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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톨 씨감자를 심으면 보통 10~15배의 감자를 거둔다. 땅콩은 그 백 배를..깨는 천 배다. 그게 그렇다. 대한민국이라는 남한 땅에서 작금 활개치는 '친일파'들의 번식 행태가 그렇다. 참으로 기막힌 일들이 도처에서 마구 벌어지고 있다. "독도는 일본땅"이고.. "위안부는 돈벌러 제발로 간 성매매 여인들이니 소녀상은 철거"시키고".."일본은 우리의 근대화 은인"이므로.."원수를 사랑하듯 일본도 사랑하라"고 외친다. 일본사람 아니다. 한국인들이다. 이런 걸 떠드는 이들이 한 둘 아니다. 극소수가 아니란 말이다. 인터넷 들어가면 입이 딱 벌어지는 일들 비일비재다. '관제 데모'로 모두 설명하기 어려운 구석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남북한 관련해서도 이런 맥락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노무현이 NLL을 포기하고 김정일에게 갖다 바친 증거라고 유세장에서 믿거나말거나 국가기밀 문서를 마구 흔들어대면 거기에 열광하는 사람들 또한 그 세가 만만찮다. 야당에게 '빨강'은 금기색이다. 당장 빨갱이 종북좌파 딱지다. 그런데 새누리당의 깃발은 시뻘건 색깔이다. 유니폼도 시뻘건 걸 입고 선거판을 휩쓸고 다닌다. 누가 거기에 시비거는 이들 없다. 야당도 그렇다. 그거 시비하면 역풍이 두렵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남한의 조선일보 조선 TV방송은 같은 '조선'인데도, 우리 남한사회에서 [조선일보] 아닌 '조선'이란 단어는 자기검열 용어다. 그렇게 '색깔' 하나로 세상을 편가르며, 같은 색깔 하나가 한 쪽에는 주홍글씨로..다른 쪽엔 체제수호 상징으로 전파된다. 이 쯤되면 나찌 정권의 선전상 '괴벨스'가 한 수 배우러 올 만도 하다. 안익태의 교향악 공연을 친전한 히틀러의 감탄이 괜한 것 아니다. 

  이들은 국정 역사부도에 제주도 을릉 독도가 왜열도와 같은 색깔로 칠해지고 남한 땅이 단군조선 영역에서 비껴난 왜열도 비슷한 채색구분을 애써 모르쇠 하면서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뉴라이트 깃발을 흔들어 댄다. 촛불집회에 맞선다는 이른바 맞불집회장에 나부끼는 태극기가 바로 그 깃발이다. 그 깃발이 실은, 태극기로 위장한 '일장기'에 다름 아니다.
  이들이 뜬금없이 들고 나온 그 거대한 '성조기'도 본질적으로 '일장기'다. 대일 항쟁기, 친일파들이 조선 8도 방방골골을 누비면서 흔들어대던 그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뀐 것뿐이다. 그 일장기를 내걸고 조선의 농.임.광산 자원을 반출하는데 앞장서고, 조선의 젊은이들 300만 명을 징병 징용 정신대로 내몰아 왜 열도는 물론 동남아 남북태평양 사할린 지나 위그루 사막까지 전개시키는데 주구走狗로 견마지로를 다 바쳤다.
  친일파들의 머리속 사상 이념은 가족과 개인의 일신 영달이라는 계급적 기득권이다. 국가나 민족은 그걸 지켜주는 보호막에 불과하다. 그 보호막이 제 구실을 못하면 다른 걸로 바꾸면 그만이다. 이들에게는 계급의식이 이념이고 신념이다. 그래서 생태적으로 '권력지향'이다. 권력은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지켜주는 체제적 '끈'이다. 이걸 놓치면 모든 걸 잃는다. 일반인들에겐 추상적이고 몰체감적이지만, 이들에겐 매우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생존의 항등식이다. 그래서 매국노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해 되시겠는가?
  "피도 눈물도 없는" 반동족 반인륜 반상식인 이들의 사고 성향과 그 잔혹했던 패악적 행태의 내면적 배경이 설명되어지는 연유다. 권력의 충직한 속성이기도 하다. 그 부류는 항시 인류사의 항수였다. '현대 시민민주주의'에 한 점 보탬은 커녕 그걸 막고자 애썼던 이들 치고는 뻔뻔한 개평꾼이고 참으로 고약한 말종이기는 한데, 부인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다. 민족모순이 청산되지 못한.. 외세 분단체제하 주변부 부르좌 사회의 피할 수 없는 정의의 괴리다.  

  오늘의 정치 사회적 시국 상황은 결국 이런 민족모순 외세개입 체제가 빚은 현대 인류사적 화약고의 내적 비극이다. 동시에 반민족 친일매국노집단 '청산'이라는 인류사의 보편적인 역사적 과정을 '기각'당한 세계사적 역사 모순의 집약적 포커스다. 이러한 거시사적 위치속에 민중의 피땀으로  일궈낸 물량경제적 지표가 던져주는 위안이 과연 어떤 근본적  민족 민중 에너지로 승화될런지, 아니면 양극 양분 고착화의 분열적 지리멸렬 기제로 작동될런지 2017년은 중차대한 변곡점의 기로에 처해있다고 보여진다. 山人은 그렇게 역사과학적 시각으로 예견한다.
  오늘의 현상이 누적된 우리 사회의 반역 불륜이 잉태한 번식의 결과물이라면, 현재의 '촛불 탄핵'과 반동의 대치전선은 헌재의 결론과 맞물려 향후 우리민족의 지평을 통합이냐 쇠멸이냐를 가름하는 분기점으로 규정짓는 결정적 시기로 본다. 역사의 후과는 분명히 그렇게 결말지어질 것이다. 시.공간을 넘어선 인류사 교과서가 그렇게 일러준다. 외세가 빚어놓은 반쪽의 광복에 기생해서 뿌려진 동족 상쟁의 전란과 각각의 흑역사는 "시작은 초라하지만 결과는 창대하리라!" 그대로다. 
  임진란 초반 조령이 뚫리자, 집권 서인세력 조정은 전라.경상을 왜에 떼주고 화약하자 했다. 그 때 유성룡이 나섰다. 청일전쟁 때도 그랬다가 원세개의 '청.일 조선 분할론'을 러시아 개입과 조정의 일치된 국론으로 저항해 막았다. 그러다가 종래엔 팔아넘겼다. '을사 5적'이 다 아니다.  그들은 얼굴마담이다. 조정 핵심일당이 한통속이었다. 200여년간 이어져 온 노론세력과 순조이후 권세를 잡은 김씨-조씨-민씨 척족의 세도권력이 야합한 '계급 기득권'의 "이익 공유" 농단 앞에 국가는 이미 형해화 된 송장이었다. 그러니 고종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일제 작위 받은 자가 병탄 초기에 200여 명이다. 그들이 바로 그들이다.  박정희-근혜 정권의 권력유지 행태..이너써클의 국정농단 행태가 판박이다. 우연 아닌 썩은 권력 종말의 '정석'이다. 계급적 봉건지배권력체가 걷는 '제국 소멸'의 길 그대로였다.  그랬다. 지금이 그 때보다 달라지고 나은 게 뭔지.. 생각있는 시민 각자의 몫이다. 촛불집회 박사모집회 아니면 침묵의 방관자로 갈리는 기로다.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두 다리 성하면 반도 전역과 만주간도를 그래도 내 강토라고 제약없이 다닐 수 있었던 시절과 지금을 생각해 보라!
 
  꽉 막힌 불통 긴장을 쏟아내는 안팍내외의 전쟁위협에 녹아나는 하시절을 답답하다 못해 숨막히는 이 세월이다. 허나, 이 땅 어느 하늘아래 밤마다 축배의 잔을 치켜들며 "지금 이대로~!".. "위하여 위하여!" 건배하는 그들의 代 이은 만찬이 요즘 '순실이'로 인해 일시 불편한 한 편에선, 200만 같은 동족 젊은이들이 서로를 "주적" 삼아 휴전선에 사생결단 묶여있다.
  남북 군비 연간 400억불..세계 4~5위권 군비부담을 짊어지고 있다. 이스라엘 뉴질랜드 GDP 수준이고 아프리카 최상위권 국력이 그렇게 동족대결 소모재로 사라진다. 대일 대중 대동북아  안보 대신, 동족상쟁의 분단안보가 자리하고 있다. 중국 비호를 받는 70년 단일독재 북한 김씨 왕조와 미국 일본 엄호를 받는 남한 친일지배권력의 상존은 유일무이 세계 분단국의 불가사한 특이 병존체제의 결정판이다. 밖에서 보는 눈이다. 우리의 절대동맹국으로 목매는 미국내 식자 중산층 다수가 뜻밖에도 '코리아' 하면 (부정적 뉴스로 보도되는 적대국) '북한'으로 알고 있다는 모 방송(인간극장) 출연 미국인의 얘기는 내국인과 다른 국제 사회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남북한 구별이 우리같지 않은 것이다. 우린 그저 "코리아!" 하면 다들 "아, 대한민국?" 인 줄 알지만 아니다. 남·북한 모두 코리아..한반도 한민족 모두 코리아인줄 그들은 바로 알고 있다.
  북한주민의 삶은 당장 논외로 치고, 오늘날 우리 사회의 소득격차 사회격차는 실로 심각하다. 하위 20%는 '삶의 질' 측면에서 조선말 노비층과 별다른 차이 없는 사회 경제적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게 경제사학자들의 진단이다. 상위 10%(10분위)가 국가총소득(GDI)의 50%를 가졌고, 소득격차 지표인 '지니 계수'는 0.6에 달해 멕시코 등 중남미 보다도 나쁘다. 부패한 친일 기득권 세력 미청산이 불러온 정치.사회적 후과다. '도전과 응전'은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운명적 해결 과제다. '촛불 혁명'은 그런 현대사적 맥락의 중심에 자리한 살아있는 실체적 역사의 변곡점이다.
  
  이승만~박정희..박근혜=대한민국=자유민주 체제! 를 동일시 선전 선동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 여전히 저강도 전술로 금압받는 '사회적 의제'다. <블랙 리스트>는 표층수의 일각이다.  일제의 군국적 전체주의 유산을 불하받은 친일 정치.언론.재벌 연합의 메이저 커넥션 슬로건이 전략이라면, TK-호남  지역 갈라치기와 저학력 빈곤층 ..농촌.노인층..도시의 노령부녀층은 전술적 동원집단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탈북새터민과 '일베' 등 현실에 좌절한 젊은 자생층들을 동원세력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부려먹고 있다.
  1945년 9월 남한의 통치권력을 온전히 인계하고 떠나면서 조선민중에게 일갈한 식민권력자 사이토의 "우리는 패해서 나가는 것 아니다..잠시 (미국에게) 맡겨둔 것이다..100년 안에 다시 들어온다!" 는 지금 현실이 되어가는 양상이다. 평화협정을 외면하는 분단.휴전협정의 당사국 미국 군산복합체의 지속되는 '악의 축' 전략과 절대권력 체제유지에 전일적 동원역량을 몰아넣는 김일성체제하 김정은의 공포독재는 상호 구실을 주고 받으며 저마다의 내부 균열과 민족의 위기를 부채질 하고 있다. 각각의 누적된 모순으로 누란에 걸린 건곤일척의 엄중한 현실앞에 생각있는 씨알 시민은 나라와 민족의 진운에 대하여 고민이 깊어진다.

  이러한 민족의 엄중한 현실앞에 북한정권의 핵 전략은 미국의 동북아 군사외교적 고강도 전략인 사드의 한반도 남부배치와 명분을 주고 받는 권력의 지렛대이자 반면에 주변국들의 꽃놀이 패다. 이들은 한반도를 마작판 수패 굴리듯 우리 민족의 동질적 주권적 존엄성을 희롱하면서 저마다 군비확장과 '전쟁 가능국가' 부활의 핑계 거리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핵에 올인하는 김정은의 체제유지 전략의 지속성은 되려 내외적 위기에 점점 봉착해 가고 있는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분명한 권력적 존재집단인 친일숭미 커넥션은 성조기 시가행진으로 주권국 내부문제에 개입해달라고 매달리며 위안부 협의를 역사적 합의로 강변하는 반민족 반민주적 행태에 거침이 없다. 둘 다 민족의 화해 평화통일, 사회통합에 큰 우환거리다.
  이들은 남북한 저마다의 체제에서 크게 보면, 그냥 절대지배권력 또는 계급적 기득권 그 자체만을 위한 '체제 유지'가 유일한 목적으로 보인다. 연이은 홍수와 흉작..부실하기 짝이 없는 치산치수 현실로 200만, 300만 인민들이 죽어나자빠져도 털끝만큼 책임지는 것 없이 되려 체제유지를 위한 절대권력에 광분한다.  주권 시민 연 1천 몇백만여 명이 광장에 촛불 횃불 들어도 입만 떼면 거짓말로 가리기에 급급하고, 나라와 국정이 혼란과 파탄에 빠지거나 말거나 제 자리 보존을 위한 갖가지 꼼수와 억지로 국법위에 군림하며 무슨 치외법권자나 되는 듯이 헌정 유린을 멈추지 않는 '근혜'와 '새누리'의 무책임한 후안무치 뻔뻔함도 별 대차 없는 막상막하다. 불쌍한 한반도여.. 민중이여..만백성들이여!  '수구 꼴통'이라는 작칭도 아깝다. "수구 우파"? 글쎄다. 이 분류가 과연 얼마나 적절한 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결론적으로 '수구'는 역사관이 없거나 박약하다. "내 코가 석 자"로 제 누리는 밥그릇 지키기다. 그러니 사실은 좌.우도 없다. "그럼 뭐가 우파 좌파냐?" 지금부턴 이걸 좀 언급하고자 한다.

  흔히 맑스의 '계급론'을 드는데, 이건 선행적 계급에게 조응해서 만들어진 19세기 용어다. '계급'이라면 고대 국가체제가 형성되고 완고한 율령이 자리잡으면서 상수常數가 된 "지배 계급"이다. 이 계급의식은 강고하고 끊임없이 지속가능한 내재적 동기유인을 강렬하게 깔고 있다. 그 핵심은 [착취 구조]다. 그걸 합리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권력의 설득력 여하에 따라 생명력의 장.단이 갈린다. 그러나 총체적으로는 권력적 계급집단은 다소의 '구성원적 결'은 교체되지만 지배체제의 연속성.계속성이라는 교체권력의 필요성에 의해 대체로 온존된다.
  이러한 계급의식과 이해관계의 조정.해결 방식이 크게 달라진 게 17세기 유럽의 시민혁명이다. 직접적으로는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생겨난 좌.우파다. (여행 버스 안에서...) -다음에 계속!

  루이 16세와 오스트리아제국 황손녀인 앙트아넷을 단두대로 처형한 혁명세력은 혁명이 성공하자 오래잖아 두 패로 갈라선다. 그리고 그들이 장악한 베르사유 왕궁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각기 혁명본부를 둔다. 왼쪽은 '자코뱅(당)', 오른쪽은 '지롱드(당)'이 그것이다.  좌편은 완전한 '공화정 파'이고, 우편은 영국을 롤모델로 한'입헌 공화정 파'다. 상대적으로 전자는 당시대적으로 "급진(Redical)" 소릴 듣고..후자는 "온건"하단 소릴 들었다. 이게 좌파 우파 시발이 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지향하는 세상과 이념 방법론이 둘 다 같았다. 말하자면 '동종 이란'이다. 둘 다, 절대군주정을 거부하고.. 시민(당시에는 제한적 시민)계급에 의한 공화민주주의 수립..개혁불가 혁명투쟁 등이 동일 동질적인 혁명동맹군이다. 갈라진 것은 권력에 대한 세력분할의 합의 불발이 본체다.
  좌:우가 진보:보수로 전화 한 건 맑스-레닌의 1848년 인터네셔널 콤뮤니즘 선언 이후다. 사회주의(공산주의) 노선이 밝힌 노동자 중심의 자본주의 질서재편 요구와 잉여가치론..유물론적 변증사관..생산수단의 국유(공공)화와 생산잉여의 공동분배 등은 당시에 급진혁명의 깃발이었다.  이게 앞선 시대의 공화좌파를 "덮어쓰기" 하면서, '진보..좌파'..급진적 진보로, 상대적으로 부르주아 자본가계급은 '보수..우파'..온건한 진보로 변환됐다. 어쨌거나 이렇듯 진화(?)한 신개념 "진보..보수"도 큰 틀에서는 동일한 출발선상에서 진전돼 온 쌍생아다.

 

  이를테면, 첫째로 둘이 본시 한 몸으로 봉건적 절대군주정체를 시민적 계급혁명으로 혁파하고 들어선 새로운 정치체제의 주체세력이란 점이다. 둘째로 14~16세기 르네상스를 17~8세기적 시대정신으로 이어받은 '자유주의' 정신의 사회.경제적 결과물이란 점이다. 셋째로는 이들의 지향가치의 출발점이자 사회적 통합정신이 '보편적인 자유'..'청렴한 정의'..'평등 균형 사회의 실현'이다. 이게 서구 부르주아 보수의 출발점 이념이고 그런 가치를 나름대로 일정하게 추구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생산방법과 생산력의 혁신이 끊임없이 획기적으로 이뤄짐에 따른 경제력의 대규모화..경제력 집중..대량화된 기계적 생산설비와 노동자 계급의 발생..경제권력의 정치권력화에 따른 독과점 발생과 사회 경제적 빈부격차 확대는 새로운 사회 문제를 쏟아냈다. 따라서 이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유지와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방법도 "현상 유지"로 풀어질 일이 아니었다. 끊임없는 "개혁"과 쉼 없는 "혁신".."온정과 사회적 기여".."개인적 청빈"만이 기득권 보수집단인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주의 체제가 맑시즘과의 투쟁에서 이겨내고 살아남는 생존 전략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과 그 함의를 생각한다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자칭하는 '보수'가 그 태생적 역사성이나 지향 가치는 물론, 정치 사회적 책무성.. 행태 등 어느 하나라도 "보수적 가치"에 합당한 것인지 "맹목적  수구집단"으로서 사회공동체의 합목적적 상식의 질서를 훼손하는 맹동성 준동세력인지 자문해 볼 일이다. 
  
  "보수"도 다 같은 게 아니다. 굳이 들자면, 수구적 보수..온건 보수..중도 보수..개혁 보수..진보적 보수 등이 있다. "진보" 또한 그렇다. 온건 진보..중도적 진보..강경 진보..혁명적 진보 등! 이 양 편 양 극단에 극우, 극좌로 불리는 정치적 이념형 극렬 집단이 존재한다. 히틀러 나찌와 현재의 일본 자민당 아베정권이 전자라면,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은 후자로 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큰 '박사모'..'일베'류는 이념적 극우 아닌, "극우 정치추종적 극렬 집단"이 적확한 성격일 듯 하다. 그런데 '마오'는 코뮤니즘에 중화주의와 다민족 포섭주의가 섞여 있고, 김일성 주의는 강한 민족주의가 가미된 복합적 성격을 띠고 있어 고전적 의미로 일도양단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사상..이즘(~ism)을 정형화 해서 규정짓기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공론이나 담론보다는 정치적 쟁투의 강력한 수단으로 이용돼 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公論 하나를 짚어본다. 한국 사회에서 "좌파"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빨갱이.."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의미상의 동의어다. 이는 북한에서의 불순 성분 대명사인 '부르주아' 보다 더 지독한 악칭이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좌파든 우파든 그 층이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인 '좌파'의 의미는 아무리 좌로 잡아도, "적극적인 개혁"..성장과 분배 균형에 방점을 둔 "복지 강화"..사회 정의와 미래지향성을 추구하는 본래적 의미의 "진보적 사고" 를 말한다. 또 다른 기준(아랫단에언급 참조)으로는 집권당에 반대편에 서 있는 '야당' 지칭으로 "좌파"라 부를수는 있다.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보수'다. '더불어민주당'이 딱 이 정도다. 미국 민주당~영국 보수당~독일 기민.기사당의 "비빔밥" 수준이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기조에 기반한 상대적 개혁진보성향이다. 이걸 공산당식 좌파라고 턱도 없는 악을 쓰며 자기가 보수라고 자칭하고 뒤로 잇속 챙겨먹기 바쁜 거다. '정의당'은 여기에 계층계급에 천착한 노동자성을 조금 더 강조하는 실용 노선을 간다는 점에서 서구 여러 나라에서 현재 집권하고 있는 사민당 수준이다. 정의당이든 사민당이든 브라질 룰라의 노동자당이든, 노동자성을 강조하고 그 계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진보' 혹은 '보수좌파' 쯤이다. 해산당한 민노당의 경우, 분단된 민족 현실에 강한 문제의식을 두고 자주적인 민족통일을 통한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정강노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강경(?) 좌파라 할런지 아리송하다. 왜냐하면, '민족'을 강조한 지점에서 본래적 사회주의 노선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본류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거기에 주체사상을 일정부분(?) 수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게 맞다면 일반적인 사회주의 노선 보다도 소위 '김일성 주의'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민족좌파' 쯤일런지... 역시 아리송하다. 사상이나 이념이란 게 현실적 접목 방식에서 유동성이 크고, 가치의 속성상 인식이 주관적이다. 따라서 좌파 우파 진보 보수 등 몇 몇 단어로 쉬이 판단하거나 재단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는 양심의 자유와도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는 내면세계에 대한 자기결정권적 인권의 측면도 크다. 이걸 정치적 이해관계로 써먹는 것 자체가 反정치적이다.  
  어쨌거나 민노당 해산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다면 다양성 허용 범위에 대한 시험대였다"는 국제사회의 비판적 시각과 국내적 찬반 논란은 물론, 극우 정권에 의한  정치적 공안탄압과 '헌재'의 독립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가운데 사법적으로 종결되었다. 그럼에도 이명박정권 때 다시 생겨난 탈북자 조작간첩사건부터 좌파 종북 소동은 여전하다. 
  山人이 객관적 역사적 학문적인 관점에서 소견컨데는,  현재 국회의석을 가진 대한민국 정치결사체(정당)에 정체성 불명의 집권 극우 정당과 몇몇 보수~범보수 정당은 있으나 좌파 정당은 커녕 혁신 정당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여전히 색깔을 통한 '공안 정치'가 판을 치고..선거철엔 어김없이 등장하고 약발이 먹힐까?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줄여 논해보자면, 이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배경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는, 친일-남로당 출신 박정희의 '레드 컴플렉스'가 혁명공약 1장에 박아넣은 "반공을 국시로 한다!".  이게 그의 18년 집권동안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동력이 되고 사회 전체의 내면화 기제로 작용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됐다. 둘째로는, 박정희를 포함한 수십 년간 지속된 정통성 부재의 역대 독재정권이 이를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무기로 고비 고비마다 써먹었다. 셋째로는, 6.25 한국전쟁으로 입은 "전쟁"과 사상적 결벽에 대한 국민적 트라우마가 그 토양이 됐다는 점이다. 
  "빨갱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열하고 치명적인 공격 수단이다. 근거도 없이 마녀 사냥식 덮어씌우는 '좌파 프레임'은 '저비용 고효율'의 가장 많이 남는 장사다. 이 말을 쓰는 사람들은 입만 뗏다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올린다. 세상은 돌고 돈다는 말이 이것이다. 1963년 11월 군복을 벗고 윤보선과 6대 대선에서 맞붙은 박정희가 받은 가장 괴로운 공격이 "박정희는 남로당원으로 군에 침투하여.. 여순반란 사건 실질 주모자.." 였다. 이 사건으로 그는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았는데, 한국전쟁 초반 대혼란기에 과거 상관이었던 이용문에 의해 기적같이 소령 계급장을 달고 복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후일 朴은 그 아들 이건개를 약관 35살에 서울시경국장-치안본부장-서울시장으로 은혜를 갚는다).
  윤보선이 이걸 문제삼은 것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지금 상대 후보가 나를 '매카시'적 수법으로 마녀 사냥을 하며 국민들을 혼란시키고 있다.."며 개탄을 쏟아냈다. 그러던 그가 집권 내내 되써먹으며 공안통치 연명하고 후계자 전두환-노태우가 따랐다. 그러나 '문민~국민~참여 정부'도 이걸 치유 못했고 이명박정권이래 근혜정권까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 이 "빨갱이"가 남북간 대화와 왕래, 이산가족 상봉 및 금강산 개성 등 경제 문화적 교류 등으로 더 이상 써먹기 불편해지자, "좌파"로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이 단어는 다시 "종북좌파"라는 기발한 단어로 진화하며 병행 등치 시켰다. 즉, 좌파=종북=빨갱이의 등식이다.  보수도 못되는 수구 친일 지배잔당은 보수 정치세력을 "진보 좌파"라고 을러대며 색깔을 입혀 자신들을 '보수'로 치환시키는 것이다. 진짜 생각이 그렇다면 知的 '무지렁이'이고, 알면서 그러면 아주 "나쁜" 人性이다.
  "빨갱이"는 옛소련 중국 북한 등 일부 공산주의 국가의 국기 바탕색이 '빨강'을 빗댄 적대적인 형용사다(*과거 공산권인 동구라파 나라들의 국기바탕색이 빨강은 거의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좌파 정당"이라는 건데, 말하자면 "공산주의를 지향 또는 북한정권을 추종하는" 빨갱이 혹은 종북 정치집단이고..그런 개인은 공산주의자라는 지칭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다.  남한 사회에서 이런 말은 북한에서 반동으로 몰린 월남자 가족과 같은 격이다. 분단과 남북관계를 정치에 끌어들이고, 지역 계층에 더해 무책임한 사상 공세로 찢어발리는 분열 정치공학의 전형이다. 반이성적 광기가 아닐 수 없다.  무슨 권리와 믿는 구석 있을까?  이른 새벽 낮게 깔린 자욱한 물안개다. 우리 사회의 낯익은 내면 풍경이다.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옛소련에서 집권자인 스탈린은 보수우파..트로츠키는 레닌시절 보수좌파로 불리다가 스탈린에 쫒겨난 후엔 진보좌파 또는 급진좌파로 불렸다. 중국도 그렇다. 모택동이 보수우파라면, 등소평은 진보좌파였다가 복권되고 권좌에 오르자 보수우파가 됐다. 교과서적으로 본다면 둘 다 역사적 맥락에서 진보..좌파다. 그럼 왜 그럴까?
  보수..진보 개념의 또 다른 구분 기준이 권력자의 피:아 어느 쪽이냐에 따라 권력측은 우파, 그 반대편에 서면 좌파로도 불린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박근혜는 우파(*드러난 통치행태를 보면, 새누리나 그녀나 '우'도 '보수'도 아닌 무이념의 '극렬 극우다'),  이명박이나 김무성은 (친일)좌파 보수로 불릴만 하다. 고정 불변이 아니란 말이다. 순전히 주관적인 상대적 용어다. 따라서 사회과학적인 전문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학술적인 용례로 사용하기에 적절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걸로 죽기살기식 싸움판이다. 침 튀기면서 사상검증이니 어쩌니 삿대질 하던 정치인들이 어렵잖게 그 정당으로 옮겨가는 일이 다반사다. 유치하고 웃기지도 않는 난장판이다. 정치불신이 사회불안으로 전이되는 경로다.
  이런 와중에 국내정치판에 뛰어든 반기문은 "나는 진보적 보수주의자다"라는 글로벌틱한 멋진 말 한 마디가 뭔 잘못인지 낙마했다. 뭣이 문제였나? 그건 역으로 우리 사회가 보수 진보의 개념이 명확하게 역사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분단의 논리에 지배당해 온 반증이다. 파행적 정치와 그 논리로 지배해 온 정치집단의 이분법적 속임수가 불러온 집단적 국민의식의 왜곡 결과다. 거기선 감귤이 여기선 탱자가 된 것이다. 문제는 탱자가 귤 행세를 해 온 것이다. "친일파가 보수 행세를 하는 나라"의 백성들이 겪는 혼란이자 비극이다.

 

  山人이 냉정하게 판별해 보건데는, 역사.현실적 본래의미로 재어볼 때 한국정치판에서 보수 우파(익)은 '민주당'과 '국민의당' 쯤이다. 그것도 '온건 보수'다. 진보 혹은 좌파라고 억지를 부리자면 '정의당' 쯤이다. 새누리(자유한국?)가 볼 땐 제일 먼 곳에 있으니... 그러나 정의당도 민주당 보다 아주 조금 더 나간 수준이다. 넓게 보면 "보수적 진보" 또는 앞서 언급한 바 "보수 좌파" 쯤?이다. 이를테면, 서구의 좌파라는 '사회민주주의'(*더러는 사회주의와 구분하여, '개량사회주의' 또는 '사회복지주의'라고도 부른다) '사민당'과 비교적 유사하다. 바른당  대선후보들의 경제 사회 공약을 보면 정의당과 뭐가 다른지 모를 정도다. '큰 정부론'의 확장형이 오늘날 세계의 보편인 점을 감안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걸 좌파 우파 타령으로 선거표 따먹으려는 정치 후진성과 이념적 폐쇄성이 사회 갈등의 뿌리 아닌가싶다. "~쯤"이란 건 서구처럼 상대적으로 명확치 못하다는 뜻이다. 정강 정책이나 정치적 주의 주장..행태(비헤비얼리즘)적 측면에서 그렇게 본다.  
  '새누리(자유한국당?)..바른정당'? 이들은 겉만 정당이지 본질은 권력적 이해관계로 모인 모리배들의 수직적 집합체다. 이 글 맨 앞단에 언급한 '계급적 기득권'을 위한 이익의 공유를 향해 모여든 정체성 불명의 변형된 친일파 잡탕나부래기다. 그래서 오히려 구심력이 질기다. 분열보다는 '이익의 단결력'이 강하다.  되려 자유주의적 오리지널 보수성향이 강한 현재 야권 정당들이 그 원심력으로 인해 이합집산이 빈번하다. 대비되는 지점이다. 친일수구집단 장기집권의 밑바탕이기도 하다. 이런 걸 정치의 아이러니라 한다. 이들은 물론 보수도..수구적 보수도 아니다. 그럼 뭐냐? 그냥 새누리..바른당이라 부르면 된다. 이념적 가치 중심의 정치결사체로 보기 어렵다. 꼭 우긴다면, 반공..종북좌파 척결이 정치이념이라면 이념일 수 있다. 그런데 민족이 통일되거나 북한체제가 변화된다고 하면 이런 구호도 자동소멸 되니 이념일 것도 없이 그냥 정치적 선동 구호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당결사체로 보기 쉽잖다는 말이다. 이들의 태생적 컴플렉스가 보수:진보 편가르기에 열심인 까닭이다. 혹여 이념이라 우겨도 문제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핵심적 지주다. 사회주의적 이념의 경우, 다만 분단의 특수한 상황아래 국민적 합의로 일정한 법률적 제약을 두고 헌법재판소에 엄격한 판단을 맡기고 있다.  따라서 영원불변 금지 아닌 합법화 구성요건 충족시기 까지(그 때가 언제일진 모르지만) 한시적 유보의 성질로 보는 것이 보편적 합리해석이라고 소견된다.  아직 우리 대한민국은 "반쪽 민주주의"를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시민들은 겉으로만 헌법적 주권자이지 실상은 흑싸리 껍데기였다. 대중조작에 놀아나며 환호하는 열성적인 팬클럽 아니면 침묵하는 다수로 여기저기 동원되고 아전인수 해석당하는..심하게 말하면 민법상의 '물권적 객체' 쯤~ 이라 해도 과한 비유 아니다.  "근혜-순실이"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 국민이 신성한 투표권을 행사해서 현명하게 뽑은 대통령의 실체가 말해주고 있다. 뉘 탓할 일도 아니다. 쥐구멍에 머리 처박기는 커녕 또 근혜류 동종이인에 묻지마 투표할 선량한 유권자들 여전히 늘어서 있다. 그들 위에 친일파 못지않게 똑같이 매국매민에 앞장 설 상부구조물도 역시 늘어서 있다. 대한문 광장에서..일베류 인터넷 공간에서 그들을 만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묻는 당신에게 山人이 되묻고 싶은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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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야사나 목민신서 매천야록 등에 나오는 공통된 말이 있다. "미꾸라지는 개울을 어지럽히고.. 간신은 사직을 어지럽힌다"는 말이다. 조정에 들끓는 간신의 폐해를 탄한다. 이와 비슷한 법언(法諺)도 있다. "미꾸라지는 강물을 흐리고 악법은 세상을 흐린다". 후자의 두 말을 합성하면 '법꾸라지'다.   

  요즘 '법꾸라지'가 유행어 중 하나다. 김기춘에 대해 박지원이 처음 비꼬아 붙인 말인데 바로 귀에 꽂혔다. 참 잘도 붙인 별명이라 탄복했다. 山人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누리꾼들 반응은 삽시간에 실시간검색어(실검) 1위로 뜨고 이를 받은 언론들에 의해 '국민 별명'이 됐다.  이런 것도 능력이다. 말하자면 그는 '언어적 함의 정치'의 고단수다.
  군인은 총으로 싸우지만, 정치는 말로 싸운다. 대중 정치인이 갖춰야 할 제1의적인 자질이고 자산이다.  돈도 명분도 정치생물을 움직이는 중요 요소이긴 하나, 사회적 이목과 이슈를 이같은 짧은 한 마디에 담아 정치의제화 시키고 시대적 담론으로 집약시키는 탁월한 언어 선택과 구사 능력이 거저 생겨나는 건 아니다. KTX급 두뇌 회전과 순발력 있는 정치감각도 있어야겠으나, 무엇보다 개인적 삶의 곡절에서 뽑아낸 사회관통력을 효모 삼아 세상살이에 대한 성찰적 발효가 익어갈 즈음에 나올 수 있는 촌철멘트다. 바지런함의 대명사 박지원의 흔치 않는 사업적 이념적 정치적 편력의 다양함과 양극을 오르내린 부침이 긍정적으로 응결되어 빚어낸 결과물로 보인다. 물론 같거나 그보다 더한 경험을 가진 동시대인이라고 다같을 수도 없긴 하다. 역량..관심..분야의 차이점이 섞여있으니 스스로 자괴할 일도 비교삼을 일도 아님을 토(吐) 단다. 경제학적인 용어이긴 하지만..누구나 '(자신만의) 비교우위'가 있으니까.
  특정 정치인을 칭찬하는 것 아니다. 대중을 움직이는 사람이나 그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 또는 직업인들의 언사와 행적이 끼치는 대사회.시민적 영향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자칭 타칭 소위 사회지도층..정치지도자라는 이들의 이상스런 언행으로 만백성 민중의 정신과 판단력을 갉아먹는 너구리 꽁쥐같은 부류들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많고 그 설쳐대는 해악이 막심하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5공 청문회나 최순실 청문회나 30년 시차를 두고 개체만 다를 뿐, 등장 인물들의 한결같은 뻔뻔 오만함 앞에 주권자는커녕 봉건 영주들 발밑에 켜켜이 때절은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이 땅의 정치적 노예의 자화상을 들여다 보게 된다. 더러는 상대적으로 유복한 경제적 여유에 기대어 이런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외면하려는 '중산층'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이른바 제 3지대로 지칭되는 중도 중간층 또는 회색지대의 구성 토양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한적 민주주의' 최소한의 다양성으로 山人 또한 애써 이해한다.
  그럼에도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모럴 헤저드'가 더욱 악화되고 질적으로 심화되었다는 점은 동의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정유라를 놓고 벌인 어떤 대학교의 몰지성 반사회적 규칙붕괴의 작란(作亂)과 권력-관료-비선빽들이 벌인 막장 흥정극을 보노라면, 우리사회의 작동원리가 도의규범에 기반한 자정과 균형적 시스템 아닌, 여전히 소수의 人治 통제로 굴러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말이다. 돈으로 들고나는 대학의 부정입학과 학사비리가 그다지 비밀일 것도 없는..오래된 관행이지만 예산과 권력까지 끼어들어 벌어지는 놀음판에 '공정함'의 한가닥 짝사랑은 비애를 넘어 분노의 광장으로 어린 학생들을 끌어낸다. 시국선언 교수들도, 교육보국 내세운 재단이사장들도, 그 흔해빠진 대학 어느 하나도 그 커넥션에서 자유롭지 못한 불편함 탓인지 고요~하다. 어디 가서 "내가 교수다".. "선생노릇 몇십년 했다" 내보이지 말 일이다. 허깨비 꼭두짓으로 밥빌어먹은 '교육식충이' 자복이다.  너나없이 사회의 질적 타락 지표다.
  변변한 지적 이데올로기나 건학이념조차 없이 부의 수단으로 만들어진 정상모리배 족벌경영의 가짜 상아탑, 학문으로 포장된 위장지식인들이 누린 지위는 천민자본주의 앞에 무릎꿇은 '지성의 몰락'... 그 처참한 몰골로 산방 대문앞에 지금 비틀거리며 서 있다. 거울에 비친 바로 내 몰골이다.  이런 씨앗 종자는 이미 1890년대에 뿌려져 1910년 싹이 터 종기 자라듯 온강토 만민중 뇌리에 번져나기 시작했다. 그게 1945년 분단 재점령으로 개화되어 근혜통치로 열매 맺은 것이다. 문맹 없는 이 땅에 이거 모르는 등신 없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랬다. '기득권'이다. 독립군과 일군 조선인부대 간도특설대가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그게 지금도...다! 인간의 보편적 심리이거나 생래적 본능성일 수 있다. 여하튼 고전적 명제다.
  그렇지만 그게 다 아니다. 세상에 나서기를 꿈꾸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 우리 사회..우리가 만들어 낸 리더쉽의 비극 앞에 가지는 회한이다. 그나마 정상의 사고와 상식의 판단력을 지닌 대다수 대한민국 민초시민들의 흔들리지 않는 정의로움이 살아있어 그래도 예까지 왔다. 개인, 가족의 안위에 머물지 않고 영혼과 일신을 던져 나라의 독립과 통일.민주주의 등 우리 사회의 공동선에 헌신한 위인들이 있어 그래도 예까지 왔다. 희망을 품는 까닭이다. 질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남 앞에 서는 사람..그것도 많은 사람 앞에 서는 사람, 그런 무대에 올라 떠들고 재주부려 밥술 얻어먹고.. 돈과 명예를 구하고.. 유명해지고싶어 하는 이들은 자신을 잘 들여다 보고 결심을 해야 한다. 빈곤한 역사의식이나 주견이랄 것도 없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겉저리 생각을 소신삼아 정견 포효하듯 함부로 나서면 안된다. 처지나 분수를 생각하고 욕심 욕망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쉬운 일 아니다. 그러니 생게망게 어중떠중 이합집산 철새텃새 잔머리또방 이득밝이대방들이 동남서북 성동격서 경박단소로 놀래고 어르달래며 정치 비즈니스를 편다. 박지원이 그래서 불안위태하다. 반기문만 "반반" 아니다. 한민당~자유당~공화당~민정~민자~신한국~한나라~새누리.. 어지럽다. 이번엔 무슨 이름으로 바꿔 달까? 사회과학에서 흔히 드는 '현상과 본질'에 딱 들어맞는 최적의 단어다. '바른 정당'?은 무엇이 같고 다를까?  "그것이 알고싶다". 
  그 오욕의 역사만큼이나 이름조차 역겹다. 그런데 태극기 흔드는 맞불 박사모는 친목으로 정치하고 촛불을 징치하는 담대함이 참 대단하다.  이 뿌리는 보기보다 아주 깊다. 칡뿌리 마냥 길고 질기다. 이들은 얼굴 없는 그 검은 장막의 그림자다. 민중 머릿속에 잠재하여 두려워 하는 심연이다. 그 이상한 공포심이 통치의 동력이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은 그 1년 후 전향해서 총독부 전속강사로 초빙돼 8도를 돌며 황국신민 충복을 자처했다. 작위까지 하사받은 그는 만년에 고향 마산에서 밤낮 없는 술타령으로 천수를 누렸다. '시일야..'는 조선민중에게 흉기였다. 당대의 개화지식인 육당 최남선은 2.8 동경유학생 선언문 베낀 3.1 독립선언문을 이완용 술집 태화관에 모인 허깨비 밥자리모임에 내던지고 슬그머니 빠지더니, 그 몇 년도 채 안돼 장지연의 뒤를 충실히 따라갔다. 친일집단으로 변신한 '신간회'.. '교육계몽, 자치론' 주장으로 독립투쟁의 불꽃을 흩흐러트린 안도산은 식민백성들을 혼란으로 몰고갔다. 육당 숭모자 춘원도..그 제자 모윤숙이나 김동인 김광섭 서정주 조연현 백철 등 문인그룹.. 김성수 방응모 등 매국언론.. 화신 박흥식 등 기업인들..총독부 고등계 90%를 점하고  잔인초극의 동족 고문살인에 앞장 선 조선인 매국경부들..독립군과 간도조선촌 초토화로 승승장구한 백선엽만주토벌대와 신경군관-제국육사 출신 다까끼 만주군맥의 반역 '조센 일군'들... 이들이 제헌의회 다수가 되고  정부수립의 현실적 뿌리가 되었다. 그걸 60대 중반의 산인도 어릴적부터 교과서로..선생님들로부터 배우고 또 배웠다. 그랬다. 역사도 국어 속 문학도 그런 사람들과 그런 글을 독립운동가..최초 신소설..최초 신식시..최초 어쩌구저쩌구로 외우고 시험쳤다. 그걸로 "공부 잘한다" 했다. 그게 지금도..다.

  인명진이 누군가? 70년대 그 엄혹한 박정희유신에 맞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고 노동운동 벌이며 남산 중정에서 무지막지 매맞고 교도소 수도 없이 드나든 사람이다. 새누리당 살려내겠다고 나선 지금 그 사람이다.
  김동길은 작년 10월 박근혜 1차 담화문을 보고 "이제 우리나라에 다시 광명이 찾아왔다.."고 망발을 늘어놨다. 오래 전에 죽은 줄 알았다. 70년대 3.1명동선언 때 잡혀가 죽었으면 이름값이라도 건졌을텐데...! 김무성이야 졸개 때니 그렇다 쳐도, 근혜를 주군 삼은 서청원이 "칠푼이"로 취급했던 자신의 절대 보스 김영삼의 박정희 유신정권 타도 민주화투쟁의 행동대원이었다는 게 상상되겠는가?
  김문수 이재오도 대단한 표상이다.  자신의 이념을 따르던 동지들에 대한 '사상 테러'는 좌.우를 떠나서 세상을 혼돈시킨 또 다른 변절의 전형이었다.  UN사무총장 10년 채 끝나기도 전에 고국의 대통령후보로 나가겠다고 해서 UN을 나자빠지게 한  반기문의 세계적인 몰상식도 우리 안에서 배태한 찌꺼기 잔재다. "매 앞에선 장사 없다"는데, 자신과 一家의 기득권 앞에서는 나라도 민족도 친구도 적도 없는 듯하다. 거기에 일말의 양심이라도 기대하며 '청문회'를 놓질 못한 민초의 쓰라린 가슴속을 어찌 저들이 알겠는가? 살벌한 정글 속 미로를 더듬는다. 이 나라가 어찌 한 뼘 의리마저 말라빠진 하이에나 조폭집단처럼 굴러가는 투전판같이 돼서야 쓰겠는가?

  '인성의 기본'이 결여된 욕망의 맹동이 끝간데 없는 오지랖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 뭔가 해보겠다는 걸 탓하거나 말릴 재간도 없다.  '공무담임권'이라는 게 있으니... 그런  인물들이 수도 없이 "차고 넘쳐 나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지경이라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治國 平天下 멸사봉공 아니래도 일을 저지르지나 않았으면 더 바랄나위 없다.  허장성세 겉만 보고 대리만족 구하기 보다 이웃의 보통 평상인들을 가려 뽑는 평범한 선구안을 가진 주권 시민들이 많아지길 바래본다. 이것도 "오지랖"인가? 갑자기 뒷머리가 당기고 귀가 근지러워진다.
"넌 그 나이 먹도록 뭘 했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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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리스트’ 관여 실행의 주도자로 김기춘과 조윤선이 며칠 전 구속됐다. 근혜순실 게이트로 검찰-특검에 구속된 이들이 현재 10여 명이다. 말하자면 ‘범털’들이다. 모두 주인 잘못 만난 탓 크고 잘못 모신 죄 크다. 더 큰 죄는 삐뚤어진 욕망으로 맺은 개인적 인연으로 머무른 게 아니라, 온 나라 시민들에 저지른 되돌릴 수 없는 패악질이니 자업자득 치고는 너무도 큰 죄업이다.

  왜 ‘조윤선’인가? 하고많은 범털 중에 조윤선을 끄집는 연유는 “박근혜의 감옥살이 예행연습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윤선의 이력이나 지위는 현직 대통령 박근혜의 발뒷꿈치도 못따라간다. 근혜가 공주로 자라나  태후노릇을 거쳐 여왕의 자리까지 올랐으니, 제 능력이든 제 애비 후광이든 아니면 최순실 기획작품이든 여하튼 로또 1등 이상의 확률을 뚫은 그녀다. 그런 근혜는 논외로 치고, 동류 여성으로서 조윤선의 주변 배경이나 학벌 그리고 현재까지의 이력 등은 약관의 성공한 젊은 정치인으로 보기에는 권력의 징검다리를 타넘는 속도가 한국사회에서는 대단히 화려하고 비약적이다. 아우토반 고속도로다. 무슨 탁월한 능력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그런 비례 대칭성을 뛰어넘는 것같이 보인다. 그래서 ‘신데렐라’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스스로 비참해 하는 것은 글로벌 최고 엘리트라는 자존감의 붕괴 때문이다. 최순실은 비록 대통령을 등에 업고 최고 권력을 누렸어도 스스로 ‘엘리트‘라는 생각은 못하며 살았다. 그래서 감옥 아니라 그보다 더 험한 곳에 가더라도 개걸스럽고 억척스레 적응하고 버티며 살아갈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데 윤선이는 그게 아닌 거다. 감옥에 간 그녀를 끄집어 얘기하는 까닭이다. 그 추락의 속도와 충격 또한 ‘딥 임팩트’다. ‘급전직하’..요즘 말로 “드롭” 걸렸다. 그 체감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곳이 바로 교도소다. 말이 교도소지 형무소 감옥이다.

  그 곳은 입감절차부터 일상의 생활까지 인간의 신체 뿐 아니라 정신까지 구금하는 차가운 밀폐 공간이다. 외부와 철저히 격리되고 시간이 멈춰진 일종의 정신병동이나 다름없다. 이런 데가 전국에 47 곳 있다. 교도소 36 곳, 구치소 11 곳이다. 이 안에 지금도 5만5천~6만여 명의 수인들이 바글거리며 우리들 곁에서 바깥세상과 함께 숨쉬며 살고 있다. 전자는 기결수 후자는 미결수가 주로 수용된다.  교도관(간수)이나 접견차 들락거리는 변호사들에게는 ‘직장’이지만 수감자들에게는 박탈과 억압의 ‘수용소’다. 한 공간에 함께 실존하지만 양자 사이에는 전혀 별개로 존재하는 시·공간이다. 뭣이든지 남의 일삼아 듣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TV 다큐에 비쳐지는 모습이나 영화 ‘검사외전’에서 묘사되는 그 곳 풍경은 양반이다. 실제적 디테일은 바깥의 축소판이다. 이 글의 주된 대상인 ‘범털’들은 대부분 서울구치소에 몰려있다. 범털 개인의 좌절 참담함과는 별개로 그들은 그 안에서도 돈과 권력의 위세를 다양한 형태로 여전히 누리며 지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2중 모순의 실체다.

  조윤선... 그녀가 가졌고 누렸던 그 특별했던 존재감이, 세상의 시야에서 가려진 그 특별한 시·공간에서 지금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허물어져가고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면 박근혜의 감옥살이 모습이 선연히 그려질 것이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  구속영장은 묘하게도 늘 밤 12시 전후로 떨어진다. 왜 그럴까? 유치장(또는 검찰 구치감)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피의자의 불안감은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며 높아져 간다. 그러다 급하게 뛰어들어오는 수사관의 말 한 마디, “떨어졌어”로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리고 어지럽다. ‘관행’이란 이름으로 이어져 오는 이 것도 인권 측면에선 개선되어야 할 악폐다. 어떤 불가피한 필연성이 있는지는 당사자만이 알 일이다.

  여기서 잠깐 삼성 이재용부회장 件을 짚어본다. 검사고 판사고 간에 법으로 따지고 먹고사는 전문직업인이긴 해도 인간의 본성이 잠재적으로나 현재적으로 머릿속에 먼저 작동됨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예단’이다. ‘금기어’라는 것은 역으로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반증어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대형 사건은 굳이 검찰이 공소를 제기하기 전이라도 법관들은 언론을 통해 세세하게 기승전결을 파악하고 사건의 본질을 이해한다. 직업상으로도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기 판단‘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게 ’예단‘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 이재용에 대한 22시간 고강도 심문조서와 제출된 많은 증거자료 아니라도, 오전에 벌인 영장실질심사 결과를 다음날 새벽 4시 반에 결정 통보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발부나 기각 여하를 떠나 이 ’뇌물죄‘ 사건 개요는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그렇다.  긴 시간 고심 고뇌 끝에 내린 어려운 결정인 듯 포장된 ’쇼‘로 보이는 이유다.   법의 해석논리는 유권해석 당사자(판.검사)의 선험적 자기판단에 따라 이리저리 달라질 수 있고 심지어는 180도 달라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중앙선관위가 대통령피선거권 자격으로 규정된 조항 “...입후보자는 국내에 5년이상 거주하여야 한다...”라는 법조문을 “생애에 통산 5년이상 거주하면 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려 반기문을 살려주는 경우가 극단적 유권해석의 사례다. 법률가도 아닌 일반 사무직원들인데 말이다. 이 문제는 조만간 피하기 어려운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현령 비현령‘이다. 그래서 변호인의 힘은 “로비의 힘”이고 로비력의 차이로 귀결된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다.

   다시 앞으로 돌아간다. 

  적막하기 그지없는 야심한 밤중에 유치장 밖으로 끌려져 나온 피의자는 창문마저 검게 썬팅된 봉고 호송차에 실려 어디론가 실려간다. 물론 교도소로 가는 길이지만 눈가리고 방향감각을 잃은 채 잡혀가는 죄수의 심정을 비로소 체감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교도소 정문앞에 도착하니 기다렸다는 듯 경비교도대원이 지체 없이 육중한 정문을 열어준다. 첫째 관문이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낯설고 생경한 어둠속에 내려진 피의자는 수사관의 손에 이끌려 본관  어느 대기실로 따라 들어간다. 잠시 후 보안과 직원이 내민 신상조사서를 작성하고 지장을 찍은 후 수사관과 교도소 직원간에 신병인수인계가 이루어진다. 이제부터 교도소 식구가 된 것이다. 데리고 온 수사관은 악수를 나눈 후 곧바로 돌아가 버리고 의자에 앉혀진 초범 피의자는 두려운 마음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범털일수록 더욱 그렇다. 기선 제압하는 일종의 심리적 장치구실이 한 밤 영장 발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사위가 고요한 캄캄 밤중에 교도소 구조를 전혀 모르는 피의자는 이미 심리적으로 무장해제다. 보안과 조사실을 나오니 1층인지 지하충인지 내려가 들어선 곳은 희미한 형광불빛 내려깔린 반 평 남짓 어느 골방이다. 윤선이는 여기에서 일생일대의 치명적인 수치심을 맛본다.   담당 교도관과 단 둘이긴 하지만, 온몸을 발가벗기운 그녀는 “이건 이곳에 오면 누구나 하는 법적인 입감 절찹니다” 교도관의 짧은 설명을 들으면서 자신의 알몸 앞뒤 위아래를 검색당한다. 잠시 후에는 허리를 구부리라는 지시와 함께 항문 주위도 유심히 살펴본다. 물론 김기춘 조윤선 등 고관대작 범털들이 설마 마약 담배가루를 담은 비닐캡슐을 삼켜 항문주변에 감췄을리는 만무하겠지만(?) 규정대로 해야한다. 전두환 노태우도...재벌총수들도 그랬을까?

  그랬을 거라고 믿는다. 법앞에 평등을 떠나 기계적인 의무수칙으로 해야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하얘지는 수치심과 저 아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모멸감에 온 몸을 부르르 떨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지?”).....  잠시 후, 담당 교도관은 아래위 죄수복 한 벌을 꺼내놓고 속옷만 남기고 입고 온 사제복은 모두 벗으라고 명한다. 조윤선은 대한민국 문체부장관에서 명실공히 왼쪽 가슴에 수인번호가 부착된 구치소 미결죄수로 거듭난 것이다. 수인번호는 1*** 대.. 형사잡범 분류번호다. (민주화운동) 정치범은 2천번 대라 누가 봐도 당당하다. 죄수아닌 죄수다. 가진 것 없어도 감옥안 모든 수인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는다. 한 나라의 권력을 쥐락펴락 최고권력자와 동락同樂했던 김기춘 조윤선의 형사잡범 처지는 그래서 비참하다.

  수갑에 채인 그녀는 안내 교도관을 따라 어두컴컴한 수용사동 건물 몇 채를 지나 제일 후미진 곳 사동으로 조심조심 걸어갔다. 수인들은 이미 8시 半소등하고 잠에 들어 깊은 한밤중이다. 사동 건물을 지나갈 때마다 천근 무게로 “철커덕” 거리는 2중 철문을 열고 닫으면서 울리는 금속성에 윤선의 오장육부는 쪼그라지고 오므라들었다. 몇 개 사동舍棟을 지났을까?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지낼 방 앞에 도착했다. 작은 ‘독방’이다. 이제부터 특별한 일 없으면 여기가 자신의 집이다. 독방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일반 잡범은 언감생심이다. 주로 정치범 사상범 또는 특별관리가 필요한 형사수감자다. 동시에 가장 외롭고 지루하고 정신적으로 힘겨운 곳이다. 모든 교도소 건물구조는 동일하다. 수용자 관리도 운영 규칙에 따라 동일하다.  이곳의 실세는 보안과장이다.   보안과장은 이 귀한 새 식구에게 각별히 신경 써줄 것을 담당자에게 이른다. 그런데 이게 더욱 촘촘한 감시의 눈길로 느껴져 불편함은 가중된다. 깊은 한숨을 들이시며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방에 들어서고 교도관은 비로소 그녀가 찬 은팔찌 수갑을 풀어줬다.

 

  그녀의 방은 1.9평! 생각보다 작지 않다. 서울역 뒷골목 쪽방보다 훨씬 크다. 여관방 급이다. 독방도 크기가 여럿이다. 2.75평 1.9평 1.2평 등... 제일 작은 게 0.74평이다. 학교 교실 교단 2개 이어붙인 크기에 길이는 그보다 더 짧다.  혼자 누우면 양옆 틈 없이 머리~발끝 딱 낀다. 벽과 천정은 모두 흰색 석회칠에 뿌연 형광등도 24시간 켜져 있어 창문만 없으면 낮과 밤 구별 없다. 

  방 안팎에 설치된 카메라와 감시자의 눈길에 24시간 노출된 죄수의 숨은 턱턱 막히고 알 수 없는 울화에 어쩔줄 몰라한다. 그나마 주간에 앉아 지내면 공간감이 느껴져 숨을 내쉰다. 여기서 1년을 잘 보내면 누구나 도인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말처럼 세월만 보내면 되는 건 아니었다. 신체 적응과 불면의 고뇌를 이겨내는 내면 자아투쟁이 따르는 험난한 내공수련이다.  어쨌든지 이만한 수양처가 없다. 故신영복선생이나 비전향장기수들이 여기서 꼬박 20년을 보낸 그 경지를 상상해보라!

 

  그러고 보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바쁘게 설치고 날뛰며 굴러먹다 들어온 사람에게 1.9평은 수양처로 삼기에 과한 호사일 수 있다. 그러나 난전판 천덕이로 굴러먹다 들어오는 부류와 달리 태생 신분이 다른 금수저에게는 사실 이만한 고통도 없다. 윤선이의 현재이자 근혜의 미래다.

 

  진짜 고생은 이제부터다. 검찰의 마수에서 도망쳐 온 이 곳인데 다음 날부터 다시 매일같이 불려나가는 심리적 고통과 열패감은 참기 힘든 억하심정이다. 이 틈을 검찰도 노린다. 무너뜨리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윤선이는 그래서 힘들다. 검찰에 불려나가도 구치감 방안에 수갑을 찬 채 종일 갇혀 “이제나..저제나..?” 하루를 보내다 그냥 되돌려지면 참담하다. 그렇게 2~3일 반복하다 검사 앞에 불려나가면 너무 고마워서 묻지 않는 것까지 술술 불기 십상이다. 그리곤 다시는 불러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검사는 이걸 놓치지 않고 잡아챈다. 갇힌 자의 한계다. 조윤선이 누군가? 어제의 동업자가 오늘은 적이 됐다. 창과 방패로 서로가 서로를 겨눈다. 권력의 흥망이 교도소 담장위를 걷는 처지에 다름 아님을 그녀는 이제 조금씩 알아간다. 아무나 공익의 대변자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함부로 나설 일도 능력을 과신할 일도 아님을 윤선이는 잠시 생각해본다. 그리고는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이건 음모다. ("독해야 살아남는다")....

 

  입맛 밥맛 모두 잃은 이에게는 진수성찬도 만사휴의인데 하물며 감옥의 밥이며 반찬이 그녀의 입에 가당키나 하겠는가? 수백 명의 밥과 반찬을 대량으로 짓고 만든 1,400원짜리 1식3찬이니, 그 맛이며 질이 어디 눈길조차 가겠는가 말이다. 북촌 반가 12첩 밥상만 받아먹던 윤선이 처지에서, 상종조차 않은 까마득한 계단아래 인종들 손으로 짓고 만든 걸 먹어야 하는 “내 신세“라니...!   그녀를 더욱 괴롭히는 건, 손수레에 실린 커다란 밥통 국통에서 국자로 질질 흘리며 퍼담아 주는 식판조차 겨우 드나드는 ‘식구통’으로 서투루 받다 부딛쳐 복도바닥이고 방바닥에 흘려 듣는 천한 것들의 한 소리다. 그녀는 어금니 질끈 깨물고 눈을 내리깔며 화장실로 들어가 식판음식을 변기통에 쏟아버리고 변기옆 수도꼭지를 틀어 수세미로 닦는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진다. 거울 하나 없는 방구석에서 며칠 째 보습제도 못발라 메마른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마음을 추슬러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감청고소원 표정으로 닦은 식판 내놓으라 또 닦달하는 배식 '소지'들의 흘리는 웃음에 화들짝 들이미는 윤선이 얼굴은 또 한번 얼룩졌다. 복도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변기통 입구를 수건으로 가린 채 볼 일 보는 윤선이에게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한다는 사실은 가상이 현실이 돼버렸다. 사실 식사 후 간수는 세면 겸 식판 세척실로 가서 씻고 닦도록 문을 따준다. 윤선이가 이를 기피하는 것일 뿐이다.

  종일 갇혀있다 하루 3 번 이 때를 놓칠새라 우루루 몰려가 떠들고 정보도 교환하는 수인들의 눈총과 수다앞에 자신을 감추고 싶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방 변기통옆에 쪼그려 앉아 양치질과 세면..먹지도 않고 버린 식기세척을 모두 해결하고 있다.  안받으면 단식이 되고 교도관들이 달려오는 일이 생기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윤선이가 진짜 힘든 일이 어디 이 뿐이랴! 하루 한 번씩은 사방 높은 담으로 둘러쌓인 작은 마당에서 교도관 감시 아래 운동시간이 1시간 주어진다. 여기서 이런저런 일이나 작당이 유무상통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몸을 움직이고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윤선이는 이것도 여간 부담이 아니다.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놀림거리 구경거리 된다.  그러니 종일 좁은 방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윤선이의 숨막히는 열불속을 어쩌겠는가? 

  어제는 하도 답답해서 변기 앞부분 튀어나온 곳에 두 발을 딛고 코딱지만한 창만을 열고 밖을 내다보다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를 냈다. 무릎이고 정강이가 까지고 쑤셔 밤새 잠을 설쳤다. 자신이 개.돼지 취급받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지난해인가, 교육부 모 관리가 “국민 90%는 개 돼지다..밥만 먹여주면 된다..“해서 소란이 났던 일이 생각났다. 지금 자신이 그 개 돼지가 된 것만 같다. 아침 6시 기상은 그런대로 할만 한데, 8시 아침밥..11시 반 점심..3시 반 저녘밥! 그러니까 7~8시간 안에 하루 3끼니를 모두 먹이고 5시에는 폐방! 8시 되면 취침자리에 들어가야 한다. 종일 좁은 골방안에 갇혀 지내는 윤선이는 참 괴롭고 힘들다. 그녀는 이래저래 ‘식음 전폐’다. 

  그런 윤선이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 변호사 접견이다. 가족면화와 달리, 변호사 접견은 교도소건물 안에서 이루어지는데다 매일 가능하고 시간제한이 없다. 다만 선임 변호사가 수임 사건이 여러 건이다 보니 온종일 윤선이한테만 시간을 내어줄 수 없는 게 문제다. 물론 더 큰 거금을 들여 1인 전담제로 그를 사면 되지만 그만큼의 실익은 없다. 설사 그리 내줘도 눈치 보이고 말도 나면 변호사도 입장 난처해 질 일이니 두어 시간 쯤 바깥바람 씌고 밖에 동정도 들어보고 이러저러 시간 보내다 들어오는 게 하루를 버티는 힘이다.      

 

  아, 언제까지 여기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집이고 땅이고 벌어놓은 전 재산 몽땅 털어서라도 하루빨리 지옥같은 이 곳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차는 나날이다. 그렇지만 만만치 않다. 검사가 요구하는대로, 있는대로 사실을 다 불어댔다가는 근혜여왕의 후환이 두고두고 걱정된다. 근혜 뿐 아니라 자신과 가족이 들어가 있는 1% 기득권 그룹에서 따돌림 받고 밀려나는 것은 세상에서 밀려나는 두려움이다. 그녀를 더욱 뻔뻔하고 후안무취한 인간으로 남게 하는 동기이고 보이지 않는 손이다. 그게 ‘위안’이 되고 ‘독’이 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윤선이다. 그러나 어쩌랴! 저질러진 일, 나라고 국민이고 우선 내가 살고 볼일이지 별 수 있겠나? 기왕에 망가진 거, 더 나빠질 일도 없겠지 싶다. 윤선이는 마음을 다시 독하게 다져본다.

  자신이 10년 간 몸담았던 최고 법률회사 ‘김앤장’도..역시 이 곳에 몸담은 스타 변호사 남편도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신을 변호해주려고 나서기 어렵다. 변호사가 변호사를 산다는 게 자존심도 상하지만 어쩌랴! 자신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쓸만한 변호사를 남편을 통해 구한 윤선이다.

  이 변호사에게 바라는 건 한 가지다.  자신이 실형감인지 집행유예감인지는 더 잘 알 일이니, 이 사람이 하루도 거르지 말고 접견이나 잘 와서 그나마 자유롭게 숨 쉴 시·공간을 많이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기결수로 넘어가면 면회나 접견도 월 4회정도로 그친다. 끔찍하다. 그 전에 어떻게 해야 한다. 윤선이는 이래저래 밥맛을 잃다시피 사실상 ‘식음 전폐’ 중이다. 나날이 2만원씩 쌓이는 영치금으로 사식을 사 먹으라는 가족의 득달같은 성화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엊그제는 이곳, 같은 구치소 어느 독방엔가에 들어앉아 있을 정호성과 안종범 방에 특검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방안에 있던 물품들을 싸그리 훓고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차하면 교도관들도 수시로 입방해 거둬들인다. 조심해야겠다. 걔들이 뭘 모르고 순진해서 그런 일을 당한 거다. 글로 종이로 남긴 흔적은 보관하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순실이 방 '압색'했다는 보도는 듣도 보도 못한 것 같다. "밖에서 부린 위세가 여기서도 통한다니까!" 틀린 말 아니다. 알아서 편의 봐주고 알아서 챙겨주고 귀띰도 해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런 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소내 배식 복도청소 교도관(간수) 잔일 보조 등을 하는 모범수들인 이른바 ‘소지’를 잘 꼬득여 메신저로 활용해 한 다리 두 다리 건너가며 연락하는 방법도 있고, 이 쪽 저 쪽 변호사들끼리 입을 맞추는 방법도 있고.. 같은 사동내 힘깨나 쓰는 고참 방장이나 조폭 보스를 통해 바깥과 소통하는 방법도 찾으면 있을 수 있다. 집필실이나 세면장 TV관람실 운동장 등 수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방법이 다 있다. 궁하면 통한다. 모든 걸 일일이 다 감시하고 잡아내기란 실상 어렵다. 검찰 등 수사기관도 이런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도 있다. 정호성 안종범의 감방을 ‘압색’한 것도 그런 경우가 충분이 존재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조윤선의 요즘 하루하루는 검찰과의 전투 연속이자 자신의 양심 정신력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모른다. 거대한 역사의 강물앞에 홀로 버려져 떠내려가는 느낌이다.

 

  윤선이가 생각하기에는, 감방 안에서 받아보는 일간지 뉴스들을 보나 여기 들어오기 전 종편뉴스들을 보나 이제까지 든든한 우군이자 호위무사를 자임했던 이른바 ‘보수 언론’들이 모두 박근혜를 버렸다. 아니, 버린 정도가 아니라 물고 뜯어대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새다.  확실하다. 일반 국민들이나 종북좌파들이야 그렇다 치고, 그나마 비빌 언덕이었던 언론들마저 야멸차게 배신하고 떠나갔다. 대통령은 이제 비비고 일어설 그 무엇이 없어 보인다.  모두 반기문으로 몰려가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람도 “반반”이다. 여기저기 후보감 물색하느라 꼴 사납게들 헤맨다. (“아,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될까?”)

  윤선이는 오늘도 식음을 전폐하며 잠 못드는 겨울의 긴 긴 밤을 지새우고 있다. 내일 또다시 불려나가 대적해야 할 그 검사 놈을 막아낼 최후의 은장도 날을 벼리고 있다. 그리고 4주 지나면 법정에 불려나가 판사와 지루한 전투를 처음부터 다시 벌여야 한다. 그렇게 3개월.. 항소 가서 4개월..대법까지는 무조건 가야지! 거기서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그 사이에 혹여 새 정부 ‘광복절 특사‘로 정치 사면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게 마지막 희망이다. 

  그나저나 근혜 대통령이 여기에 오실 날도 머잖을 것 같은데 어찌 감당하실는지... 아마도 전두환이 지냈던 4.5평 모텔급 그 방에서 조금은 특별하게 대우받으며 지내시기는 하겠지. 어쩌면 내가 그 분 대행으로 예행연습을 벌이고 있는지도 몰라. 지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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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이는 갈대밭
이병욱 지음 / 월간문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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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 이병욱 선생께서 첫 출간 소설집 [숨죽이는 갈대밭]을 펴냈다. 「월간문학사출판부刊(정가1만5천원/2016.7.15)'」. 

   대학시절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래 작가생활 46년여 만에 처녀작품집을 마침내 출판한 것이다. 수필집이다 자서전이다 산문집이다 해서 글 몇 편 써내기 바쁘게 책을 내고 이름 석자 알리기 분주한 세태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이례적이다. 평생에 빚어낸 주옥같은 50여 편의 중.단편 작품들을 그간 '뿌리' '월간문학' '참문학 동인' 등 문학전문 월간지 계간지 등에 상재하는 것으로 자족했던 이 작가는, 주위의 끈질긴 권유를 받아들여 그 중 12편을 골라 고희를 발치에 둔 60대 중후반에 첫 작품집을 냈으니 허명을 멀리하며 작가적 양심에 충실하려 했던 모습 그대로다.

    표제작 [숨죽이는 갈대밭]은 월남전에서 중상을 입은 참전 제대군인의 지난한 삶의 역정과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적인 모순과 냉혹한 삶의 현실을 그린 날카로운 문제작이다. 이 작품을 집필한 것이 1970년대 초반이니 44년만에 세상에 첫 공개되는 발표작이다. 이 작품속 내용과 시대사적인 함의는 지금도 여전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살아있는 현재형 성격을 담고있다. 따라서 일종의 "담론적 태제"로도 유의미한 작품이다. 11개 단편작품들도 외견상으로는 일상의 개인사적 관점을 취하면서 한 시대와 사회의 현상 및 그 이면의 의문들을 내밀한 필체로 거시와 미시 함께 녹여낸 수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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