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서머 - NaVie 37
조강은 지음 / 신영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2012년 10월 9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을 좀 읽었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유명세의 이유가 씁쓸하면서 안타깝다.

책이 출간 된 후 그 일부가 다른 작가에 의해 두 차례나 표절을 당했고 작가분이 다시는 로맨스 소설을 쓰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절필을 하셨다. 덕분에 이 책은 이 분의 첫 출간작이자 유일한 출간작이 되어버렸다. 앞으로 재판이 되거나 이북으로 출간 될 가능성도 거의 없는 탓에 이 책은 절판본 중에서도 몸값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이야기지만 책을 읽고 나니 더욱 안타깝다.

 

첫 25장 정도를 읽고 다시 한 번 책표지를 살펴보았다. 감탄이 절로 났다. 제목이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텁텁하면서도 끈적거리는, 또 한편 몽환적인 느낌을 끌어내는 글들이 한여름의 열대야와 장마를 연상시켰다. 

 

어린 시절 가장 믿었던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사람에 대한 기대를 놓아버린 채 살아가는 여자와 집착으로 얼룩진 부친의 사랑을 목격하고 사랑을 원치 않게 된 남자. 두 사람이 만났다.

 

-서정연

그럼에도 그 사람들마저 자신을 버릴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숨소리, 발소리조차 죽이며,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고분고분 지냈다. 그러는 자신이 구질구질하고 싫었음에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살아가야 했으니까. 버림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 때는 그렇게 사는 것이 버림받는 것보다 더 나쁜 상태였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정연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제일 경멸한다. 비굴하게 납작 엎드려 살아온 자신.

(중략)

정연에게는 슬픔은 그런 것이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가두어 놓은 탓에, 오래 잠복해 있는 슬픔은 더욱 깊어져 결국 마음에 낡고 녹슨 칼날이 되었다. 불현 듯 생각날 때마다 그 칼은 지금처럼 몇 번이고 비비듯 쑤셔 댔다.

(pg. 73-74)

 

-백준하

여름은 사나운 계절이다. 폭풍은 무자비하고, 폭염은 잔인하다. 차에 바이올린 소리가 터질 듯 가득 찼다. 준하는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눈을 감았다. 오감이 생생하게 반응한다. 이건 미친 짓이다. 이 미친 질주를 그만둘 때는 싫증이 날 때이거나, 이대로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죽을 때,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pg. 29)

 

-첫 만남

남자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정연은 꽉 잡힌 손에서 땀이 솟는 것 같았다.

뜨겁고, 질척거린다.

“뭐예요, 이름?”

이어진 남자의 질문에 정연은 활짝 웃어 보였지만 눈이 마주치자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입가에서 웃음이 서서히 지워졌다.

당혹스러웠다. 남자의 눈은 단순히 이름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통째로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이 남자는 분명 모든 여자들을 이런 눈빛으로 쳐다볼 터였다.

(pg. 10)

 

소파에 앉아 여기저기 둘러보던 여자와 자신의 눈이 마주쳤을 때 둘이 눈으로 나눈 대화. 그 생소한 친밀감. 손에 잡지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손을 뻗어 여자의 얼굴을 만져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여자가 아무리 흥미를 끈다 해도, 그가 정한 선은 분명했다. 무료한 일상에 작은 즐거움을 주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자의 분홍빛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해도, 방금 전의 수줍은 웃음에 가슴이 슬쩍 두근대었다 해도. 준하는 현관문을 열고 나섰다. 6월 초의 햇볕은 맑고 뜨거웠으며 짙은 풀 냄새가 정원에 진동하고 있었다.

(pg. 25)

 

-도발

“베를리오즈까지 그렇게 계산적으로 연주하다니, 남자랑 잘 때도 그래요?”

백준하가 짐짓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잘못 눌러져 어긋난 피아노 음이 꼴사납게 거실을 울렸다.

커튼이 크게 물결쳤다.

서늘한 공기와 후텁지근한 공기가 뒤섞여 들어왔다.

정연은 백준하를 쏘아보았다.

남자의 얼굴엔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친놈.

(pg. 14)

 

-서정연

갑자기 흐려지는 시야에 정연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눅눅한 저녁 공기가 맨팔에 감겨 왔다. 백준하가 생각났다. 나른한 검은 눈동자, 나지막한 웃음소리, 건들건들한 몸짓, 무례한 말, 뜨겁던 손끝.

정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시작부터 지치는 여름이다.

(pg. 19)

 

난에게 백준하와의 사랑은 단막극 같은 거거든. 50분짜리의, 굳이 해피엔딩으로 끝낼 생각도 없었던 여름 특집 단막극.

아무리 슬펐던들, 아무리 기뻣던들, 아무리 재미있었던들, 50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끝나는 베스트극장 같은 거였어.

(pg. 236)

 

-백준하

준하는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늪에 빠졌다고 느꼈다. 무엇이든 빨아들이는 검은 진흙물에 흔적도 없이 잠겨 버렸다.

(중략)

너는 모른다, 내 마음 속의 지옥을. 일렁이는 불길을, 성난 분노를, 내 두려움과 쓸쓸함을. 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알지 못한다. 네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내가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지, 넌 알지 못한다. 쾌락의 천국에서도 절대 사랑한다 말하지 않는 너 때문에 매일 밤 절망하는 나를, 넌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난 너를 사랑한다.

자신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준하는 그 사실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갔다. 옷을 입은 채 물 속에 빠진 기분도 썩 괜찮았다.

(pg. 304)

 

일반소설만 주로 읽는 분들이 어쩌다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 너무 오글거려서 못 읽겠다고들 한다. 아마 이글은 이런 쪽으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글들이 무척 감각적이다.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문장이 이 글의 장점이라면 스토리 면에서는 조금 아쉬운 느낌도 있다. 중반을 넘어서부터는 전개가 너무 빤하고 앞부분에 꽤 비중 있게 나왔던 백준하의 옛 연인이자 새어머니인 강수진이 흐지부지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역시 탐나는 책이다.

이전부터 얘기를 들어오다 구할 길이 없어 볼 수 없었는데 우연히 아는 분께 빌려서 읽게 되었다. 책을 꿀꺽하고 연락을 두절…… 이라는 생각을 잠시잠깐 했다. 그만큼 언젠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글이다. 특히 여름 열대야 밤에 읽으면 딱 일 것 같다.

아…… 책을 돌려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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