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팔로워는 디지털 성찬식에 참여한다. 소셜미디어는 교회와 같다. 좋아요는 아멘이다.
공유는 성찬식이다. 소비는 구원이다. 인플루언서들의 드라마 작법인 반복은 따분함과 루틴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은 전체에 예배의 성격을 부여한다. 동시에 인플루언서들은 소비상품을 자기실현의 도구로 느껴지게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도록 실현하면서 죽도록 소비한다. 소비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진다.
정체성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된다. - P19

인포크라시에 대한 정보체제하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다루는 현상학이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미 인지수준에서 시작된다. 정보는 현재성을 띠는 기간이 아주짧다. 정보는 시간적 안정성이 없다. 왜냐하면 정보는 "놀라운 일이 주는 흥분"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간적 불안정성 때문에 정보는 지각을 파편화한다. 정보는실재를 "영원한 현재성의 현기증 "속으로 처넣는다. 정보 곁에 하염없이 머무르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보는인지 시스템을 동요시킨다. 정보에 내재하는 가속 강박은 앎, 경험, 깨달음 같은 시간 집약적 인지 실행들을 몰아낸다. - P35

따라서 루소는 정당과 정치단체의 구성도 금지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차이들을 자신에게 이롭도록 제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각자는 담론에 참여하는 대신 자신의 고유한 확신을, 개인적 견해를 고수해야한다. "차이들은 개수가 줄어들며 덜 일반적인 결과를 초 - P70

래한다. 결국 이 통일된 차이들 중 하나가 너무 커서 다른 모든 차이보다 우월하면, 결과는 더 이상 작은 차이들의 합이 아니고 대신에 단 하나의 차이가 된다. 이 경우에 일반의지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승리하는 견해는단지 개별 견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의지가 명확히 표명되게 하려면, 국가 안에 특수한 집단들이 되도록 존재하지 않고 모든 각각의 시민이 단지 자신의 고유한 확신만 옹호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소의 주장을 데이터주의자들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데이터가 더 많이 확보되어 있을수록,
알아낸 일반의지는 더 진실하다. 반면에 담론은 결과를왜곡한다. 이처럼 루소는 최초의 데이터주의자다. 담론과소통을 완전히 포기하는 루소의 산술적 합리성은 디지털합리성과 유사하다. 루소가 말한 통계학자들은 정보체제에서 정보학자들로 대체된다. 빅데이터를 입력하면 인공지능은 일반의지를, 곧 사회의 "일반적 최선"을 계산해내야 한다. - P71

행동주의자로서 데이터주의자는 개인의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전지는 개인의 자유를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만든다. "자율적인간의 폐기는 오래전부터 진작 했어야 할 일이었다. ‘자율적 인간‘은 우리가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설명할때 이용하는 수단이다.  - P72

진실은 다양한 타당성 주장들이 모두에 맞선 모두의 전쟁으로, 사회의 전면적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다. - P80

따라서 서사의 위기는 뜻의 공허, 정체성 위기, 방향 상실로 이어진다. 이때 음모론이 미세서사 micronarrative로서 보상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정체성과 뜻의 자원으로 음모론을움켜쥔다. 이런 연유로 음모론은 특히 우파 진영에서 확산된다. 우파 진영은 정체성 욕구가 특히 강하기 때문이다. - P94

우리는 오늘날 디지털동굴안에 갇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디지털 화면에 사슬로 매여있다. 플라톤의 동굴에 갇힌 수인들은신화적 서사적 그림들에 도취한다. 반면에 디지털 동굴은우리를 정보 안에 가둬놓는다. 진실의 빛은 완전히 꺼졌다.
정보 동굴의 바깥은 아예 없다. 강렬한 정보 도취가 존재의윤곽을 흐릿하게 만든다. 진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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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작가 미셸 뷔토르는 문학이 위기를 맞았다고진단한다. 그는 문학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능력을상실했다고 본다. "10년 혹은 20년전부터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출판되는 작품들은홍수를 이루지만, 정신적으로는 정지상태다. 원인은 소통의 위기에 있다. 새로운 소통수단들은 경이롭지만, 어마어마한 소음을 일으킨다." 소통의 소음은 같은 것의 지옥을 지속시킨다. 무언가 완전히 다른 것, 전혀 비교할수 없는 것, 전혀 있지 않았던 것이 생겨나는 것을 막는다. 고통이 억제된 안락영역은 같은 것의 지옥이다.  - P59

고통의 부정성은 사유에 필수적이다. 사유를 계산 및인공지능과 구별되게 하는 것은 고통이다. 지능이란 어떤것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inter-legere 을 말한다. 지능은 구별능력이다. 따라서 지능은 기존의 것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지능은 완전히 다른 것을 산출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지능은 정신과 다르다. 고통은 사유에 깊이를 부여한다. 그러나 깊은 계산이란 없다. 사유의 깊이란 무엇인가?
계산과 반대로 사유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다른 관점을,
나아가 다른 세계를 산출해낸다. 오직 살아 있는 것, 고통의 능력이 있는 삶만이 사유할 수 있다. 인공지능에는 바로 이 삶이 없다. "우리는 생각하는 개구리도 아니고, 내장이 차갑게 식은 객관화하는 기록 장치도 아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출산해야하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피, 심장, 열기, 쾌감, 정열, 고통, 양심, 운명, 숙명을 어머니처럼 생각에 제공해주어야한다. "인공지능은 계산장치일 뿐이다. 물론 인공지능은 학습능력이 있고 딥 러닝 능력도 있지만 경험을 하는능력은 없다. 고통이 비로소 지능을 정신으로 변환시킨다. 고통의 알고리즘은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 P63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음적인 태도를 취한다는흔한 인간학적 가정은 공감 능력이 급속히 줄어드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갈수록 공감이 상실되어가는것은 타자의 소멸이라는 근본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통사회는 고통으로서의 타자를 제거한다.
타자는 대상으로 사물화된다. 대상이 된 타자는 고통을 주지않는다. - P80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자아에 의해 지배되고 포획되고, 심지어 도취되어 있다. 더 강해지는 나르시시즘적 자아는 타자 안에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을 만난다. 디지털매체들 또한 타자의 소멸을 조장한다. 디지털 매체들은타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 타자의 저항을 약화한다. 갈수록 우리는 타자의 다름을 지각할 능력을 잃어간다. 타자가 다름을 빼앗기면, 그 타자는 오로지소비될 수 있을 뿐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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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 가부장제 체제의 부상과 쇠락, 이후의 새로운 질서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 에디토리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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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별다른 설명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정치경제적 지식이 선행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용감한 책이다. 사실 이 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게 별로 용감한 일은 아니다. 무임금 돌봄의 착취 고리에서 탈주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지난 세대에 용감한 선언이었다. 지금 용감한 선언은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 서서 ‘무임승차'의 뻔뻔함을 지적하는 일이다. 무임승차조차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들이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식 계급으로나 경제적 계급면에서 아무런 우위도 확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용감한 일이 된다. 

이 책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영리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적 선언이 경제 이데올로기의 어떤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낸시 폴브레에 비교해 낸시 프레이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견고한 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 전에 어느 비혼주의자 여성이 다른 동창생의 아이를 안고 어르며 “훌륭하게 커서 세금 많이 내야 한다.”고 괴이한 덕담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아직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였으며 언제 낳을지, 과연 낳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였지만, 그 말은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느낌은 있었지만 언어가 없어서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 느낀 불쾌함의 실체를 논리적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저 덕담을 가장한 압박에는 ‘무임승차자'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자신이 무임승차자라는 인식조차 없이, 타인의 돌봄 노동에 승차하겠다는 지독한 뻔뻔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연금과 보험을 잔뜩 들어둔 비혼주의 여성은 타인의 돌봄 노동에 무임승차하여야만 미래를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짐짓 모른다. 그가 나중에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이나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등의 인력에게서 ‘염가'로 사들이는 노동은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헌신한 타인의 선의에 기대 마련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 젊은이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면 노인은 대체 누구에게 돌봄을 기대하겠는가? 
그것을 단순히 미래 인구에게 ‘세금'을 많이 내서 내 ‘연금’을 보장해달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일은-그러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태도는(물론 그 자체도 매우 뻔뻔하지만) 무임승차자의 이기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성에게 모든 짐을 당연한 듯이 떠넘기는 지난 세대의 어르신들을 만나면 숨이 막힌다. 그런 윤리관을 문학의 미학으로 여기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작금의 현실 중에서 여성들이 인류의 미래를 보이콧함으로써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볼 때도 슬퍼진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멸망이다. 협상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 때문에 모두 자멸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낳고 나서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우리의 행복'은 증가한 것 같아. 그렇지만 ‘나의 행복'은 줄었어. 많이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일상이 대체로 ‘내 행복'을 희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니까. 그 희생을 주변의 행복이 메우는 느낌이야. 부모님, 남편, 친정 어머니, 기타 등등의 주변인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그래, 당신들이 행복하다니, 난 괜찮아.’ 하는 기분이 되는 거지.”

어떤 산술 공식으로도 정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의 저와 같은 현상은 단순히 ‘기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실체 있는 재화와 권력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이제껏 두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들을 위해 내가 희생한 경제적 이득들이 숱하게 떠올랐다.

내 아이들은 이해타산에 능하지 못한 어미 덕분에 미래 세대가 지는 부담은 모두 짊어지고 계급적 상승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우리 부부에게는) 자녀들의 계급을 상승시킬 투자 여력이 없다. 내게 바람이 있다면 내 자녀들에게 부모 돌봄의 노동까지 가중시키지는 않는 것이다.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들로 기록된 지독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다. 



*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여성도 남성만큼 자신의 이기심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만, 이기심을 추구하기 위한 전체 공간이 타인에 대한 돌봄을 희생시키며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이 권리를 더 얻으려면 남성이 의무를 더 져야 한다. (중략) 이타적 헌신(commitment)의 비용과 편익, 위험은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
- P17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해관계를 공유한다고 주장하지만 여성들의 동맹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데 달려 있다.
- P38

우리는 미래가 두려워서 과거에 집착한다. 동맹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론적 서사와 문학적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 P27

노후 소득 보장과 돌봄을 두고 걱정하는 성인들은 자녀 양육의 순편익과 필요한 돌봄을 구매할 수 있는 저축의 순편익을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이 역시 양육 의욕을 꺾는다. - P285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인은 투표권이 있는 반면 18세가 안 된 국민은 투표권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보건대, 노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들의 집단권력을 강화한다. - P283


오늘날 많은 국가의 아동은 노동자로 성장하여 세금을 내고, 젊은 세대를 키우는 데 시간이나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는 노인을 돌보게 된다.
(중략)
이런 패턴을 분명히 인정한 독일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 자녀를 둔 부모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공적 장기요양보험료를 더 적게 내는 정책 설계를 권고했다.
- P282

초기 복지국가는 사적 비용을 부모에게 보상하기보다 젊은 세대 양육으로 발생한 편익을 모든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런 정책은 처음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잠재적인 부양책으로 여겨졌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출산율 감소를 가속화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꾸준한 인구 감소를 야기할 수 있는 대체율 미만의 출산율 수준에 도달했다.
-p.281
- P281

많은 회사는 장시간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도 근무하고 갑작스러운 통보에도 출장을 갈 수 있는 최고 전문직에나 걸맞을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한다. 고용주는 이에 적합한 구직자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이상적인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여성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지금은 유명해진 한 실험에서 사회학자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거의 일치하는 가상의 구직 지원서를 미국 고용주에게 보냈다. 일부 지원서에는 부모-교사 조직에 참여한 활동 경력을 적어내 지원자가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라는 신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호는 구직자가 서류 전형 단계를 통과할 가능성을 줄였다.
- P301


정말 장기적으로는 출산율은 대체 수준까지는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인류의 멸종을 막을 수 있다.
- P341


가족을 직접 돌보는 남성 비중보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여성 비중이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도 남성이 돌봄 노동을 할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돌봄을 전담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확실한 경제적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 P59

재생산 위기
단기적 편익과 장기적 편익의 괴리가 인구학적 추세를 특징짓는다.
- P340


남성은 가장으로서 협상력을 잃지 않고자 잠재적 가구 소득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반대할 수 있다.
(중략)
일부 경제학자는 남성의 경제적 동기가 변해서 자발적으로 제도적 권력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남성은 확실히 그랬다. 그러나 극소수 남성만이 페미니스트가 요구하는 개혁을 거리낌 없이 옹호했다. 경제적 기회도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변화의 이점을 강조해 남성을 설득한 요인은 여성의 개인적, 정치적 협상이었다.
여성의 세력화에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 P234

어떤 경우에 필요는 동맹의 어머니이다. (중략) 광범위한 연대는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과 소규모 실험, 집단적 조직화 노력, 일관된 공공정책으로 만들어지고 키워지고 발전된다.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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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 가부장제 체제의 부상과 쇠락, 이후의 새로운 질서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 에디토리얼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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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적 언어로 꾹꾹 눌러담은 인류의 미래. 돌봄의 가치를 재구성하고 자본주의 경제에 저항하는 연대의 구축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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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낸시 폴브레


여성도 남성만큼 자신의 이기심을 추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만, 이기심을 추구하기 위한 전체 공간이 타인에 대한 돌봄을 희생시키며 확장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여성이 권리를 더 얻으려면 남성이 의무를 더 져야 한다. (중략) 이타적 헌신(commitment)의 비용과 편익, 위험은 공정하게 나누어야 한다. 
-p.17

페미니즘은 여성이 이해관계를 공유한다고 주장하지만 여성들의 동맹은 차이점을 극복하는 데 달려 있다. 
-p.38

우리는 미래가 두려워서 과거에 집착한다. 동맹의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론적 서사와 문학적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p.27

노후 소득 보장과 돌봄을 두고 걱정하는 성인들은 자녀 양육의 순편익과 필요한 돌봄을 구매할 수 있는 저축의 순편익을 저울질하게 될 것이다. 이 역시 양육 의욕을 꺾는다. 
-p.285

민주주의 국가에서 노인은 투표권이 있는 반면 18세가 안 된 국민은 투표권이 없다는 단순한 사실로 보건대, 노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들의 집단권력을 강화한다. 
-p.283

오늘날 많은 국가의 아동은 노동자로 성장하여 세금을 내고, 젊은 세대를 키우는 데 시간이나 노력을 거의 들이지 않는 노인을 돌보게 된다. 
(중략)
이런 패턴을 분명히 인정한 독일 헌법재판소는 2001년에 자녀를 둔 부모는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공적 장기요양보험료를 더 적게 내는 정책 설계를 권고했다. 
-p.282

누구의 아이들인가?
초기 복지국가는 사적 비용을 부모에게 보상하기보다 젊은 세대 양육으로 발생한 편익을 모든 시민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런 정책은 처음에는 경제성장에 대한 잠재적인 부양책으로 여겨졌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출산율 감소를 가속화했다. 일부 국가에서는 꾸준한 인구 감소를 야기할 수 있는 대체율 미만의 출산율 수준에 도달했다. 
-p.281

모성 불이익
많은 회사는 장시간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도 근무하고 갑작스러운 통보에도 출장을 갈 수 있는 최고 전문직에나 걸맞을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한다. 고용주는 이에 적합한 구직자를 식별할 수 없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이상적인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여성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지금은 유명해진 한 실험에서 사회학자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거의 일치하는 가상의 구직 지원서를 미국 고용주에게 보냈다. 일부 지원서에는 부모-교사 조직에 참여한 활동 경력을 적어내 지원자가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라는 신호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신호는 구직자가 서류 전형 단계를 통과할 가능성을 줄였다. 
-p.301

정말 장기적으로는 출산율은 대체 수준까지는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인류의 멸종을 막을 수 있다. 
-p.341

가족을 직접 돌보는 남성 비중보다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는 여성 비중이 더 빠르게 증가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아마도 남성이 돌봄 노동을 할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돌봄을 전담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확실한 경제적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p.59

재생산 위기
단기적 편익과 장기적 편익의 괴리가 인구학적 추세를 특징짓는다.
-p.340

남성은 가장으로서 협상력을 잃지 않고자 잠재적 가구 소득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반대할 수 있다. 
-p.234

일부 경제학자는 남성의 경제적 동기가 변해서 자발적으로 제도적 권력을 포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어떤 남성은 확실히 그랬다. 그러나 극소수 남성만이 페미니스트가 요구하는 개혁을 거리낌 없이 옹호했다. 경제적 기회도 중요하다. 그러나 결국 변화의 이점을 강조해 남성을 설득한 요인은 여성의 개인적, 정치적 협상이었다. 
여성의 세력화에는 집단행동이 필요하다. 
-p.234

어떤 경우에 필요는 동맹의 어머니이다. (중략) 광범위한 연대는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개인의 노력과 소규모 실험, 집단적 조직화 노력, 일관된 공공정책으로 만들어지고 키워지고 발전된다. 
-p.352


대중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가 별다른 설명 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독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정치경제적 지식이 선행되어 있다는 가정하에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용감한 책이다. 사실 이 시대에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게 별로 용감한 일은 아니다. 무임금 돌봄의 착취 고리에서 탈주하겠다는 선언, 그것은 지난 세대에 용감한 선언이었다. 지금 용감한 선언은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에 서서 ‘무임승차‘의 뻔뻔함을 지적하는 일이다. 무임승차조차 선택할 수 없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이다. 그들이 옹호하는 사람들이 지식 계급으로나 경제적 계급면에서 아무런 우위도 확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은 용감한 일이 된다. 

이 책은 용감할 뿐만 아니라 영리한 책이다. 저자는 정치적 선언이 경제 이데올로기의 어떤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낸시 폴브레에 비교해 낸시 프레이저는 마르크스주의의 견고한 틀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래 전에 어느 비혼주의자 여성이 다른 동창생의 아이를 안고 어르며 “훌륭하게 커서 세금 많이 내야 한다.”고 괴이한 덕담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불임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아직 아이를 낳지 않은 상태였으며 언제 낳을지, 과연 낳을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였지만, 그 말은 상당히 불쾌한 느낌을 주었다. 느낌은 있었지만 언어가 없어서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때 느낀 불쾌함의 실체를 논리적 언어로 재구성할 수 있다. 

저 덕담을 가장한 압박에는 ‘무임승차자‘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자신이 무임승차자라는 인식조차 없이, 타인의 돌봄 노동에 승차하겠다는 지독한 뻔뻔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전문직종에 종사하며 연금과 보험을 잔뜩 들어둔 비혼주의 여성은 타인의 돌봄 노동에 무임승차하여야만 미래를 보장받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짐짓 모른다. 그가 나중에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이나 간호사, 요양보호사 등등의 인력에게서 ‘염가‘로 사들이는 노동은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헌신한 타인의 선의에 기대 마련되는 것이다. 이 세계에 젊은이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면 노인은 대체 누구에게 돌봄을 기대하겠는가? 
그것을 단순히 미래 인구에게 ‘세금‘을 많이 내서 내 ‘연금’을 보장해달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일은-그러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태도는(물론 그 자체도 매우 뻔뻔하지만) 무임승차자의 이기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나는 여성에게 모든 짐을 당연한 듯이 떠넘기는 지난 세대의 어르신들을 만나면 숨이 막힌다. 그런 윤리관을 문학의 미학으로 여기는 문장들을 만날 때도 숨이 막힌다. 그렇지만 작금의 현실 중에서 여성들이 인류의 미래를 보이콧함으로써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볼 때도 슬퍼진다. 그것은 대안이 아니다. 그것은 멸망이다. 협상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 때문에 모두 자멸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낳고 나서 누군가 내게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우리의 행복‘은 증가한 것 같아. 그렇지만 ‘나의 행복‘은 줄었어. 많이 행복한 순간도 있지만, 일상이 대체로 ‘내 행복‘을 희생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니까. 그 희생을 주변의 행복이 메우는 느낌이야. 부모님, 남편, 친정 어머니, 기타 등등의 주변인들이 즐거워하는 걸 보면 ‘그래, 당신들이 행복하다니, 난 괜찮아.’ 하는 기분이 되는 거지.”

어떤 산술 공식으로도 정답을 구할 수 없는 현실의 저와 같은 현상은 단순히 ‘기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실체 있는 재화와 권력으로도, 치환될 수 있다. 

이제껏 두 아이를 키우며 경제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가치들을 위해 내가 희생한 경제적 이득들이 숱하게 떠올랐다.

내 아이들은 이해타산에 능하지 못한 어미 덕분에 미래 세대가 지는 부담은 모두 짊어지고 계급적 상승은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내게는(우리 부부에게는) 자녀들의 계급을 상승시킬 투자 여력이 없다. 

추상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들로 기록된 지독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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