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홍은전 지음, 훗한나 그림, 비마이너 기획 / 오월의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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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전사들도 아름답고 애틋하고 경애로웠지만, 내게 더 민감해져야 하고 더 인내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줬던 박김영희 편을 북플에 옮겨둔다.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영등포의 병원 문 앞에 도착했더니웬 남자가 서 있었어요. 병원이 3층이어서 나를 업고 올라가려고기다리고 있었대요. 어이가 없어서 공무원들을 다 불러 모았어요. 내가 성폭력을 당한 장애여성이라면 몸에 남자의 손이 닿는것도 참을 수가 없는데 3층까지 안겨서 올라가라는 것이 말이 되냐고 눈에 힘을 주고 말했어요. 그러고선 나를 전동휠체어에 탄채로 들고 올리라고 했죠.  - P99

저는 회의를 질질 끄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하지만 정말로 회의를 지연시키는 건 지각하는 남성들이었어요.  - P103

그녀에게서 종종 전화가 와요. 집에 있다가 심심하면 노숙하던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기도 하면서 지내고 있나봐요. 그녀를만나면서 알게 됐어요. 안전을 위해 집에만 있으라고 하는 건 결코 그녀의 행복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요. 노숙 생활이지만 나름대로는 자유롭고 재미있는 거예요. 바깥에 친구도 있고 길에서사는 방법도 터득했어요. 나 만나면 항상 "5000원만 주세요" 하는데 만 원 주면 "만 원 말고 5000원 주세요, 5000원 주면 나 맛있는 거 먹을게요" 해요. 그녀한테 계속 말하죠. "아프면 병원 가는 거 알죠? 노숙인을 위한 병원 있으니 꼭 가세요. 누가 혹시 때리면 맞지 말고 피하고 자주 목욕해요. 전동휠체어 충전시키는거 잊지 말아요." 그러면 그녀는 알았다고 해요. - P123

자립생활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중증장애인 대표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좋은 리더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대표가 권력적으로 변해가거나 ‘바지사장‘처럼 되어가기도 하죠. - P129

그 말이 뜨겁고도 서늘해서 가슴이 찌르르했다. 나는 그 후에도 오래오래 그 말을 곱씹다가 알게 되었다. 방법이 없었다고자꾸자꾸 말하는 그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는지를. 모든 어린이들에겐 숙제가 있었지만 영희에겐 없었다.
그래서 영희는 동생들의 숙제를 했다. 그것은 어린 영희가 살기위해 찾은 생존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것이 아니었던 숙제는 영희를 얼마나 불안하고 슬프게 만들었을까. - P134

나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것들이 영희에게 자기몫의 숙제가 생긴 순간처럼 느껴졌다. 이제 영희는 세상에 없는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고 ‘만들기‘ 시작한다. 단체를 만들고 저상버스를 만들고 승강기를 만들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그리고 자기의 언어를 만들었다. 어떤 선택은 결실을 맺고 어떤 선택은 그렇지 못했대도 온전히 나쁘기만 한 선택은 없었다. 상처도 좌절도 모두 ‘내 것‘이고 시행착오를 겪을 때마다 영희는 고유하고 선명해졌으니까. 영희는 자라서 그 누구도 아닌 영희 자신이 되었으니까.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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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를 잔뜩 붙였는데 도서관 책이라 페이지를 사진 찍어둘까 하다가 전자책 검색을 했다. 다행히 출간이 되어 있다. 다음달 1~3일에 캐시를 충전하고 전자책을 사야겠다.

주머니 사정이 가난해진 이후로는 도서관 이용을 더 활발히 하고 있는데, 아무리 소비 욕구를 억눌러도 책은 어쩔 수 없이 사게 된다. (요즘 내가 얼마나 가난해졌는지, 등급이 골드로 내려가서 깜짝 놀랐다. 플래티넘 아닌 등급도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이게 얼마만에 내려간 등급인지...)

대개는 쓸모나 유용함 때문에 소장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해서 책을 사게 되지만, 소장하고 싶다는, 소장해야만 한다는 끌림 때문에 다 읽은 책을 또 사게 될 때도 있는데, 이 책이 그런 경우이다.

홍은전은 대단한 사람이다. 인터뷰이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문제들, 내면의 것들을 들여다본다. 그만큼 예민하고 기민하다. 그는 인터뷰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것이 단지 정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출판사에 근무할 때, 인물 성공담 자기계발서를 발간할 때, 대필작가가 시간이 없어 바쁘다면서 이메일 인터뷰로 대체하겠다고 한 적 있었다. 그게 가능한가? 나는 좀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해당 인물이 글과는 관련없는 직종인데다가 글솜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직접 썼겠지. 왜 대필작가를 고용했겠나?)

결국 그 작가는 일을 마무리 하지 않고 중간에 그만둬 버렸다. 그 작가는 신춘문예인지 다른 신인문학상인지로 데뷔한 작가였는데, 자기 소설을 열심히 써야겠다며 도망가 버렸다. 일이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나는 ‘이메일로 인터뷰하겠다고 했을 때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마무리는 다른 작가를 섭외해서 해결했다. 마무리 작가로 섭외된 사람은 편집자로 오래 일한 뒤 프리랜서로 독립한 사람이었고, 책은 무사히 출간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삶을 그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내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술가 같은 예민한 감각과 숙련된 직업인다운 끈기가 동시에 있어야 하는 일이다.

홍은전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책을 만들어냈다. 웃다가 울다가... 얼마나 들썩였는지 모르겠다. 띠지의 흔적은 모두 그런 흔적이다. 아포리즘따위에 붙인 게 아니다. 내가 울었던 흔적, 웃었던 흔적, 울면서 웃었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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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지 않지만
무수히 반복되는 진리가 들어있음을 부정할 순 없지.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책 중에서는 로저 니본의 <일의 감각>이 가장 좋았다. 지루하고 피곤한 연습과 반복이 어떻게 전문가를 만들어내는지 자기 삶(의사의 일)을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재미있었고 설득력도 있었다.

<그릿>은 그 책만큼 좋지는 않다. 많이 팔린 자기계발서의 전형 같다.
그래도 내가 꽂힌 부분을 발췌해본다.
그런데 이건 로저 니본이 주장하던 바와 일치하는 내용이라 새롭진 않다.

최고가 되고 싶다면의식적인 연습을 하라

나는 면담 연구를 하는 동안 그릿에는관심사에 쏟는 시간의 양뿐 아니라 질도 중요한지 궁금해졌다. 과제에더 많은 시간은 물론 양질의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가?
- P165

하지만 에릭슨의 연구로 밝혀진 결정적 사실은 전문가들이 더 ‘오래‘
연습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문가들의 연습은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 대부분과 달리 전문가들은 에릭슨이 말하는 ‘의식적인 연습"deliberate practice 을 수천, 수만 시간 동안 한다.
연습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경험이 항상 탁월한 기술로 이어지지 않는이유를 에릭슨이 대답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 경험을 예로 들어 질문했다.
"에릭슨 교수님, 저는 열여덟 살 때부터 매일 한 시간씩 조깅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전보다 1초도 빨라지지 않았어요. 수천 시간을 뛰었는데도 올림픽 출전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요."
"그거 흥미롭네요.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교수님에게는 훈련을 하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습니까?".
"건강을 위해서겠죠? 청바지를 예쁘게 입고 싶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렇군요. 하지만 달리기를 할 때 어느 정도 속도를 유지하겠다는 목 - P167

표가 있나요? 아니면 목표를 세운 거리는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향상시키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음・・・・・・ 아니요 없는 것 같네요."
이번에는 그가 달리는 동안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었다.
"라디오를 들어요. 그날 끝내야 할 일을 생각할 때도 있고요. 저녁식사로 무엇을 준비할까. 그런 생각도 하죠."
그러자 에릭슨은 내가 조깅 기록을 체계적으로 기록해왔는지 물었다.
속도, 거리, 조깅 후 심박동수 또는 조깅과 전력 질주를 교대한 간격 등아무것도 메모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런 것들이 왜 필요했겠는가? 코스도 적지 않았다. 매번 지난번과 같은 코스를 달렸기 때문이다.
"코치도 없겠네요?"
나는 민망해져 그냥 웃었다.
"아!" 그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알겠어요. 의식적인 연습을 하지않기 때문에 발전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의식적인 연습‘ 즉 전문가들의 연습 방법은 무엇이 어떻게다른 걸까? 전문가들의 연습 방법은 다음과 같다. - P168

전문가들은 가능한 한 빨리 자신의 수행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싶어한다. 물론 그 피드백에는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잘한부분보다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틀린 부분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이다.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는 즉각적인 피드백만큼이나 매우 중요하다. - P169

또한 많은 운동선수와 음악가들이 집중적으로 연습을 한 뒤에는 낮잠을 잔다. 이유가 무엇일까? 운동선수에게는 휴식과 회복 시간이 당연히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운동선수가 아닌 사람도 거의 똑같은 말을 한다는 사실은 의식적인 연습이 몹시 힘든 이유가 신체적 스트레스만큼 큰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임을 암시한다. 저드 애퍼타우Judd Apatow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매일이 실험의 연속입니다. 촬영하고도 쓰지 못할 장면이 나올까 봐 집중하게 됩니다. 이것을 쓸 수 있을까? 편집에 대비해서 한 번 더 찍어 둘까? 다시 찍어야 한다면 무엇을 바꾸지? 3개월 뒤에 이게 마음에 안든다면 어떤 이유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죠. 그래서 집중하게 되고 쉽게 지칩니다…………. 상당히 강도 높은동이죠." 29그래서 세계 정상급 선수나 공연가가 마침내 은퇴한 뒤로는 의식적인연습을 이전과 똑같이 이어가지 못한다. 만약 연습 자체가 재미있고 즐겁다면 은퇴 후에도 연습을 계속할 것이다.(p.177)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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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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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을 쓰려던 것을 미루다가 문지혁 작가의 유투브를 보고 미뤄둔 일을 떠올리고 북플을 열었다. 문 작가가 말하는 감상이 나의 것과 거의 일치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베스트셀러를 베스트셀러라서 읽지 않으려 하지만, 어떤 베스트셀러는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상이 당연한 것 아닌가. 어째서 나는 베스트셀러라면 덮어놓고 건너뛰었나.

클레어 키건의 책이 그랬다. 화제가 되고 있는 걸 알았지만 읽기를 미루다가 집어들었다.(고백하자면 이벤트 굿즈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샀다.) 그리고 한 번에 끝까지 질주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런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이 작고 가볍고 단단한 책은 소설가인 사람,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교본이 될 것이다.

인스타에서 본 어떤 감상평에는 이 책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화제가 될 만큼 그렇게 대단한 책은 아니라고 쓴 것이 있었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다. 대단히 박진감 넘치는 베스트셀러‘류‘ 소설의 스토리를 기대했다면 말이다. 혹은 덮어놓고 ‘힐링‘을 외치는 소설 같이 생각했거나.

그렇지만 학교‘씩이나‘ 다니며 소설 쓰기를 공부한 나 같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놀라울 것이다. 키건은 강박적이라 할 수 있을만큼 전통 미학의 원리를 고수한다. 여백과 공백을 만들어 독자에게 판단을 넘기고, 보여주고 또 보여준다. 그리고 인물의 내면으로 깊이 파고들어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성을 드러낸다.

우연찮게도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을 때 <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도 함께 읽었다. 서로 다른 장르를 쓰는 작가이지만,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해 견해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르 귄이 워크샵의 과제로 제시하는 좋은 소설 쓰기 방법을 리얼리즘 문학으로 충실히 구현하면 키건의 글처럼 된다.

원칙은 간단하나 구현하기는 힘들다.
인물의 삶에서 아주 사소하고 디테일한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아야 하지만, 그것을 말할 때는 최소한의 활자만 이용할 것.

어쩌면 그래서 키건은 쓴 분량보다 더 많이 지우면서 앞으로 나아갔는지도 모르지.

내가 감탄했던 부분 중 하나는 키건이 이야기를 공백과 응축으로 채우면서도 남성적 하드보일드 문체처럼 굳어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고 강물처럼 흐른다.

아무튼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창작에 대한 생각이 하루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키건은 읽어 두어 다행인 작가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마땅하다. 세속이란 것이 대개 어떠한가 떠올려 보면, 이 책이 어째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렸나 의아하긴 하지만. (영화화가 된 것도 의아하고...)

하긴, 뭐, 그런 일도 있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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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 - 데뷔 30주년 기념 초기단편집
듀나 지음, 이지선 북디자이너 / 읻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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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시작을 이제야 읽었다. 역주행하던 사람으로서 듀나가 지금의 듀나로 태동하던 때를 알게 되어 기뻤다. 더불어 가볍고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들이라 요즘 작품과 비교해볼수 있어 더 의미있었다. 무엇보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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