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니, 선영아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사랑이라니, 선영아

지은이: 김연수

펴낸곳: 작가정신

초판 1쇄 발행 2003년 6월 20일

2012년 8월에 종이책으로 읽다.

 

 

며칠 전에 김연수 작가의 신작 산문집인 ‘지지 않는다는 말’을 구입했다. 이 책을 몇 장 들춰보다가 문득 이 작가분의 책을 한 권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오래 전에 사서 아직 읽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게 해서 빼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사들고 와서 읽지 않고 책장에 고이 모셔둔 뒤로 벌써 한 번 개정판이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작가정신에서 펴낸 소설향이라는 시리즈의 열여덟 번째로 나온 구판이다. 책 내용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난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내용만큼이나 책의 제본과 종이질에 감탄했다. 요즘 많은 개정판들이 가격을 올려 나오지만 정작 제본이나 종이는 이전만 못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 모든 책들이 딱 이정도만 나와 주면 정말 좋겠다.  

 

작가의 말에도 나와 있듯이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에 대해 참 많은 것은 짧은 글에 잘도 풀어놓았다고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 문장도 흘릴 것이 없다.

광수는 대학동창이었던 선영과 결혼을 한다. 

 

미혼남에서 유부남으로 바뀌는 과정은 달에서 지구로 귀환하는 일과 비슷하다. 유부남이 되면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중력이 여섯 배나 강해진다는 사실에 멍멍해진다. 하지만 달에서 지구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다. 반드시 무중력 공간을 거쳐야만 한다. 신혼여행이 바로 그런 무중력 공간에 해당한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은 법적인 미혼녀의 육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탐닉할 수 있는 그 밀월여행은 확실히 무중력 상태와 닮았다.

(pg. 17)

 

미혼녀에서 유부녀로 바뀌는 건, 뭐랄가 호두를 깨무는 일과 비슷하다. 애당초 허기진 배를 채우겠다고 깨문 게 아니다. 왜 먹지 않고 놔두느냐는 주위의 채근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게 먹을 게 없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볼썽사나운 껍질뿐만 아니라 초라한 알갱이까지 갈부수고 난 뒤에야 차라리 그냥 막연하게 상상하던 때가 더 좋았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미혼녀와 유부녀, 그 사이에는 무중력 공간의 황홀감 따위는 없다. 그저 혼자 빗자루를 들고 정리해야 할 부서진 감정의 껍질나부랭이들만 파몰아칠 뿐이다.

(pg. 19)

 

위 구절은 결혼을 한 번이라도 해보거나 한 상태인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한 순간 이 작가분이 여성인가 의심해 봤다.^^

 

‘쫀쫀한’ 광수는 자신의 결혼식에서 신부 선영 부케의 꺾어진 꽃대를 보고 자신들의 또 다른 동창이자 선영과 예전에 사귀었던 ‘얼멍얼멍’한 지우와의 사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쫀쫀하다’의 반대말은 ‘얼멍얼멍하다’다. 얼멍얼멍한 스웨터라면 그 털실 한 올은 옷의 일부가 되고 쫀쫀한 스웨터라면 불필요한 보풀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게 보풀 때문이었다고 악쓰면 악쓸수록 자신이 얼마나 쫀쫀한 인간인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 다들 알겠지만, 그건 사람 됨됨이의 문제지, 불길한 예감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왜 죽음과 같은 절망에 이르는지 아는가? 그건 스스로 무덤을 팠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세상에 팔레노프시스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란 없다. 광수는 그 사실을 몰랐다.

(pg. 16)

 

그때부터 광수와 진우의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펼쳐진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와 함께 했던 일화들을 통해 둘의 상반된 애정관, 결혼관 등이 나온다.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의 시각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 진우의 낭만적 사랑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음모론도 흥미로웠고 거기에 대한 광수의 답변에는 실실 웃었다.

 

“주둥이가 아파야 하는데, 왜 이가 아프냐? 그런데 너만 보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pg. 51)

 

소설 여기저기에 작가의 뛰어난 지력이 현학적이지 않고 부담스럽지 않게 드러난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요즘 시대를 대표하는-나의 세대와 가깝다.-대중문화적인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섞여 있다. 그 결과 정말 재미있고 흥미로운,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적인 사랑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글 곳곳에는 ‘쫀쫀한’ 광수의 사랑에 대한 고찰 내지는 상념들이 있다. 그중에 꽤나 마음에 남는 글들을 몇 구절 옮겨 본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빠져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면 각자 혼자 힘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것. 그 구지레한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뼛속 깊이 알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다.

(pg. 57)

 

꽃에는 입술이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사랑에는 혀가 없지만 네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내라고 종용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미 우주항공국의 업무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pg. 80)

 

이 책을 읽고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이제 나도 내 세대 작가들의 책을 읽어야 겠다는 것이다.  

 

나는 고전을 좋아한다.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회자되고 후 세대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들이 궁금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글들을 읽고 수차례 실망한 경험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한국서적을 구하기 힘든 외국에 오래 거주한 까닭도 있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 소설들은 주로 신경숙, 박완서, 이문열, 황석영 같은 분들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나에게 최근에 읽은 박민규나 김애란 같은 젊은 작가들의 글은 큰 충격과 기쁨이었다. 이 책을 읽고 김연수라는 작가를 나는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미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국에서는 유명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새로운 작가분이다. 정말 기쁘다. 앞으로 이 작가분의 많은 글들을 읽을 생각에 벌써부터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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