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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호랑이
네주 시노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3월
평점 :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의붓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해온 피해자이며 생존자 네주 시노의 자전적 소설이면서 회고록이다. 읽는 순간 네주 시노가 되어 끔찍하고 잔인하면서도 도망갈 데 없는 그 폭력 앞에 함께 마주하게 된다. 불편하고 괴롭지만 책장을 넘기는 손을 멈출 수 없고 흐르는 눈물 역시 막을 수가 없었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만큼 매력적인 책이고 여운이 오래 남아 마음 한 켠에 묵직한 울림을 주는 책이다.
당장 찢어 죽여도 모자랄 가해자에 대한 초상부터 담담하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아님 상처를 극복해서일까? 단 한 번도 평정을 잃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녀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고통을 이겨 내고 당당히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같다가도 역시 나의 기대이고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 극복이라거나 희망찬 결말은 없다. 그런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영원히 순환되는 시간, 시시때때로 고개 드는 끝없는 고통, 지옥같은 악몽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끝끝내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 증언은 경험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보다 못한 것이 되지 않게 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거나 침묵으로 돌아가는 일을 막아 주기도 한다. 그래서 경험은 다른 이야기 속에서 다른 목소리로 다시 전해질 것이고, 이리저리로 돌고 돌 것이다. 그리고 호랑이, 우리에 갇혀 있던 다른 호랑이가 마침내 나오게 만들 것이다. 문학은 이 모든 걸 마침내 밖으로 내보내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을까? (p.329)
집요하고 첨예한 고찰 끝에 도달한 그녀의 의지가 보이는 문장이었다. 고통받고 상처받은 작은 아이의 영혼이 마침내 밖으로 나오는 것. 트라우마로 가득 쌓인 인생에서의 정답은 없다. 정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나은 모습을 향해 나아가려는 그녀의 멈추지 않는 시도와 무의식적이면서도 악착같은 선을 향한 집념이 말로 다 못할 감동으로 다가온다. 지켜야할 소중한 존재, 자신의 딸의 눈을 바라보며 이제 누군가를 온전히 보호하겠다는 영역으로 발을 내딛는 그녀의 앞날에 온전한 행복이 가득하기만을 가슴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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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범죄자들 대다수는 자기네가 겪은 일을 용서받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이야기들을 지어냅니다.
🔖36. 책 제목은 <롤리타>지만, 롤리타라는 인물 자체는 사실상 언제나 부재한다. 독자는 그녀를 노리는 포식자의 시선을 필터로 삼아서 그녀를 본다. 그래서 롤리타는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는 적이 거의 없다.
🔖91. 언론은 우리를 드러내고 세상에 알리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지워버리기도 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인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과 해석에 의해 변형되고 왜곡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115. 생존자의 신화를 믿는 건 실수이고, 불안의 원천이다. 그런 신화를 믿으면 시간이 선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면서, 피해자가 고소인으로, 살아남은 사람으로, 만족하는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사실 우리는 시간이 순환적이라는 것, 시간은 오고 가고 다시 돌아오기를 영원히 되풀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말은 없다. 결말이란 그저 시나리오의 문제일 뿐이다.
🔖135.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남에게 강요당한 일을 매개로 존재한다는 것, 그건 지독한 악몽이었다.
🔖136. 마치 황소의 두 뿔을 잡고 겨루듯 정면으로 부딪쳐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계속 말하고 논증을 전개하여 그 황소가 진절머리를 내게 만들 것이다. 황소가 무너져 내릴 때까지, 황소가 나한테 그만하라고 애원할 때까지, 황소가 마침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둘 때까지.
🔖257. 중요한 건 사람들이 우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를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 자신이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327. 피해자에게 그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피해자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적 학대 사건을 오직 당사자들하고만 관련된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피해자를 다시 피해자로 만드는 일일 수 있다.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것,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혼자 안은 채로 절대적인 고독 상태에 빠지게 하는 것, 그건 역시 공포 정치 체제세서 고문자들이 저지르는 행위이다.
#네주시노 #슬픈호랑이 #열린책들 @openbooks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