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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장미
이서형 지음 / 신영미디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2012년 9월 18일에 종이책으로 읽다.
이 작가분의 글은 ‘에고이스트’, ‘차가운 열정’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이다. 그리고 이 글이 내게 있어서는 그중 최고였다.
평생 바라오던 발레리나로써의 꿈이 좌절되고 부모로부터도 차갑게 외면당한 김은서는 밤에 ‘블루로즈’라는 재즈 클럽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후배가 운영하는 클럽 ‘블루로즈’를 찾은 강석주는 여리고 가냘픈 외모와 우수어린 눈동자, 우아한 몸짓을 가진 김은서에게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는 당당하고 오만한 겉모습과 달리 재벌가의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후 자수성가한 기업가였다.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결국 버려지는 경험을 한 은서와 사생아로 태어나 버려진 후 고아로 자란 석주는 서로에게 매혹되었으면서도 선뜻 다가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감정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며 조금씩 다가간다.
흔한 설정이다. 특별한 악조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감정 묘사, 특히 여자주인공 김서은의 생각과 감정 변화가 정말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좋았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제 석주가 앉아 있던 자리엔 낯선 남자가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가 거기 있다는 석에 화가 났다. 빨갛게 타들어 가는 담뱃불과 함께 그는 거기 있어야 했다. 지난 1주일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는 꼭 거기 있어야 했다.
푸른 조명이 비켜간 어두운 그늘 아래 검은 그림자는 항상 거기 있었다.
그림자에 가린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그를 보기 전에 그녀의 몸은 그의 존재를 알아챘다. 홀을 가로질러 무대로 걸어갈 때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해 고개를 돌리면 석주가 거기에 있었다.
석주의 담배 끝이 뜨겁게 타들어 가면 그녀의 허리 아래로 짜릿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하얀 담배 연기가 퍼져 나가면 그녀의 속눈썹은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종이에 스며드는 물처럼 그녀의 머리에, 가슴에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pg. 54-55)
그의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춤을 추는 듯한 유쾌하게 출렁이는 눈빛이 가슴 깊숙이 각인되었다. 이 사람, 싱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는 이 남자, 온몸이 저릴 정도로 탐이 났다.
하지만 강석주는 가벼운 유희의 상대가 아니었다. 관계가 깊어지면 결국 상처를 입는 것은 그녀였다.
금기(禁忌).
하지만 저항할수록 욕구는 더 강렬해질 게 분명했다. 욕구가 집착으로 변하고 결국은 중독될 것이다. 코코아처럼…….
(pg. 86)
석주를 사랑했다.
그 사실을 가슴 속 깊이 받아들였다. 석주는 삶을 밝히는 아름다운 빛인 동시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고통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그녀는 속으로 슬프게 중얼거렸다. 얼마나 쉽게 변질되고, 또 얼마나 쉽게 대상을 바꾸는지.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은 아무리 아파도 도망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사랑을, 이 남자를 바라보리라. 그에 대한 감정을 거부하고 부정하기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pg. 272)
저돌적이고 오만한 석주가 왠지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조금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뒤편에 나오는 그의 고백에 그런 인상은 깨끗이 날아갔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식물학자들은 푸른색의 장미꽃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절대 불가능한 것이라고 여겼지. 그들에게 블루 로즈는 얻을 수 없는 소망이자 불가능한 아름다움이었다.”
……
“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
“차가운 푸른빛 속에 감추어진 뜨거운 열정.”
……
“나에게 블루 로즈는…… 너야.”
(pg. 297-298)
로맨스를 위한 로맨스, 딱 로맨스같은 로맨스가 읽고 싶은 분들께 권한다. 특히 글 전반에 쓸쓸하고 쌉쌀한 느낌이 드는 것이 요즘같이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읽으면 정말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