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로 스키니 진에 롱부츠를 신고 등교하는 게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몸의 일부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 아침마다 느끼는, 부츠의 깊은 구멍 속에 발을 쏙 집어넣을 때의 짜릿한 쾌감에 이어 무언가에 푹 빠져든 듯한 아늑한 기분을 오후 수업이 끝나는 내내 느끼고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되는 야릇한 기분에 사로잡혀 양 팔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아아, 부츠에 올라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게 행복이란 거구나. 부츠를 신은 채 집안 여기저기를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근사한 일이지 않습니까? 상상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 후 거실의 전신 거울 앞에 서서는 빙그르르 돕니다. 또 다시 돕니다. 돌고, 돌고 선풍기처럼 회전합니다. 어느 새 그는 한 마리 우아한 백조가 되어 푸른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크악, 크악. 곧 거리의 사람들은 지상을 활보하는 한 사내에 경악하겠지요.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에 부츠를 착용하다니! 아아, 그에게로 향할 군중들의 시선을 상상해보십시오. 크악, 크악. 바깥은 일주일후로 다가온 장마의 전조인지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채 끈끈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매미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 전형적인 여름의 흐름 속에서 무릎까지 올라온 부츠는 계절파괴라는 또 다른 폭발적 효과를 가져다주겠지요. 크악, 크악. 왜, 왜 부츠를 겨울에만 신어야 합니까? 크악, 크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엇이 떠오릅니까! 크악, 크악. 기껏해야 농구화처럼 발목까지 올라오는 앵글 부츠가? 특수 용도로 사용되는 장화가? 무엇을 상상하고 있는 겁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텐데! 짜잔! 그렇습니다! 양 볼에 한 가득 공기를 머금고 금괴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츠, 하고 불어보십시오. 부-우-츠, 하고 말입니다. 츠, 에서는 무시하는 듯한 표정을 앞세우고 흥, 하고 튕기듯 소리내야 합니다. 다시, 따라해 보십시오. 부-우-츠, 흥, 하고 말입니다. <부-우-츠, 흥.> 이제 아시겠지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장 40센티미터의 헝가리 산 물소가죽 롱부츠. 그날 저는 이 헝가리 산 롱부츠를 신은 채 교정을 배회했던 것입니다. 크악, 크악. 오리와 해파리와 보쌈을 먹었던 그날도 저는 롱부츠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그들 뿐 아니라 누구도 통바지 밑으로 살짝 드러난 구두코가 무릎까지 올라온 무지막지한 부츠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걸을 때마다 양 다리를 콱 조여 주는 팽팽한 긴장감과 묘하게 어우러진 쾌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보이는 게 전부라고 믿는 그들을 향해 저는 속으로 빙긋 웃어주었습니다. 크악, 크악. 호일 펌을 한 이튿날도 물소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미미와 만났더라면 저는 입고 있던 통바지를 훌훌 벗어던져버리고 안에 껴입은 그레이 스키니 진과 롱부츠를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얼마나 ‘통바지로부터의 해방’을 갈구하고 있었는지 아시겠지요. 왜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느냐고? 날씨가 더워서라니, 아니지요. 날씨가 더워서라니, 아아, 아니지요. 그 두꺼운 통바지 안에다 꼬깃꼬깃 그레이 스키니 진을 껴입고 있었으니, 게다가 물소가죽 롱부츠를 신고 있었으니! 크악, 크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러던 중 운명적인 일이 마침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크악, 크악. 그녀가 제 뒤에 앉은 게 단지 자리가 없어서였을까요? 여지저기 빠진 이처럼 빈자리가 많았는데도 그녀는 왜 제 뒤에 앉은 것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운명적 이끌림이 아니었을까요? 그 날 수업도 저는 여전히 무관심 속에 흘려보내고 있었습니다. 제 신경은 이미 미미의 재잘거림에 온통 집중되어 있었으니까요. 전날 명동에 옷을 사러 간 모양이었습니다. 연설을 하거나 발표할 때와는 또 다른 감미로운 속삭임이 제 뒤통수를 간질이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저는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 재채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부츠 신은 남자가 멋있다는 그녀의 목소리가 망치 모양이 공기로 화하여 제 뒤통수를 사정없이 강타한 까닭이었습니다. <맞아. 맞아. 부츠 신은 일본 남자들 정말 멋있더라> 아아. 멋있더라. 멋있더라. 나를 향한 구원의 속삭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크악, 크악. 그렇습니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고 집에 오는 내내 부츠라는 단어가 제 머릿속을 어찌나 콕콕 쪼아대는지 도로의 지나가는 차들의 경적소리마저도 부츠! 부츠! 하고 짖어대고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책상 맨 밑의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습니다. 오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라면서 저는 어둠 속에 웅크린 물소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속삭였습니다. 얼마나 답답했니. 한 번도 밖에 나간 본 적이 없던 물소. 이제 그도 타인과 연결될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나의 사랑스런 물소를 소개합니다! 짜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알고 보니 제가 잔디밭을 느릿느릿 훑었던 그 시간에 그녀는 서관건물 3층의 한 강의실에서 페미니즘의 적용에 관한 발제토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제가 ‘속옷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했는데, 크악, 크악, 강의실에 울려 퍼졌을 당당하고도 섬세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해져오는군요. 역시 속옷은 감옥입니다. 아아, 그날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크악, 크악. 수첩에다 날짜까지 기록한 제가 어떻게 그날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크악, 크악. 하늘하늘 내 사랑 악어여······.

                                                             3
하얀 구름이 코끼리 모양으로 떠 있는 오전이었습니다. 코끼리 모양의 회색 구름을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매머드인 것 같기도 함, 이라고 제 수첩에는 기록되어 있으니까 맞겠지요. 3교시 수업시간이었고, 세 번째 발표 시간이었습니다. 어수선했던 강당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던 게 떠오르는군요. 그 침묵 위를 사뿐사뿐 검은 색 뿔테 안경을 쓴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크악, 크악. 모두들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고, 저는 멍하니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렷하면서도 미끈한 목소리가 그녀의 앙증맞은 입술에서 술술 나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오오. 그토록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재능을 가진 사람을, 여태껏 본 적 없었던 저로서는 그저 놀라울 다름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난 후 저는 어느 덧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첫 눈에 반했다, 라는 표현을 쓰는 거겠지요. 크악, 크악. 그때부터 그녀를 보는 것이 저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걸을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두터운 입술과 탄력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잘록한 허리선. 온통 곡선으로 빚어진 성숙한 육체와 연약하고 순수한 얼굴, 그리고 당당한 목소리의 아이러니한 조화를 상상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크악, 크악. 그녀를 향한 제 열정은 갓 입학한 파릇파릇한 새내기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꿈도 꾸지 마. 쟤 20살이야. 네, 주제를 알아야지.> <알아, 미미야, 발표할 주제는, 말이야, 내가> 그들의 웃음소리와 제 목소리가 엉켜들어 잠결에 등을 토닥이더군요. 크악, 크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첫째, 돈 써야지. 둘째, 시간 낭비지. 셋째, 헤어지면 상처받지. 그러니 도대체 여자를 왜 사귀는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어깨 좁은 림보맨의 중얼거림에 동화되어버린 걸까요. 아아. <경기도 무주에 번지점프가 새로 생겼던데, 가 볼까?> 하던 오리의 권유에 저는 귀찮다고 말했고, 해파리가 외국여행에 가자고 할 때에도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에이, 귀찮아. 제대로 못 해 봤으면서, 국내 여행도, 무슨 여행이야, 해외 말이야.> 그리고 한 달 전쯤이었나, 스쳐지나간 한 일본인의 헤어스타일을 가리키며 해파리가 말했을 때에도 제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저런 머리 싫어해.> <쪽팔려서 그러는 거지?> <아니라니까.> 또 다시 수세적 입장에 몰리는 상황에서 왜, 라고 묻는 오리새끼의 공세에 저는 그만 흥분하고 말았습니다. <어, 진짜인가 보네?> <아냐!> <진짜잖아.>


천만에,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왜 그들은 제가 절대로 호일펌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을까요? 왜! 왜! 왜! 왜 그렇게 여겼던 걸까요? 크악, 크악. 저의 변신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습니다. 이튿날 여러 동료들이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제게 자신감을 넣어주었으니까요. <그다지 잘 어울리진 않네.> <별로야.> 이 말을 듣고 저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적어도 최악의 평가는 피했기에,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눈에 뛸 정도로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는지 지나가던 몇몇 동기가 그것을 지적해 주었을 때·에도 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다 젖었어. 괜찮아?> <아, 더워서, 그래, 날씨가, 말이야.> 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녀가 나타나기만을 숨어 기다리다가, 우연을 가장해 그녀와 부딪힐 기회를 엿보면서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를 조심조심 돌아다녔으나 평소 애용하던 카페에도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과 사무실에서 이 사회를 좀 더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나 보다 여겼었는데 맞더군요. 크악, 크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