 섞이어 까마귀의 광활한 날개처럼 팽창하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찾아온 웃음처럼 휴대전화가 울었다. 허벅지가 가냘프게 자맥질했다. 정우인지도 몰랐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곧이어 다시 떨리기 시작했을 때 배터리를 몸체에서 완전히 분리시켰다. 팽팽한 정적이 보름달처럼 찾아오면서 바람이 차차 잦아들고 있었다. 구겨진 부동산 명함이 길게 포물선 그리다 툭 떨어져 흰 눈에 섞여들었다. 둥글게 몸을 말아 어둠의 손바닥에 웅크려 앉은 나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끝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밤새도록 내릴 모양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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