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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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3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원작 Everyman은 2006년 미국에서 영어로 출간 되었다.    

 

 

필립 로스는 몇 해째 해마다 강력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고 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이 작가의 글을 처음 접했다. 역시나 허명이 아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이지만 일생을 작가로 전념해온  필립 로스의 깊이와 관록 완연히 느껴진다.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래서 더 가슴에 와 닿는 인상 깊은 글이었다.

 

 

이 이야기는 뉴저지의 한 황량한 공동묘지에서 치러지는 주인공의 장례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가족과 친척들, 생전 그를 알았던 동료와 친지들이 모여 그의 생전에 있었던 일들을 추억하고 그의 시신을 땅에 묻고 떠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는 그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천천히 다시 더듬어 내려오며 그 사이사이 그의 노년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주인공 ‘그’는 1933년 미국 뉴저지 엘리자베스라는 곳에서 작은 보석상을 하는 유태인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평생 세 번 결혼했고 세 번 이혼을 했다. 첫 결혼에서 두 아들을, 두 번째 결혼에서 딸을 두었다. 두 아들은 이혼으로 그들을 떠난 ‘그’를 평생 미워했고 딸은 그를 사랑했다. ‘그’는 평생 광고 쪽 일을 하며 능력을 인정받아서 꽤 높은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적당한 나이가 되어서 편안한 노년을 계획하며 퇴직했다. 퇴직해서도 뉴욕에 살고 있던 ‘그’는 9.11을 겪고 저지쇼의 은퇴자 마을로 이주를 해서 한적한 노년을 보낸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던 바다라 한들, 오직 그 바다만 보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겠는가?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pg. 131)

 

작가는 의도적으로 주인공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우리 중 누구일 수도 있는 에브리맨(everyman)이다. ‘그’는 삶의 어떤 면에서는 적당히 성공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실수도 하고 실패도 경험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오십 대에는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서 두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나이가 들어 무기력해지자 사라지는 젊음에 절망하며 젊은 여자에게 추파를 던져보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작가는 감정이 넘치지도, 그렇다고 메마르지도 않은 담담한 어조로 서술해 나간다. ‘그’가 노년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겪게 되는 일련의 건강상의 위기들과 그에 따라오는 무력감과 위기감, 불안조차도.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이미 죽었거나, 병들어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건강상의 문제가 없던 그의 두 번째 아내는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마비가 온다. 은퇴자 마을에서 알게 된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된다. ‘그’ 자신은 일곱 해에 걸쳐 매년 크고 작은 수술을 받게 되고 그럴 때마다 그의 곁을 지키는 사람들은 줄어간다.

 

그러나 그가 알게 된 것은 삶의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맹공격이 가져온 결과 전체와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긴 직장생활 동안 사귄 모든 사람의 괴로운 사투를 알았다면, 가각의 사람들의 후회와 상실과 인내에 담긴, 공포와 공황과 고립과 두려움이 담긴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알았다면, 이제 그들이 떠나야 할 것, 한때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 모든 것을 알았다면, 그는 하루 종일, 도 밤늦도록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적어도 수백 통은 해야 했을 것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었다. 노년은 대학살이었다. (pg. 162)

 

그러나 이제는 수많은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점점 줄어드는 과정에 있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pg. 167)

 

그의 노년은 외롭고 비참하다. 노쇠해지는 몸에는 점점 수술로 인한 흉터자국이 늘어가고, 그의 정신은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가 늘어난다. 그리고 그는 몇 번째 되풀이되는 수술을 받다가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첫 유년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늘씬한 상처 하나 없는 몸’과 바다. 아버지와 보석상. 노년의 대학살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기억으로.

 

그는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연약함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지금 살아 있기를 바라는 갈망,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다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갈망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pg. 177)

 

이 책은 2006년 5월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작가인 필립 로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과 같은 1933년생이니 그의 나이 만 일흔셋일 때 책이 나온 셈이다. 노년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경험이 녹아 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 이야기는 참 사실적이다. 감정적이거나 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겪을 법한 나이 들어가는 것, 노쇠에서 오는 건강상의 문제들, 그와 함께 오는 현재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 과거에 대한 회한과 후회들이 가슴을 치며 와 닿는다.

 

한 해의 끝을 맞으며 늙음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의 노년도 이렇게 한 해 더 가까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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