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 - 도스토옙스키 단편 백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윌마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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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서평단으로써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일명 모자무싸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생각은 내가 가만히 있어도 여기저기 갈 수 있는데, 나는 여기 있잖아. 그럼 생각이 진짜 나야? 여기 있는 내가 진짜 나야?”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오래전 대학원 시절 들었던 철학 강의가 떠올랐다. 외부 철학자를 초빙해 들은 강의였는데, 두 시간 가까이 열심히 설명을 들은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상하게도 단 하나였다.

“벌레가 나고, 내가 벌레다.”

강의실을 나와 우리는 한동안 그 말을 씹고 또 씹었다. 잘근잘근.

 

그런데 《백야》를 읽으며 그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생각이 나인가. 아니면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나인가. 도스토옙스키의 《백야》는 흔히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나에게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보다 훨씬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몽상가가 만난 나스텐카는 정말 현실의 사람일까. 아니면 몽상가가 자신의 외로움과 욕망으로 만들어낸 관념의 산물일까.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도작가는 나와 궁합이 그닥이다. 이제는 알것 같아. 왜 내가 그의 글이 좋게 느껴지지 않는지. 그는 장황하다. 엄청나게 장황하다. 설명은 길고 인물들은 끝없이 떠든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배운다. 스스로를 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착각이었다. 나는 장광설과 만연체를 힘들어한다. 그리고 도작가는 장광설과 만연체의 대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읽게 된다. 싫은데 읽는다. 읽으면서 투덜거리고, 투덜거리면서도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정확하게 까려고!!!

 

《백야》의 주인공인 몽상가는 이름조차 없다. 내가 못 찾은 것인지 정말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동안 그는 끝내 이름을 얻지 못했다. 반면 몽상가가 마음에 품고 있는 나스텐카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정인이 있다. 그런데도 몽상가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아니, 사랑이라고 믿게 된다.

 

이들의 만남은 단 4일이다. 밤 세 번, 그리고 마지막 한 번.

처음에는 4일 만에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있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불같은 4일간의 사랑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간 두 사람.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그 4일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10년의 시간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고, 누군가에게는 단 며칠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기억이 된다. 그러니 4일 만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무엇을 사랑했느냐이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다.

그런데 《백야》의 몽상가는 과연 나스텐카를 사랑한 것일까.

 

몽상가는 끊임없이 말한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말하고 상상을 말한다. 어찌나 떠드는지 듣지 않고 보기만 해도 귀에서 피가 날 것 같다. 그런데 그 긴 독백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것은 아닐까. 몽상가는 현실의 나스텐카보다 자신이 만들어낸 나스텐카를 더 사랑한다. 실제 사람이라기보다 관념 속 사람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가 떠올랐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 사람은 살인을 하고, 한 사람은 사랑을 한다. 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 칼을 들고, 한 사람은 밤거리를 배회한다. 전혀 다른 인간처럼 보인다. 그런데 둘은 닮았다. 둘 다 현실보다 생각을 더 신뢰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사상을 현실보다 앞세운다. 그는 머릿속에서 인간을 분류하고, 특별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을 구분하며, 결국 그 생각을 현실에 밀어붙인다. 반면 몽상가는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상상한다. 현실을 살아가기보다 가능성을 꿈꾼다. 실제 삶보다 머릿속 삶이 더 풍요롭다. 한 사람은 관념 때문에 살인을 하고, 한 사람은 관념 때문에 사랑을 한다. 둘 다 관념 속 인간일뿐이다. 이 둘은 내가 볼때 찐따다.

 

그래서 《백야》를 읽으며 처음 떠올린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생각이 나인가. 아니면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나인가.

 

생각은 어디든 갈 수 있다. 과거로도 가고 미래로도 간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몸은 늘 현재에 묶여 있다. 몽상가는 생각으로는 누구보다 자유롭다. 그러나 그의 몸은 늘 혼자이다.

 

백야라는 제목도 어쩌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밤인데 밤이 아니다. 어둠인데 완전한 어둠도 아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다. 몽상가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렇다. 현실인데 현실 같지 않고, 사랑인데 사랑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첫사랑 이야기로 읽지 못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도작가는 《죄와 벌》에서 생각이 인간을 어디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백야》에서는 생각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삶을 살아가는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가.

 

아직도 답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진짜로 알겠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무리 그래도 내 스타일은 아니다.

그럼 안 읽을 거냐고?

아니. 싫으니까 더 읽을 것이다. 더 읽고 더 깔 것이다. 계속 읽고 계속 깔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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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가정법원에서 인생을 배웁니다
이명숙.이서원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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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분노가 가득할 줄 알았다. 가정법원에 오기까지의 사건들은 대개 누군가의 배신과 폭력, 무책임과 외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가해자에 대한 분노가 먼저 치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난 뒤 오래 남은 감정은 의외로 분노가 아니라 씁쓸함ㆍ비통함이었다.

 

법원에 오는 사람들은 대개 이미 많은 것을 잃은 뒤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최소한 지켜져야 할 것들, 신뢰와 책임, 존중과 배려가 무너진 자리에 법이 차지한다. 그러나 법이 지나간 자리는 생각보다 곱지 않다. 그것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와 닮았다. 판결은 내려지고 사건은 종결되지만, 무너진 관계와 상처 입은 마음까지 원래대로 되돌려 놓지는 못한다. 법은 무너지는 것을 멈추게 할 수는 있어도, 이미 부서진 삶을 온전히 복원하지는 못한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그 폐허 이후의 삶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법의 판단을 들려준 뒤, 심리 전문가가 그 이후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드라마는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끝난다. 그러나 실제 인생은 그렇지 않다. 아이는 부모의 갈등을 기억한 채 성장하고, 배신당한 사람은 쉽게 타인을 믿지 못하며, 가해자 역시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이어간다. 사람들은 각자의 상흔을 안고 다음 날을 살아간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다. 이것이 삶이 잔인한면이다.

 

읽는 내내 마음 한편에는 오래된 질문이 머물렀다. 왜 인간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가. 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남긴 상처를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가. 반성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피해자는 자신의 삶을 추슬러야 하는 이중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때로는 법이 지나치게 가해자 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법은 감정을 판단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억울함을 온전히 위로하지도 않는다. 증거와 절차, 요건과 기준에 따라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가 기대하는 정의와 법이 구현할 수 있는 정의 사이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한다.

 

물론 법은 누군가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가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렵게 합의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법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분명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법은 책임을 묻고 경계를 긋는다. 하지만 상처를 치유하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 세우는 일까지 대신해 주지는 못한다. 결국 그 몫은 남겨진 사람들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통쾌한 책이 아니다. 권선징악의 결말로 독자를 안심시키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의 연약함과 미성숙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읽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기보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정말 타인의 삶에 책임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오늘도 가정법원에서 인생을 배웁니다』는 가정법원의 사례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면서 누군가의 일기장이다. 누구나 누군가의 가족으로 살아가고, 관계 속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분노보다는 씁쓸함이 더 크게 남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폐허가 된 자리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이란,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살아갈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상흔위에 피는 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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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위기 - AI 시대, 누가 읽고 쓰는가?
크리스토프 엥게만 지음, 김인건 옮김 / 헤이북스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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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의 위기? 너무 뻔한데~ 우리는 다 안다. 이것이 굉장히 뻔한이야기라는 걸. 이 책은 과연 이 뻔한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접근할 것인가. 이것이 이 책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AI와 읽기의 위기. 너무 익숙한 조합 아닌가.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

"쇼츠 때문에 집중력이 줄었다",

"AI가 글을 대신 써준다"는 이야기는 지루하다. 그런데도 책은 뻔한 이야기를 짜증내지 않고 읽을 만큼 흥미로웠다. 그것이 철학의 묘미인가, 우리가 이미 체감하고 있는 변화를 읽기라는 행위 중심으로 쉽게 설명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개념은 '읽기의 외주화'였다. 이미 뭐 알고 있는 단어지만, 이 단어가 읽기에만 비롯되지 않는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인지 기능을 외주화하며 살아간다. 계산은 계산기에게, 길 찾기는 내비게이션에게, 기억은 검색엔진에게 맡긴다. 하다못해 TV를 끄고 키는 일에도 외주를 준다.

 

“지니야 TV 켜!!”

 

그렇다면 읽기 역시 플랫폼과 AI에게 넘겨야 하는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이제 사람들은 원문보다 요약을 읽고, 해설 영상을 보고, AI에게 핵심을 묻는다. 읽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위임되고 있다. 강의를 요약해 주고 문제를 내주기도하는데, 고작 읽기 정도야 뭐~

 

책은 이 상황을 다소 불안하게 바라본다. 과거 라틴어가 성직자와 소수 지식인의 언어였던 것처럼, 미래에는 모두가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음에도 실제로 읽고 해석하는 사람은 소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적었다면, 미래에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음에도 읽지 않는 사회가 될 가능성을 제기한다. “새 라틴어”라고 한다.

모두가 읽을 수 있지만, 아무나 읽지는 않는 사회. 이 표현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처럼 느껴졌다.

 

다만 책을 읽으며 계속 남았던 질문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읽기의 외주화가 반드시 나쁜 것인가. 계산기를 쓰듯 읽기 역시 도구화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읽기를 외주화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검증 능력 없이 외주화하는 데 있는 것 아닐까. 책은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지지만 답은 주지 않는다. 해답서가 아니라 문제제기서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이 말하는 질문들은 새롭지 않다. TV가 나왔을 때도, 인터넷이 퍼졌을 때도 책의 종말을 말했다. 그런데 책은 살아남았다. 늘 그래왔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읽기는 처음으로 '대체 가능한 행위'가 되었다. AI는 요약하고, 정리하고, 쓰고, 질문에 답한다. 이전의 독서 위기 담론이 "사람들이 읽지 않는다"였다면, 지금의 질문은 이거다.

 

인간이 직접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새로운 답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오래된 질문을 AI 시대의 언어로 다시 번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서 남는 건 끄덕임보다 약간의 찜찜함(?)이 남는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확신이 생긴다. TV도, 인터넷도 결국 책을 죽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 책은 누구나 읽을수 있지만, 아무나 읽을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이 부분을 책에서는 <성직자화>된다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결국 AI 이후에도 살아남는 건, 끝까지 읽는 사람, 이 책이 궁금해서 이 리뷰마져도 끝까지 읽는 사람일 것이라는 반증이다. 어때? 기쁘지?^^

 

그런데 말이야.

이 책은 꼭 끝까지 읽는 사람만 또 읽는 다는 거야. 읽어야 할 놈들은 읽지 않고 말이지.

 

세상은 참 아이러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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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감정들의 사전
이아코포 멜리오 지음, 최보민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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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런 책 꽤 읽어봤어.
《꽃의 마음 사전》, 《꽃말의 탄생》, 《비표준 감정사전》... 그 외에도 이런 류가 꽤 돼.

처음 이 장르 접했을 때 좀 난감해 했었어. 어?

이걸 어떻게 읽지?

싶은 거야. 소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고 하면 이상하게 힘들거든. 근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 공부하듯이 보면 안 되는 책이다. 그냥 하루 운세 점치듯이 후루룩 넘기다가 탁— 멈추는 거야. 그날 내 감정이 걸리는 페이지에서. 그렇게 하나씩 나를 살피는 책이야 이게.

이번 책도 딱 그렇게 읽었어. 약 200개의 감정 단어를 언어권별로 모아놨는데, 어떤 건 영어고 어떤 건 러시아어고 어떤 건 처음 들어보는 언어야. 근데 신기하게 다 알아들어. 내가 분명 느꼈는데 이름 몰랐던 것들이니까.

🌊혼족(고독을 즐기는 기술을 지닌 사람) 항목에선 "어 이거 나잖아" 하고 멈췄고,
🌊네펠리바타(구름 위를 걷는 사람) 에선 "앞으로 나를 이렇게 소개해야겠다" 싶었어.
시벨로마 같은 🌊시벰(나의 심장, 내사랑)은 남편한테 써먹어야겠다 싶었어. 여보 혹은 자기야 대신 ‘시벰’. 발음을 아주 잘살려서~ 캬캬캬. 🤣🤣
🤣나즈(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데서 나오는 자부심)에선 애들 얼굴이 떠올랐어.
아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난 이제 지는 해구나. 뜨는 해를 더 생각하는 그런 나이라니... 난 늘 나밖에 몰랐는데... 아닌가? 난 이미 나즈가 충분한가?

근데 읽으면서 계속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어.

왜 이런 책은 왜 출간되는 걸까?

아마 우리가 이전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걸 설명할 언어와 공동체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엔 가족이, 친구가, 종교가, 동네가 내 감정을 해석해줬다면 지금은 책이 그 자리를 일부 대신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사람들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저장하려 하는 거고.

이 책이 어휘력을 늘려주는 건 아니야.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걸 해줘. 삶의 해상도를 올려주는 거. 내가 원래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구나, 이런 사람이었구나 — 이름이 생기는 순간 그게 선명해지거든.

다만 비슷한 책을 여러 권 읽었어서 그런지 패턴이 보이긴 해.

낯선 단어 제시 → 짧은 설명 → 공감 → 성찰.

이 반복이 익숙해지면 새로움보다 기시감이 먼저 올 수도 있어.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감정을 설명할 단어가 필요한 사람한테는 딱 맞는 책이고, 개념이나 깊은 분석을 원하는 사람한테는 좀 얕게 느껴질 수도 있어. 읽는 방식에 대해 책마다 다른게 접그하는게 필요해.

결국 이 책은 감정의 정밀화를 통해 이미 느끼고 있던 감정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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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있었던 곳
정찬 지음 / 말하는나무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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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있었던 곳』은 역사 자체가 주인공이다.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서사보다 5·18의 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호출된 증인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읽는 동안 특정 인물에게 오래 머물 틈이 없다. 누군가를 따라가기보다 군중을 따라가고, 감정을 붙잡기보다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독자가 기억하게 되는 것도 인물의 얼굴보다 거리, 광장, 군중, 이동 경로 같은 것들이다.

많은 역사소설은 거대한 사건 속에 개인의 삶을 배치한다. 독자는 역사와 개인, 사실과 픽션 사이를 오가며 읽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거리가 몹시도... 좁다. 밀도 높은 서사와 역사적 정보가 계속 이어지면서 엄청난 정보를 쏟아낸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다기보다 역사적 현장을 천천히 걸으며 확인하는 것 같았다.

작가 정찬은 오래전부터 한국 현대사의 폭력과 균열을 다뤄온 작가다. 그의 소설은 감정보다 구조를 보여준다. 그 안에 인간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사건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 시대가 사람을 어떻게 압도했는지를 차근차근 쌓는다. 이 소설은 도시 전체를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물처럼 다룬다. 그래서 공간 묘사가 많고, 장면 전환이 잦고, 군중의 움직임이 반복된다.

배경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열흘간의 광주를 이야기한다. 많은 소설들이 광주를 상처 이후의 시간으로 불러왔다면, 이 소설은 사건이 발생하고 증폭되고 붕괴되는 과정을 시간 순으로 따라간다. 거리와 광장, 버스와 검문소, 군인과 시민, 방송과 유언비어까지 세세하다. 읽다 보면 작가의 기록에 대한 집착이 느껴지기도 한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 잊히게 두지 않겠다는 의지. 그 의지는 강하다. 그 강한 의지가 기록의 밀도를 빼곡하게 만든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몰입이.... 솔직히 조금 지루했다.

5·18을 다룬 소설을 말할 때 많은 독자들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감정과 정서를 건드리고, 시점의 혼란(?)으로 독자에게 심각한 몰입감과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잔인한 경험을 하게 한다. 『소년이 온다』는 몸으로 기억하게 하고, 이 소설은 머리로 기억하게 한다. 이건 마치 MBTI의 F와 T 같다고 할까?

또 오래된 정치 드라마들도 자주 떠올랐다. 사건 하나를 중심이 아니라 권력 구조, 사회 분위기, 군중의 움직임, 도시의 변화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 책은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한 장면을 넘길 때마다 시대 전체를 같이 통과해야하는데 누군가는 이 밀도가 굉장한 장점이겠지만, 누군가는 피로감으로 느껴질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이 소설은 최근의 정치적 충격 이후 다시 쓰이고 확장된 소설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대가 생겼다. 지금 이 시대를 통과한 사람이 다시 쓴 광주는 어떤 모습일까.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런데 읽는 동안 강하게 남은 것은 새로운 질문보다 기존 질문의 보강 정도?! 24년 전 『광야』를 현재 시점으로 업데이트 한 건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 조금은 아쉬운 이야기를 해볼까

우리는 종종 ‘좋은 소재’와 ‘좋은 소설’을 혼동한다. 특히 5·18처럼 역사적 무게가 큰 사건은 더 그렇다. 이런 소재는 강력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반드시 기억해야하고, 이 사건은 종료된 듯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보다 작가보다 먼저 이 소재가 책의 전면에 등장에 평가받는 순간들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 이 소재로 쓰여진 대부분의 소설들은 좋은 소설을 넘어 훌륭한 소설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소재가 좋은 소설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누구나 아는 몹시도 평범한 사실이야. 중요한 역사를 다뤘다고 자동으로 좋은 소설이 되지도 않는다. 이는 독자가 책을 샀다고 그 역사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누군가가 ‘ 우 ’하면 ‘아’ 하고 따른다. 전형적인 군중심리. 역사 소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이런 군중심리를 호출하게 된다.

이런 소재의 소설은 읽어야 할 것 같고,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고 해야할 것 같은 그런 심리는 도대체 뭘까??(아직 모르겠다. 답을 알면 알려주세용~)

이 책이 기록인지 소설인지 묻는 질문에는 아직 답을 못 내리겠다. 다만 한 가지는 남는다. 『그들이 있었던 곳』은 기억을 복원하려는 소설이라는 것. 그리고 그 기록의 복원의 성공여부를 떠나 이 소설은 사람보다 장소, 개인보다 군장, 감정보다 시간을 잡고 있다. 때문에 책을 덮고 나서 남은 것은 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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