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피해자 - 이 여성을 위한 변론을 시작합니다
김재련 지음 / 천년의상상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 인권 변호사로 20년의 시간 동안 성폭력, 결혼이주여성, 가정폭력, 아동학대 사건 변론을 1000건 넘게 맡아 온 김재련 변호사의 첫 책이다. 피해자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 같았다.

뉴스에서나 봐왔던 많은 사건들을 바로 옆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지켜보면서 얼마나 여러가지의 감정을 느꼈을지 상상도 가지 않지만 이 책으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대부분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이야기가 주를 이뤄서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세상에는 인간 같지도 않은 쓰레기들이 정말 많은 법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자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었던가에 대한 생각도 다시 한 번 더 해보게 됐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대로 피해자 그 자체로 무결하게 보긴 했을까? 작가는 피치 못할 사고에 비유한다. 한밤중에 강도가 들어와 칼을 들고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면, 소리를 지르고 저항을 하게 될 경우 겪게 될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입도 떼지 못하고 순순히 귀중품을 도둑에게 주었다고 했을 때, 그것이 도둑이 좋아서 준 선물인가? 성폭력 사건에서 만큼은 우리 사회의 통념적인 시선으로 한겹 덧씌워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런 시선과 편견들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크나큰 가해로 다가오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리고 또, 성폭력 피해자를 '영혼의 살인'으로 표현하는 것도 반대한다는 작가의 의견에 공감했다. 살인은 끝이다. 존재의 사라짐이라는 것인데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보통의 삶을 이어나가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피치 못할 사고를 당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단지 일상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하겠지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 사고 기억이 당신의 삶을 잡아먹지 않도록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는 위로에 마음이 울렸다.

특정 장면이나 특정한 문자로 상황을 속단하지 말고 앞뒤 맥락을 파악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성인지 감수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확실하지 않은 채로 전달되고 부풀려지는 많은 사건들에 마음이 무겁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편견을 빼고 공감의 문을 열어놓을 때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정신 못 차리는 여러 가해자놈들. 남은 모든 날들이 끔찍하고 비참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


17. '증거를 가지고 오면 믿어 주겠다'고 짐짓 합리적인 척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다. 보호법익도 제대로 모르기에 하는 소리다.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증거라는 것이 애당초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성폭력 사건이다. 증거가 없으면 내 가슴을 함부로 만진 사람을 처벌하지 말아야 할까? 허락하에 만졌다면 죄가 되지 않는다. 피해자 의사에 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락 없이 만졌다면 범죄다.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성적 접촉인지가 관건이다. 추행이든 강간이든 마찬가지다..

29. 우리들 통념과 다르게 피해자가 반응했다고 해서 가해자의 범죄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한밤중에 강도가 침입했다고 하자. 시퍼런 칼을 들고 귀중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러 저항하지 않으면 강도 피해자가 아닌가? 건넌방에서 자는 고3 수험생 딸이 놀랄까 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장롱 안에 숨겨둔 귀금속을 강도 손에 쥐여주면 그것은 강도가 좋아서 준 선물인가?

35.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가해자 중심주의. 가해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피해자만을 흔들어대는 가해자 중심주의는 '가해자에게 집요하게 묻는 것'으로 끝장낼 수 있다.

47. 성인지 감수성은 결코 모호한 개념이 아니다. 주관적인 개념도 아니다.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특정 장면이나 특정 문자로 십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 사정을 고려해서 판단하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원칙이다.

52. '피해자라면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피해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피해자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행동이라는 것은 없다.

59. 당연한 말이지만 피해자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인격체는 아니다. 피해자도 부족한 게 많은 보통 사람이고
변호사도 홈결 많은 인간일 뿐이다. 완벽한 인간의 피해만이 구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폭력이라는 것은, 전과가 있는 사람이든, 성매매업소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업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든 문제가 된 특정 사건으로 인해 누군가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었는지 판단 받는 것이지, 그 사람의 전 생애를 놓고 무결함을 판정 받는 것이 아니다.

70. 그 범행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가 가해자 혹은 당시 상황에 대해 갖는 두려움을 합리적 이성을 가진 일반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안 된다.

108. 2차 가해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 중 사건의 전체 맥락을 알고 떠드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냥 누군가가 한 말을 옮기고 거기에 살을 붙이는
식이다. 그런데 그런 말이 돌고 돌아 피해자 귀에 들어가게ㅈ된다. 듣고 넘겨 버리기에는 너무 잔인한 말들이다. 2차 가해는 영혼에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생명을 앗아 가기도 한다. 우리들이 2차 가해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조금 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2. 나는 사과의 힘을 믿는다. 제대로 된 사과는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가해자들 중에는 선택적 사과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잘못한 행위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면하기 위해 사과한다. '네가 고소하지 않는다면 사과할게.' 이런 식이다.

177.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다. 피해자가 신고하면 수사관이 피해자 진술을 들은 다음에 피의자를 불러서 '피해자가 이렇게 애기하는데, 맞냐 아니냐'를 확인하면서 가해자에게 피해자가 얘기한 정보가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179. 수사관의 전문 역량과 질문 태도에 따라 성폭력 사건은 증거들이 있는데도 무혐의로 끝날 수도 있고, 객관적 증거가 부족한 상황을 뚫고 중형 선고가 내려질 수도 있다. 결국 수사관의 역량이 성패를 가르는 것이다.

200. 그들이 그녀에게 한 행위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일로 피해자가 어떤 힘든 삶을 살아왔는지, 아무렇지 않게 잘 살고 있는 가해자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시작하는 거라고.

#김재련 #완벽한피해자 #천년의상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