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니 팬클럽이 생겼습니다 - 오늘도 반짝이는 엄마들에게
정소령 지음 / 파지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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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더 많이 괜찮았던 책. 사실 시중에 널린 그렇고 그런 책이 아닐까 잠시 착각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마땅한 일을 가지지 않은 엄마들을 위로하는 책. 단순히 "그렇게 살아도 괜찮아!" 이렇게 외치는 책들이 많은 요즘이지 않은가. 내 착각에도 이유는 있었다.

내 게으름을 덮어줄 어떤 핑계가 필요했다. 나도 결혼 전 나의 직업을 가진 나름 멋진 여성이라고 자부했던 시기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직업과는 거리가 멀어진 전업주부로의 삶을 벌써 11년째 이어오고 있다. 작가는 결혼해서 첫 아이를 2013년에 낳았다고 했으니 나랑 같다. 그래서 더 공감이 많이 되고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결혼 전 잘나가던 커리어 우먼에서 육아를 위해 당당하게 퇴사를 하고서도 왜인지 작아지던 자신의 모습에 위기감도 들었겠지만 새로운 '시작'의 시작들로 변해가는 자신의 상황을 마주한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육아를 선택했음에도 어느 순간 나 자신의 존재가 없어지는 듯한 느낌은 전업주부라면 누구나 알 듯. 작가는 이야기한다. 무언가 대단하고 완벽한 성공을 위해 시작을 하려고 하면 마음부터 무겁고 힘든 거라고. 대단한 성공을 위한 게 아니더라도 나만의 작고 소중한 '시작'을 다정하게 어필한다.

초반에는 우당탕쿵탕 아이들과의 육아 일상을 보게 되어 '나도 빛나던 내 아이와의 순간을 짧은 글으로나마 기록해둘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가 후반부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는 또 나도 '큰 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저래 나를 흔든 에세이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아니면 육아를 잘 하기 위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책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이 책은 어느 누구도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무언가는 피해야 한다는 걸 명시하지 않으면서도 독자 스스로 마음의 열정 씨앗 하나를 틔우게 하는 느낌이었다.

지금 나 자체로서도 빛나고 소중하다는 걸 물론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새로운 시작에 앞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는 작은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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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우리 아이들이 대단한 행복을 얻는다면 물론 좋겠지만, 소소한 행복 역시 중요하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지금 손에 쥔 사탕 한 알의 행복을 잊지 않고 매일매일 그날의 행복을 놓치지 않고 흠뻑 누리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87. 사랑하는 마음은 상대를 향한 관심을 통해 표현된다.

120. 행복을 말하기엔 너무팍팍한 세상이었고 결과물을 내기 위해 달리는 동안 중요한 건 스피드였지 행복 따위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인가 자문하는 순간 느려지는 게 뻔할 터. 애써 행복을 미뤄두어야 했다. 그래야만 그 세상의 기준을 맞출 수 있었다. 숨 차게 뛰는 나 역시 금방 그 세상에 편승했다.

130. 외부의 목소리에 연연할수록 내 목소리는 작아진다.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상관없다며, 내 마음에만 귀 기울이는 아이가 부럽다. 이 아이도 어른이 되면 외부의 목소리에 마음을 빽기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웃을 바꿔 입었을 뿐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다. 아이가 잠옷을 입었을 때, 쫄바지에짧은 티셔츠를 입었을 때, 멋진 옷을 입었을 때, 똑같이 사랑스러운 것처럼.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 울타리가 달라졌다고 해서 내가 달라지진 않았다. 위치가 달라졌다고 해서 내 가치를 평가절하할 이유는 없는 것. 예전의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나도 그렇다.

131.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뿐이라는 걸알면서도 나는 왜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을까?

132. 그러니 나의 가치를 누구보다 먼저 기억해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타인은 나만큼 나를 알 수 없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판단하는 세상의 시선에 휘둘릴 이유는 없다. 세상보다 먼저 내 편이 되어야 하는 건 나 자신이고 적어도 나만은 나를 인정해 줘야 한다. 세상은 울타리가 달라진 나를 조금 다르게 본다 해도 나는 잊지 않기로 했다. 빛난다고 믿었던 날에 내가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도 분명 가지고 있을 내 가치를. 나의 꿈과 가능성을. 내 안의 온기를. 지금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는 존재를.

135. 나 역시 몰라서 마음이 좁은 사람이었다. 내가 모르는 줄도 몰랐던 무지렁이였다.

145. 하루는 24시간.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 속을 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시간 활용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빠듯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선택과 집중'을 잘하는 스타일이다. '선택과 집중'이라고 말하니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미루기'다. 선택한 것에 집중하고, 선택받지 못한 것은 미뤄두기.

147. 아이들을 위한 시간에 충실한 것과 살림을 잘하는 건 별개의 것이다. 살림을 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구멍이 생겨도 괜찮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구태여 그 이상으로 잘하려고 노력하지 말자.

169. 각자가 가진 경험과 생각은 모두 소중하다. 소중한 이야기들이 휘발되어 버리면 아깝지 않은가. 기억은 휘발되지만 기록은 남는 것. 쓰기는 여러모로 쓸모 있다. 책을 썼기 때문에 블로그에 연재를 하게 됐고 글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있게 됐다. 시작이 시작을 부르는 마법이었다.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고민만 하다가 실행하지 못한 것들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고, 실행한 일들만 여기에 남았다. 다음 계단을 여는 문이 되어.

#정소령 #아이를키우니팬클럽이생겼습니다 #파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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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엔딩
이진영 지음 / 파지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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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엔딩! 제목부터 시선을 끌었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기대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한 자리에서 완독을 했다. 작가가 일단 재미있게 흥미를 유발하면서 글을 이어나가서 쉬어 가고 싶다는 생각이 일절 들지 않았다.

초반 알콩달콩한 신혼 생활의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도 한때 나의 신혼 생활을 떠올리며 마음이 간질간질 미소가 배어 나왔다.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에세이구나, 라고 느낄 때쯤에 나름의 반격을 준다. 그래 결혼 생활이 누군가의 로망처럼 간지럽고 달콤하고 사랑스럽기만 하겠냐고. 물론 달달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시간들도 분명 있지만 결혼 생활은 100프로 현실이다.

신혼의 단꿈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어쨋든 신혼의 로망은 반드시 끝이 난다. 프롤로그에서 작가도 언급했듯이 누구에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도 말 못 할 것도 없는 결혼 생활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달콤함과 비극이 동시에 존재했다. 작가의 신혼이 엔딩으로 끝을 맺은 사건을 언급할 때에는 나도 함께 숨이 막혔다. 정글에 내던져진 기분.

이걸 어떻게 감당하냐 싶을 정도의 사건에 뒷 이야기가 궁금해 책장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그래도 스스로에게, 그들 부부에게 건투를 빌며 희망적으로 마무리를 했다. 부부란 이런 모습 아닐까. 서로 만들어온 시간들을 단칼에 내칠 수도 없다. 절대 용납 안되는 사건들이 있다면 단칼도 받아들이겠지만 함께 겪어낼 수 있다면 서로의 노력으로, 연인 때의 설레던 마음 보다는 좀더 단단하고 강한 그 무엇으로 이겨내 보는 게 결혼 생활의 하루하루가 아닐까.

함께 기쁠 때를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수고했듯이, 서로에게 다가올 내일도 희망적으로 맞이해보자는 의지로 살아간다. 현실을 마구 짓밟겠다는 소설은 아니지만 로망 만으로만 마음을 가득 채운 채로 신혼 생활을 시작하는 신혼 부부들에게 필독서로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결혼은 현실이며, 정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혼을 추천한다. 설렘이 편안함이 되고 익숙해지며 그렇게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의 소중함은 겪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다. 대신 진정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는 아주 기본적인 밑바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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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스테이크에 와인을 마시는데, 두둠칫 두둠칫 음악이 흥겹다. 자연스럽게 한 명이 일어나 음악에 몸을 맡긴다. 그러자 한 명, 또 한 명이 일어나며 원이 만들어졌다. 대단한 춤을 추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나는 지금 몹시 신이 난다'는 느낌을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도 내적 댄스 본능이 폭발했다. 술 때문일 수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낯선 곳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와 남편은 용기를 내어 그 원에 합류했다. 식당 안의 러시아 사람들이 동양에서 온 커플을 환영해주었다. 우리는 흥에 겨웠고, 신이 났고, 그 순간을 즐겼다,

🔖69. 여보, 올 한 해 고생했어. 내년에도 잘해보자.

🔖127. 문득 앞날이 격정되었다. 둘 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다.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나이다. 그래도 공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모아놓은 논과 남편의 퇴직금으로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잘 놀자.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으니까.

🔖156. 그는 부족함 없이 돈을 썼다고 한다. 돈이 부족하면 시엄니니에게 전화를 했고, 시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돈을 보내주셨다. 시어머니는 다른 데는 악착같이 아끼시면서 아들에게는 한없이 약하셨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고, 덕분에 남편은 대학 시절 부잣집 막내아들처럼 살았다.

🔖174. sns에서는 행복해 보였던 친구들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저마다의 시간이 있었다. 각자의 상처를 꺼내 놓으면서 서로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되었다. 나만 힘든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해지는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라는 것도. 나는 내게 닥친 빚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진영 #신혼엔딩 #파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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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케이크의 특별한 슬픔
에이미 벤더 지음, 황근하 옮김 / 멜라이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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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복잡한 일들과 여러가지 감정들로 많이 지쳐있던 상태였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마음이 어지럽던 와중에 접하게 된 이 책은 내게 시끌벅적한 위로로 다가왔다. 섬세한 감정 표현에 넋을 놓고 책을 읽게 되고 마음이 무겁고도 아파왔다가 마지막엔 묘한 희망적인 기운을 내게 주었다. 책을 다 읽고도 여운이 깊어서 내용을 곱씹느라 리뷰를 쓰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주인공 로즈는 아홉 살 생일을 앞둔 어느 삼 월, 따스하고 평온해 보이기만 하던 그때 자신의 신기한 능력을 깨닫게 된다. 엄마가 자신을 위해 만든 레몬 케이크를 맛본 순간, 엄마가 가지고 있는 감정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음식을 먹으면 요리하는 사람의 감정까지 강제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능력일 수도, 재앙일 수도 있는 이 날벼락 같은 상황에서 엄마의 레몬 케이크에서 느껴진 맛은 지금 엄마가 내면으로 소리치고 있을 "부재, 굶주림, 소용돌이, 텅 빔"의 맛이었다.

능력을 깨달은 후 로즈의 시선은 가족에게 닿는다. 로즈의 시선을 따라 로즈가 겪어내는 성장통과 그들 가족의 관계에 오래 머물게 된다. 서로의 민낯을 속속들이 알고 난 후에도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을 수 있을까? 충격과 고통의 나날들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후반부에 가족들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외면하고만 싶었던 마음을 거두고 한걸음 다가가려는 로즈의 마음이 뭉클하다. 피하고 도망쳐 왔던 자신의 감정에도 스스로 손을 내밀어 느끼고자 했을 때의 장면도 눈에 선하다. 자신의 요리를 꼼꼼히, 천천히, 꾹꾹 씹어 넘겼을 로즈에게 다가가 어깨를 끌어안아 주고 싶어진다.

알리고 싶지 않은 내 깊은 마음과 한편으로는 누구든 나를 제발 좀 알아줬으면 하는 양가적인 내 마음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내가 요리하는 음식은 과연 어떤 감정들이 담겨 있을까.

에이미 벤더라는 작가는 나에게 낯설기만 했는데 독창적이고 신비롭고 동화같은 상상력에 현실적인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잘 섞어서 나를 소설속으로 끌어당긴다. 혀를 내두르는 로즈의 심리 상태와 감정이 담긴 음식들에 대한 묘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충만해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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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우유로 말하자면, 지쳐 있었다. 이 모든 재료들이 마치 멀고도 시끌벅적하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 혹은 차가 주차되는 소리처럼, 전부 다 배경에서 떠돌면서 음식 만든 사람의 상태를 앞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모든 음식에 감정이 담겨 있다는 거구나.

🔖137. 노력을 해봐도 전혀 이해받지 못하는 것 같다면 그다음은 입을 꾹 다물어버리기 마련이다.

🔖161. 그래도 오빠가 거기 서 있어서, 머리칼은 눌린 채로 팔짱을 끼고 퉁명스럽고 어색하게 거기 있어서 나는 안ㄷ느감이 밀려왔다. 오빠가 아직 거기 있다는 것, 만질 수 있고, 방으로 들어올 수도 있고, 짜증도 내면서 내 방에 있다는 사실에. 그것은 아무도 집에 없는 것 같은 적막함에 대한 해독제였다.

#에이미벤더 #레몬케이크의특별한슬픔 #멜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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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도시 타코야키 - 김청귤 연작소설집
김청귤 지음 / 래빗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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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의 높이가 상승하여 결국 모든 도시가 바다에 잠겼다. 바다에 잠기고 난 후의 세상은 어떨까? 김청귤 작가의 상상에서 비롯한 이 책은 6편의 연작 소설로 이루어진 판타지 소설이다. 모든 단편들이 바닷속 세상에서 살아남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는 다르게 유전자 조작을 통해 바다 속에서도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인간들도 있고 여전히 바다 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어 돔을 짓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경과들을 지나게 되어 바다에 적응하며 살게 되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지만 판타지 소설 그 자제로 받아들이며 읽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바다에서의 삶. 작가가 상상하는 판타지에서도 역시나 이기적인 인간들은 존재한다. 지금과는 별 다를 게 없는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상황들도 끝없이 펼쳐지는데 안타깝고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글이 반짝이는 이유는 물에 잠겨버린 세상에서도 우리는 어쨋거나 살아야 하고 적응을 하며 버텨내야 하는데 결말 속에 낙관의 시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심완선 님의 해설에도 포함이 되었듯이 "미래가 지속된다는 상상은 물거품 같을지 몰라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마냥 좋을 거라는 헛된 희망과 기대가 아닌 주인공들이 위기 속에서도 나누는 따뜻한 마음과 연대 행위, 멸망 속으로 다가가는 중일지라도 춤추고 사랑을 전하는 존재들의 마음이 책을 읽는 동안 눈부시게 다가온다.

그렇게 바다 속에서 지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표현한 작가의 상상력에 서서히 스며들며 완전히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아마 미래에서의 상황도 언제나 즐겁고 행복할 수만은 없다. 그 속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한다.

기후 문제와 더불어 각박한 현대인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면서도 왠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의 시선이 맑고 동화같기 때문 아닐까? 김청귤 작가의 글은 처음 접하는데 앞으로는 찾아 읽게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읽는 동안은 어두운 순간도 있고 비극이 펼쳐질까 두려운 순간도 잠시 있었지만 다 읽고 난 후의 마음은 평온하고 따뜻하기만 하다. 이렇게 눈부신 책을 4월의 첫 책으로 시작하게 되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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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옛날 사람들은 물에 잠긴 식료품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좋았다. 그런데 왜 세상이 바다로 변하는 건 막지 못했을까?

🔖90. 그래, 특별해. 생긴 건 비슷하지만, 우리만 물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특별하다는 건 인간의 기준에서는 보통이 아니라는 거고, 다르다는 뜻이기도 해.

🔖124. 저런 쓸모없는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아서 모든 땅이 물에 잠긴 걸 텐데.

🔖186. 종종 불합리, 불공정, 불평등 같은 단어가 떠올라 괴로웠고, 시원한 바람이나 태양, 꽃, 사랑, 대화, 체온, 책, 음악과 같은 것들이 못내 그리워 미칠 것 같았다. 아무 것도 몰랐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무지하고 무감한 삶보다는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좋았다.

🔖199. 그의 시선을 받는 내가 특별한 존재가된 것 같아, 진꾸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열이 나는 것 같았다.

🔖252. 판타지의 비-현실은 초-현실이고, 리얼리즘보다 폭넓은 모습으로 펼쳐지는 현실이다. 우리는 판타지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김청귤 #해저도시타코야키 #래빗홀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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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피해자 - 이 여성을 위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김재련 지음 / 천년의상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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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권 변호사로 20년의 시간 동안 성폭력, 결혼이주여성, 가정폭력, 아동학대 사건 변론을 1000건 넘게 맡아 온 김재련 변호사의 첫 책이다.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 같았다.

뉴스에서나 봐왔던 많은 사건들을 바로 옆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지켜보면서 얼마나 여러가지의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도 가지 않지만 이 책으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뤄서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세상에는 인간 같지도 않은 쓰레기들이 정말 많은 법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가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한 번 더 해보게 됐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대로 피해자 그 자체로 무결하게 보긴 했을까? 작가는 피치 못할 사고에 비유한다. 한밤중에 강도가 들어와 칼을 들고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면, 소리를 지르고 저항을 하게 될 경우 겪게 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입도 떼지 못하고 순순히 귀중품을 도둑에게 주었다고 했을 때, 그것이 도둑이 좋아서 준 선물인가? 성폭력 사건에서 만큼은 우리 사회의 통념적인 시선으로 한겹 덧씌워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런 시선과 편견들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크나큰 가해로 다가오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또, 성폭력 피해자를 '영혼의 살인'으로 표현하는 것도 반대한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했다. 살인은 끝이다. 존재의 사라짐이라는 것인데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보통의 삶을 이어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고를 당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단지 일상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겠지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 사고 기억이 당신의 삶을 잡아먹지 않도록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는 위로에 마음이 울렸다.

특정 장면이나 특정한 문자로 상황을 속단하지 말고 앞뒤 맥락을 파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성인지 감수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확실하지 않은 채로 전달되고 부풀려지는 많은 사건들에 마음이 무겁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편견을 빼고 공감의 문을 열어놓을 때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 못 차리는 여러 가해자놈들. 남은 모든 날들이 끔찍하고 비참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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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증거를 가지고 오면 믿어 주겠다'고 짐짓 합리적인 척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보호법익도 제대로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증거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성폭력 사건이다. 증거가 없으면 내 가슴을 함부로 만진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야 할까? 허락하에 만졌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 피해자 의사에 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락 없이 만졌다면 범죄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인지가 관건이다. 추행이든 강간이든 마찬가지다..

29. 우리들 통념과 다르게 피해자가 반응했다고 해서 가해자의 범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밤중에 강도가 침입했다고 하자. 시퍼런 칼을 들고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 저항하지 않으면 강도 피해자가 아닌가? 건넌방에서 자는 고3 수험생 딸이 놀랄까 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장롱 안에 숨겨둔 귀금속을 강도 손에 쥐여주면 그것은 강도가 좋아서 준 선물인가?

35.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가해자 중심주의. 가해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피해자만을 흔들어대는 가해자 중심주의는 '가해자에게 집요하게 묻는 것'으로 끝장낼 수 있다.

47. 성인지 감수성은 결코 모호한 개념이 아니다. 주관적인 개념도 아니다.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특정 장면이나 특정 문자로 십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 사정을 고려해서 판단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다.

52. '피해자라면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피해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행동이라는 것은 없다.

59. 당연한 말이지만 피해자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인격체는 아니다. 피해자도 부족한 게 많은 보통 사람이고
변호사도 홈결 많은 인간일 뿐이다. 완벽한 인간의 피해만이 구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이라는 것은, 전과가 있는 사람이든,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업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든 문제가 된 특정 사건으로 인해 누군가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 판단 받는 것이지,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놓고 무결함을 판정 받는 것이 아니다.

70. 그 범행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가 가해자 혹은 당시 상황에 대해 갖는 두려움을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일반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

108. 2차 가해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 중 사건의 전체 맥락을 알고 떠드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냥 누군가가 한 말을 옮기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이다. 그런데 그런 말이 돌고 돌아 피해자 귀에 들어가게ㅈ된다. 듣고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 잔인한 말들이다. 2차 가해는 영혼에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한다. 우리들이 2차 가해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조금 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2. 나는 사과의 힘을 믿는다. 제대로 된 사과는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가해자들 중에는 선택적 사과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한 행위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면하기 위해 사과한다. '네가 고소하지 않는다면 사과할게.' 이런 식이다.

177.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다. 피해자가 신고하면 수사관이 피해자 진술을 들은 다음에 피의자를 불러서 '피해자가 이렇게 애기하는데, 맞냐 아니냐'를 확인하면서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얘기한 정보가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179. 수사관의 전문 역량과 질문 태도에 따라 성폭력 사건은 증거들이 있는데도 무혐의로 끝날 수도 있고, 객관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을 뚫고 중형 선고가 내려질 수도 있다. 결국 수사관의 역량이 성패를 가르는 것이다.

200. 그들이 그녀에게 한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일로 피해자가 어떤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시작하는 거라고.

#김재련 #완벽한피해자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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