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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 사건 - 상 - 개정판 ㅣ 백탑파 시리즈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두 해 전에 이 책을 처음 사서 읽었다. 그때의 내 느낌은, 글쎄 뭐랄까, 한 마디로 애매했다.
당시 나는 이 책을 역사추리소설, 즉 실제로 존재했던 시대와 인물들을 배경으로한 추리소설로 읽었고, 잘 짜진 스릴과 추리, 반전을 기대했다. 그런 부분에서 이 글은 그리 특별하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 엉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개인적으로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글의 전반에 능지처참을 당하는 매설가(소설가) 청운몽이 자신의 소설들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는 해석과 살인 사건들 뒤에 정치적인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설정이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도 컸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웬걸? 전혀 다르게 읽어졌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추리 소설이 아닌 추리 소설을 형태를 취한 역사 소설로 읽으니 처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흥미진진했다.
18세기 말 조선의 제22대 왕이었던 정조의 시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의 부흥을 꿈꾸었던 실학자들, 일명 북학파 훅은 백탑파로 불렸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의 주축이 되었던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가 등장하고 무사 백동수도 모습을 보인다. 조선의 개혁과 중흥을 꿈꾸었던 이들 북학파 학자들의 글과 이야기들이 글의 곳곳에 삽입되어 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열망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들은 시에 몰입했을 뿐만 아니라 경세의 바람까지 품고 있다. 이 나라 조선을 완전히 탈바꿈하려는 것이다. 박지원과 홍대용을 모시고 압록강 너머 연경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도, 함께 모여 자하주를 마시며 밤을 새우는 것도, 모두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을 단 한 번의 순간을.
(pg. 366-367)
이야기는 의금부의 젊은 도사인 이명방이 매설가(소설가) 청운몽을 도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잡아들여 처형하면서 시작한다. 이 글의 화자이기도 한 이명방은 종친으로 조선 제일의 무사로 불리는 백동수에게 무술을 배워 그와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나온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의 제약으로 벼슬을 하고 뜻을 펼 수 없는 백동수는 그와 비슷한 처지인 백탑 서생들과 깊은 교분을 나누고 이명방을 그들에게 소개한다. 백탑 서생들은 청운몽과 깊이 알던 사이로 그의 무죄를 주장한다.
청운몽이 스스로 죄를 자복하고 죽임을 당한 이후에도 살인은 멈추지 않고 이명방은 백탑 서생들 중 하나인 꽃에 미친 선비 김진과 함께 사건을 재조사한다.
역사 추리 소설이라는 맥락 외에도 이 글은 소설에 대한 변으로-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소설로 쓴느 소설사’-읽힐 수 있다. 필사로 한정적으로 제작, 배포되던 소설들이 방각-목판에 새겨 찍어 냄-이라는 기술을 통해 다량으로 제작되고 판매되면서 크게 인기를 누리게 되자 정조를 포함한 일부 기득권층이 이 허황된 글들(?)이 사람들을 미혹하고 공맹의 깊은 글들을 멀리하게 한다고 여겨 말살하려고 한다. 이들에게 조선 제일의 매설가로 불리던 청운몽과 그의 소설들을 읽는 사람들을 둘러싼 이 살인사건은 소설의 위험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소설의 가치에 대해 항변한다.
“한낱 소설이 아닌가? 심심풀이로 세책방에서 빌려 읽는다면 모를까 이렇듯 애지중지 모아 둔 까닭이 무엇인가? 공맹의 가르침보다도, 노장이나 석씨의 가르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김진이 차분하게 답했다.
“작은 이야기이기 때문일세.”
“그게 무슨 말인가? 작은 이야기라서 소중하다니?”
“여기까지 들어오는 동안 자네가 본 서책들은 모두 성현 말씀을 담은 큰 이야기들이지. 거기엔 살아가는 데 중요한 가르침들이 있어. 그 말씀들을 가슴 깊이 아로새기면 큰 실수는 하지 않고 삶을 이어 갈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가끔은 그 옳고 옳고 또 옳은 대설보다 인간이라서 생기는 나약함이나 어리석은 실수, 검은 욕망이나 처절한 눈물을 담은 작은 이야기들이 그립다네. 이때 크고 작다는 구별은 무엇인가? 큰 것은 옳고 바르고 가치 있다는 뜻이고 작은 것은 그르고 바르지 못하고 가치 없다는 뜻이 아닌가. 가치 없는 것에서부터 가치를 발견하는 작업, 이것은 참으로 신기하고 오묘하다네. 그래서 자네도 소설을 좋아하는 것로 아네만……. 내 생각이 틀렸는가?”
(pg. 293-294)
“경건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 공맹이 남긴 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가르침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네. 소설은 독자들을 바로 끌어들인다네. 그 안으로 쑤욱 들어간다 이 말이지. 주인공과 한 몸이 되어 싸우고 사랑하며 한평생을 보내다 보면, 무슨 일이든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서 참여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지. 이건 전혀 다른 경험이야. 소설이 아닌 어떤 서책이 그 같은 체험을 독자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그 낯섦 때문에도 소설이 방각되는 석을 막을 수 없을 걸세. 막으면 막을수록 기갈은 커지는 법이니까?”
(pg. 298)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역사적 교양도 얻었다.
2013년 3월 17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제목: 방각본 살인사건 백탑파, 그 첫 번째 이야기 上&下
지은이: 김탁환
펴낸곳: (주)민음사
1판 1쇄 펴냄 2003년 7월 15일
2판 4쇄 펴냄 2010년 1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