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 - 크리수나무르티재단 한국위원회 번역 시리즈 1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지음, 김영호 옮김 / 홍진북스(중명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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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제를 대하여 우리는 어떤 문제 해결 방식을 고르는가.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온 지식으로 나는 문제를 푸려고 한다. 확실히 그렇다. 화를 내면 우리는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 화를 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화를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당위’다. 사실과 당위로 나누고 우리는 당위를 내세워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당위, 즉 이러 이러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이상이고 이룰 수 없는 희망일 뿐이다. 이것은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면 지나간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으로 접근하거나 푸려고 하려고 하니까. 이는 결코 문제를 푸는 접근이 못되고 오히려 꼬이게 한다. 우리 현실에서 그런 예는 얼마든지 많다.

우리는 흔히 폭력의 문제로 골치를 썩으면서 폭력을 물리치는 방법을 서둘러 이렇게 처방한다. 곧장 그 폭력을 없앨 방법으로 우리는 비폭력을 상정한다. 즉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라는 버릇된 생각으로 문제를 푸려고 든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문제를 푸는 것일까. 크리슈나무르티는 이에 비폭력은 없다고 말한다. 비폭력이란 다만 이상이며 문제를 회피하며 도망가려는 태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비폭력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잔인하며 폭력적인지 보라고 이른다. 그렇게 폭력적임을 보는 것, 그것은 관찰이다. 그것이 해결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전쟁도 보라. 우리는 전쟁이 나쁘다는 가치만을 주장해서 우리는 전쟁을 막아보려고 한다. 하지만 달리 하는 방법으로서 우리 인간의 잔인을 직접 바라본다면 희망이 보인다. 우리는 이라크 사람의 참상을 눈으로 보면서 우리 인간의 잔인을 본다. 즉 보고 깨칠 때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이는 집단화된 논리보다도 우리 개인마다 숨어 있는 폭력성을 일깨울 때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그의 가르침에서 자주 나오는 관찰과 관찰대상에 분리가 없어야 한다 함은 문제를 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라는, 즉 인식의 태도를 일깨우는 것이다. 관찰자가 관찰하는 것이란 실체가 없는 이상을 떠올리고 그것에 다가가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 분리만 거듭할 뿐, 즉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만들어져 분리가 일어날 뿐이다. 그래서 관찰자가 관찰 대상과 하나되는 것에 목표가 주어져야 한다. 그의 가르침에서 지식과 관념이 왜 문제인고 하면 분리를 더욱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죽은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진 지식과 관념으로써 관찰하고자 하고 그래서 더욱 분리가 일어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관찰 대상이 만들어짐은 곧 하등 실제적이지도 않고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지식과 관념만 늘어난는 것과 같다. 오직 비교 따위의 조건지어진 굳은 생각으로 다가갈 뿐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이 바로 명상이다. 명상은 관찰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해가 넓어진다는 말이 되는 것이 아닌가. 관찰하라, 이것은 명상하라는 말이다. 명상하면 우리는 어떤 방법이나 형식을 떠올리고 어디 골방에 갖혀 침잠하는 무엇을 말하기 십상이다. 즉, 하는 방법만을 생각하지만 그것이 명상일까? 아니다. 관찰을 하는 것이다. 물론 명상을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정적이 요구된다.

우리가 깊이 알아보고 알아차리는 것이 명상이다. 우리가 문제라고 보는 것이 실은 내 안에 있다는 자각을 하는 것이 명상이다. 들여다 보고 깊이 정적을 이루면 내가, 바로 내가 알아내는 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그래서 형식으로 요란을 떨어야 하는 무엇이 아니고 일상 가운데서 하는 것이다. 명상은 세상으로부터 도피가 아니고 문제를 깊이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관념을 벗어나 순진 무구한 상태로 돌아가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명상의 모습이다. 이로 하여 결국 이해가 피어나는 것이고 마침내 사랑이 피어나는 것이다. 명상 속에서 과거의 지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그 지식을 종결 짓게 되고 아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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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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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히 번호만을 기다리기 뭐한 시간에 여성 잡지 하나 뭉턱 넘기다가 만나고 발견하는 것들은 모두 가십성인 그렇고 그런 일들이다. 어떤 은행에서 그렇게 '장영희'를 만났다.
그녀의 조금은 핼쓱하고 힘없어 보이던 상반신 사진.처음 이 책이 출간되어 취재한 내용이었다. 소개된 글을 통해서 책을 사서 읽은 나는, 그런 우연한 기회에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아닌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와 사람을 만났다. 장영희, 이제 그 분이 들려 준 이야기들을 가끔씩 떠올린다. 그의 아버지 장왕록 교수는 '미안하다'는 말을 잘하였다는 기억과 만나는 날, 나는 꼬치꼬치 따져서 내 입장을 이겼다고 우긴 것을 반성하였다. 피천득의 수필, 철학자 김태길의 수필, 법정의 수필을 읽으면서 느꼈던 선해지거나, 소박한 삶의 가치를 귀히 여기게 되거나, 삶의 교양을 참참히 키워갈 것을 다짐하거나 하는 그런 마음을 '내 생애 단 한번'의 장영희 교수의 수필을 읽으면서도 갖게 되었다. 책장 거기 그 자리에 꽂힌 그 책을 가끔 빼들어 읽으면서 나는 '거기 그 자리'를 지키는 장영희 교수의 삶을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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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술
모티머 J.애들러 외 지음, 민병덕 옮김 / 범우사 / 199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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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 하면, 우선 자세를 바로 잡고 첫 쪽 부터 한자 한자 꼼꼼히 읽어 나가며 저자의 뜻을 따라서 아주 천천히 읽어 나간다, 이런 읽기 상식 앞에서는 독서란 도대체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제 제발 무턱대고 읽지 말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저자가 이르듯, 이제 그 실천을 꾸준히 하여 몸에 밴 읽기 습관을 갖출 것을 생각한다.빠르게 읽을 것. 차례, 표지글, 색인 등을 훑어 보고 책의 종류를 간파할 것. 그가 이르는 것들은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을 넘어서는 방법들로서, 챙겨봐야 하는 요령들이다.
기초독서/점검독서/분석독서/신티피칼독서로 구분한 기술을, 정말 기술적으로 익히면 독서에 많은 도움이 된다. 꼼꼼히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을 우리는 미련스럽게 읽고나 있지는않는지. 많은 독서법을 기술로서 터득하여 많고도 많은 책에서 귀한 정보를 얻는다면 남다른 이득이 아니겠는가.

살면서 참 많은 것들에서 우리는 방법없고 요령이 없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독서란 그저 글자를 알면 이루어지는 일처럼 알고 있는 것도, 실은 방법없는 모습이다. 학교의 학습과정으로서 독서법을 배우고 적용하도록 가르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책을 가까이 하도록 이끄는 교육을 생각한다면 독서의 기술이 하나의 영역으로서 존중되는 풍토가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부언/지금 품절로 나오는데, 범우사간으로 글자도 키워서 출간한 책이 서점에는 있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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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 기독교 뒤집어 읽기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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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재삼 읽으면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돌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문자주의에 빠져 옹고집쟁이가 되어 허무맹랑한 믿음을 진실한 믿음으로 알고 경쟁하듯 조아리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깊은 마음의 상처로 앓게 하는지 모른다.

예수가 간 길을 따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죄사함을 받게 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믿고 그래서 나는 안전한 지대로 들어왔으나 많은 사람들은 아직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며 그들을 향해서 전투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투사(?)들이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성경을 엄한 무엇으로 여기어 한자 한자 두려움으로 바라보며 국어적 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렵게 해석을 하는 교인들을 보면 바로 문자주의에 빠져 한 발작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미성숙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진정 참다운 영성을 지니고 고난을 이겨내는 긍정의 힘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교인들이 전도과정에서 역사적 과학적 사실로서 근거를 대는 성경 예화는 실은 비역사적 비과학적 내용은 가린채 단장취의된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이 책을 만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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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의 달인이 되는 법칙
히가시야마 히로히사 지음, 이규조 옮김 / 모색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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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하게 인식하게 하는 책이다. 어떤 방향으로든 성공하고 싶다면 듣는 기술을 먼저 느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 못하고서 성공하는 일이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짝함이요 만남이며 어울림일진대, 과연 그에 걸맞은 대인관계에 관한 올바른 인식을 미처 갖추고 있지 않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생각건대, 듣기 기술에 능하면 다음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하고, 협상을 잘 이끌어 가고, 상대의 입장을 발견하게 되고, 내 말도 잘 들을 수 있게 할 수 있으며, 쓸모 없는 말을 줄일 수 있으며,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세상엔 말 잘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은 후하지만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칭찬이 박하다. 그래서인지 널린 교육기관도 모두 웅변, 화술, 스피치 등 말하는 것을 내세운다. 물론 거기서도 듣기를 중시하지 않으랴 만, 모두가 말을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교육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세상에 하고많은 문제가 모두 듣기를 못해서, 듣기 기술을 익히려는 교육이 아주 소홀한 이유로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다. 프로 카운슬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지금 당장 필요하고 바로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참으로 상대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다름 아닌 듣기에 달려 있다. 묻는 말이 다 그렇고 그렇다고 보이지만, 종류가 다르다. 누가 대답해도 내용이 달라질 수 없는 질문('이 근처에 우체국이 어디 있느냐?'), 대답할 사람 스스로가 생각을 하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위 둘의 질문을 합한 질문 (' 이 근처에 싸고 맛있는 초밥 집이 어디 있느냐?')이 그것인데, 이런 구분이야 대단할 것이 없어 보이지만, 이 것들이 섞이고 응용된 많은 대화들 속에서 듣기는 무시되는 경향이 얼마나 많은가. 즉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자연과학은 자연히 정답을 강요하는 교육에 물들게 하여 다양한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는 듣기를 내팽개치고 말았다. '서두르는 자만이 행운의 여신을 만날 수 있다'와 '급하면 돌아가라'라는 상반된 대답은 모두 정답인 경우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지평선 상에 다양한 인간 이해가 가능하고 아울러 조화롭고 활달한 세상이 열리지 않을까.

고집이 세고 자기 견해나 주장이 상대에게도 맞는 것으로 여기는 듯 훈계조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이런 종류의 (듣기를 중시하는)책을 읽기 전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 때마다 속으로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 나하고 똑 같군. 그러다간 사람 다 떠난다네'. 이제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논리를 내세워 사람을 재단하는 못된 버릇보다 감정을 북돋아 사랑의 신호를 보내는 인격을 연마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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