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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의 야수들 - 2024 톨스토이 문학상 수상작
김주혜 지음, 박소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정말 너무 좋았다.
책을 처음 받아보고 두께에 아주 살짝 놀라긴 했지만
책의 두께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몰입이 잘 되었고
대하소설 특성상 분명히 지루하고 느려지는 전개에
속도가 떨어질 만도 한데 끝까지 지루함 따위 없이 읽어나갈 수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 작가가 쓴 책으로
영어로 책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이렇게 한국적인 소설이
전세계에 뻗어 나가는 글이 될 수 있다니 왠지 가슴이 벅차다.
백범 김구 선생님들 도와 독립 운동을 펼치셨다는
작가의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라,
이 글을 쓴 밑바탕이 된 것 같았다.
소설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의 모습까지 보여주지만
역사적 사건이나 실제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인간의 모습과 내면을
더 생생하게 전달한다.
격동의 시대에서 주인공들의 삶의 이야기는
슬픔도 분노도 있고 기쁨과 즐거움도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다.
눈 덮인 산에서 길을 잃은 일본 순사의 목숨을 구해준
사냥꾼의 일화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일로 일어나게 되는 미묘한 일들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결국 우리 모두는 이어져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선택이 불러오는 사건들이 돌고 돌아
현재를 이루고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
사냥꾼에게 고마웠던 일본 순사가 증표로 남겨준 물건이
한때는 사냥꾼의 아들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시간이 더 지나서는 그 물건으로 인해
또다른 오해가 발생하여 최악의 상황까지 몰고가는
아이러니한 삶의 모습에 황당하고 허탈하여 웃음이 났다.
마찬가지로 친일에 앞장서며 한평생 평탄한 삶을 누리던 김성수가
친구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태극기를 찍어냈던 일로 인해
목숨을 구하는 모습을 보고 또 한번 당혹스러웠다.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알고 하는 선택은 많지 않을 것이고
알고서 선택한다고 해도 당장 눈앞의 결과만으로는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 그때의 시대 상황에서는 지금보다 더 허무하고
이해 못할 일들이 많았음이 이 소설속에서도 자명하게 드러난다.
그속에서도 빠질 수 없는 사랑과 우정, 가족의 정의를
다시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된다.
등장인물 모두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때 그가 이랬더라면, 하고
자꾸 다른 선택지의 상상을 멈출 수가 없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는 소설이다.
우리 모두의 삶은 모두 살아볼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고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다산 출판사 책은 진짜 믿고 본다. 무조건 강추!
●78. 가장 놀라운 사건들은 아무도 눈치 챌 수 없이 작은 바늘 하나가 떨어지듯 시작하여 꼬리를 물고 연쇄한다.
●144. 과거의 가장 좋은 점은 그것을 이미 지나쳐 왔다는 것이다.
●152. 정호가 그 여자아이를 반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바구니에서 코스모스 한 송이를 집어 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정호의 얼굴을 향해 그 꽃을 던졌다. 얼굴 위에 부드러운 꽃잎이 떨어지는 순간, 정호는 저 아이가 자신에게 일부러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에 공포와,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환희에 빠져들었다. 그의 놀란 마음을 눈치챈 미꾸라지와 영구가 웃음을 터뜨리며 사정없이 놀려대는데도 정호는 그게 전혀 짜증스럽거나 거슬리지 않았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
자신도 아직 알지 못했으나, 어떤 경이로운 것에 대한 의식이 그의 가슴속 깊이 들어왔다.
●153. 삶이 꾸준한 전진의 과정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는 젊음 특유의 요건이다.
●162. "내가 어른이 되면 이것보다 백배는 더 좋은 걸 너한테 갖다줄 거야." 정호가 옥희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바로 그런 모습 때문이었는데, 그가 평생 벌 수 있을 만한 것보다 더 값진 것을 주겠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당당한 자신감이 옥희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옥희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정호는 절대로 비굴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황을 탓하거나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텅 빈 그릇 같았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씨처럼 떨어져 내린 곳에서 멀리 탈출하기는 힘들 테지만, 갇힌 존재가 되기를 스스로 거부했다는 그 단순한 이유만으로 정호는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172. 성수의 도덕적 해이함은 단이에게 일종의 여지를 주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명보의 청렴하고 정직한 태도는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게 했으며, 그래서 그를 더위 존경할 만한 인물로 보이게 했다.
●192. "글쎄, 최소한 그러면 우리 모두가 파괴되는 일은 없겠지. 이름뿐인 독립과 실질적인 번영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하겠나? '독립'을 이룬디는 명목 아래 전 국민의 절반이 목숨을 잃고 만디면, 싸움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너지는 꼴 아니겠어? 자네는 죽음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초연하게 행동하지만, 우리가 이런 악전고투를 감행하는 것도 결국 살자고 하는 일이잖아. 안 그래?"
"맞아, 나는 죽는 것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자네처럼 우리의 저항이 모두 헛되다고 보진 않아. 자네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도움은 진정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으로 받고 있네. 하지만 나는,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다른 사람들은....으니가 하는 운동의 목적은 그저 멸종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정의로운 일을 하는 거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것은 진정으로 논리의 영역 밖에 있어. 내 행동 방식을 이해해 주리라 기대하지는 않겠네. 나는 그저 내 영혼이 시키는 걸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지."
●211. 옥희가 팔을 뻗어 정호의 손을 잡았다. 옥희의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정호는 팔 전체에 별똥별이 튀는 느낌이었다. 정호는 옥희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네가 있다고. 마치 집이라도 되는 양, 넌 아예 그곳에 눌러앉아 살 수도 있을 거라고.
●512. 아무도 믿지 말고, 불필요하게 고통받지도 마. 사람들이 하는 말 드니에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
●513. 호랑이만큼은 정말이지 놓치고 싶지 않아. 일본에는 그처럼 사나운 맹수가 없거든. 영토로 따지면 우리가 훨씬 더 큰 나라인데도 말이야. 이 작은 땅에서 어떻게 그리도 거대한 야수들이 번성할 수 있었는지 신비로울 따름이야.
●603.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김주혜 #작은땅의야수들 #다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