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너머, 여름
한윤서 지음 / 메이킹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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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여자들의 다섯 가지 여름을 담았다. 찌는 듯한 여름 너머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소설 속 다섯 여자들은 서로 '관계' 속에서 '각자'인 듯 '우리'인 듯 묶여 있다. 가슴 속에 상처와 아픔을 품고 살아가는 주인공들. 불행과 고통 없는 삶이 과연 존재할까? 밝아 보이는 겉모습 안에는 어떤 상처들을 안고 사는지 타인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구질구질하지 않은 이유는 각자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 아닐까. 어느 누구도 남탓을 하지 않고 불행을 불행 그대로 받아들었지만 지쳐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그대로 내버려두기도 하고 뭔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음에도 불행 앞에 나 스스로 당당할 것.

나 혼자서라면 쉽지 않았을 불행의 무게도 나를 온전하게 믿어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각자의 무게로 힘든 한 사람이 서로의 신뢰와 관계의 에너지로 모두가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도 한다. 나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타인에게는 또다른 큰힘이 되어줄 수 있을까. 지영은 수아에게, 유비는 할머니에게, 할머니는 손녀에게, 아니면 기억 속 덕선이에게, 힘을 받고 살아갈 용기를 얻어온 게 아닐까.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찌는 듯한 더위도 함께 하면 곧 지나갈 것이고 또다시 찬란한 빛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겨내는 힘,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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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할머니는 드러나는 면만 본다면 조용한 분이셨다. 말을 할 수 없으셨으니 당연했다.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는 마냥 조용한 분은 아니셨다. 할머니는 언뜻 달괁닉으로도 보이는 겉과 달리 깊은 활기를 지니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의 그 조용한 대범함이 좋았다.

🔖83. 나랑 보민이는 친구인 걸까? 갑자기 들어온 의문은 황당했다. 간단한 의문임에도 오래간 고민했다. 그 끝에 나온 답은 아니다였다. 그때가 되어서야 다른 행동들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보민이 챙겨준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괴로웠다는 것. 그리고 보민은 늘 처음 만난 그날처럼 환히 웃었지만 단 한순간도 그 웃음을 보며 자신은 편한 순간이 없었다는 것. 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어도 알 것 같았다. 이런 건 친구가 아니다. 이 세상 내가 제일 소중하고 불쌍하다고 되뇌며 살아온 자신의 삶에 모순되는 일들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나는 보민의 그림자였구나. 빛이 더 밝게 빛나도록 빛 옆에 존재해야 하는 그림자. 그 그림자가 나였다. 내 인생은 불행 요소를 다 때려넣은 잡탕이라 하더라도 그 인생에서 내가 제일 소중하고 빛나게 하겠다 다짐하였는데 자신은 자신과의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였다.

🔖133. 더 이상 불행이 나를 피해가길 바라지 않는다. 불행을 마주쳐도 그 불행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기만을 바란다.

#한윤서 #여름너머여름 #메이킹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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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내가 꽤 마음에 듭니다 - 하루는 망했어도 여전히 멋진 당신에게
이지은 지음 / 스튜디오오드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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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망했어도 여전히 멋진 당신에게!!!
뭐가 멋질까, 하루하루 망했는데 멋질 수가 있을까. 최근에 이런 장르의 책이 정말 많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다독여주고 힐링을 주고 누가 뭐라 해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이며, 그러니 당신 좌절하지 말라는. 그렇다. 이 책 역시 그런 책이다.

요즘 우리는 누구 하나 나서서 얘기하지 않아도 많이 지쳐있고 계속 지쳐간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뭔지 알면서도 그 중요한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고 그저 행복하게만 살기란 주위의 시선을 감내해야 할 테고,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할 테니까. 그렇게 지친 나에게 우리에게 또 비슷비슷한 에세이냐 할지 몰라도 나는 이렇게 읽음으로 인해서 큰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이번에 또 깨달았다.

잡동사니 님의 예쁜 일러스트와 이지은 작가님의 글이 그랬다. 정말 힘이 되고 순간순간 코끝이 찡해져서 눈물 한 방울 흘릴 뻔했지 모야.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고 어떻게 포현해야 할지 몰랐던 그 마음들을 정확하고도 따뜻한 눈빛으로 포착해서 다정한 글로 다독여준다. 그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고나 할까. 나 스스로에게, 관겨에, 일상에, 사랑에 지쳤던 순간들. 누구에게나 오는 그 시련들이 차갑지만은 않다. 이런 책이 있다면.

더이상 젊지 않은 나에게, 그래서 더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고 해내야 할 일들만 남은 것 같은 나에게 먼저 손을 건네 본다. "청춘의 소실을 겁내지 말 것. 우리는 사라지고 있음이 아니라 선명해지는 것.(p55)"

하루가 망했어도 나는 내가 꽤 마음에 든다.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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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우리가 태어날 때 목적이란 것이 있었나요. 목적이 없으니 방황하는 걸음이란 당연한 것. 어쩌면 삶이란 어디론가 도달해야만 하는 숙제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내는 것, 그뿐인지도 모릅니다. 굳이 닿아야만 하는 곳이 없는데 틀린 길이 있을 리가 있나요. 낯선 길에 닿는다면 반가운 여행처럼 걸어내면 되는 거지요. 문득 불안할 땐 옆 사람 손을 꼭 잡고. 그 감정마저 존중하면서.

40. 설렘, 들뜸, 기대, 기쁨, 행복...명도 높은 감각들이 무뎌지고 있었다. 어쩌면 전보다 쉽게 우울에 지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라져가는 날들 속 유희의 순간들을 곱씹어 기억하는 것, 생활에 쉬이 마모되지 않는 것, 무용한 질문들을 잃지 않는 것, 이런 애씀이 필요한 시점이다.

55. 청춘의 소실을 겁내지 말 것. 우리는 사라지고 있음이 아니라 선명해지는 것.

63. "백 년도 못 살 거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고민하더라, 넌." 참 쉽게도 잊었다. 때로는 버거울 정도로 길다 여겨지지만, 숫자로 적어 넣고 고면 아쉬울 정도로 짧은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 해보자. 해내기 위해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한번 해보고 싶다는 나'를 위해서.

85. 완벽하지 못한 모두, 다른 이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가 있을까. 다만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야 말았다면 빠르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 참 어렵지만 자꾸 노력해야 할 일이다. '진심으로'란 마음만을 다하는 일이 아니라, 정성까지 다해야 하는 일임을 잊지 말고.

108. 삶은 너무 바쁘고, 풀어야 할 과제들은 어린 시절 문제집보다도 많고, 지켜야 할 것이, 책임져야 하는 것들이 생겨났고, 물리적으로도 멀어져만 가고, 체력은 한계가 있고. 이렇게나 우스운 핑계가 많다, 이별에는. 이 핑계는 나의 것만이 아니어서 홀로 애쓴다고 달라지는 건 많지 않았다. 지금의 인연들은 어디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온 마음을 다해야지 싶다. 언제 어떻게 멀어지더라도 추억하고 싶은 기억
몇쯤은 가슴에 진하게 남도록 . 내일 친구들을 만나는 약속이 있다. 그들의 손을 꼭 한 번 잡아봐야겠다. 다시 볼 수 없게 되어버린 미래에서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인 양, 애틋하게.

147. 누구에게나 공평히 머물렀을, 하지만 부지런히 감각한 이에게만 선물처럼 멈춰 섰을 순간들. 오늘 당신의 낭만은 무엇이었을까.

182.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거구나, 무조건적인 편이 되어준다는 것은. 엄마에게는 그가 뭐라 했든 더 알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엄마의 남자를 지치게 한 것, 그것만으로 그는 아주 못된 사람인 거니까. 나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무조건적인 편이 되어준 적이 있을까, 내 곁에는 있을까, 진정 내 편이 되어줄 이가. 아, 적어도 한 사람은 있겠다. 조건 없이 안으로 굽는 팔, 우리 엄마.

198. 낯설게 둘러본 세상엔 여전히 이름을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풀은 고사하고 나무 한 그루, 꽃 한송이조차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사랑 없이 살아간다면 세상엔 모를 것들이 참 많겠다. 사랑을 주는 만큼 나는 그 대상의 세상을 얻을 수 있다. 사랑에 져도, 공정히 주고받지 못했더라도 억울할 것이 없다. 사랑한 만큼, 딱 그만큼 넓어진 세상은 나의 것으로 넉넉히 남는 것이었으니.

242. 어쩌면 요즘은 자주 빈손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가까이 두려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고 나를 찾지 않으면 또 그런 채로 기대하지 않는다. 새로운 인연에 애써 다가가지 않으며, 언젠가부터 다정한 듯 선이 분명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원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경계하다 보니 두게 된 거리이기도 했고, 멀어진 인연들을 그리워하는 밤들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알게 된 탓도 있겠다.



#에세이 #감성에세이 #에세이추천 #책추천 #스튜디오오드리
#이지은 #잡동사니 #그러나나는내가꽤마음에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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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의 비용 - 다가올 의료 대혁신에 대비하는 통찰
김재홍 지음 / 파지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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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의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당당한 소비자다." 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이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지내온 시간을 다시 깨우치게 한다. 저자는 서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워싱턴 대학에서 분자세포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의사이자 과학자이다. 현재 가천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실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며 국내 의료 시스템의 현황과 의료 혁신 가능성에 대해서 탐구한 내용을 이 책에 풀었다.

1부 '급변하는 의료환경과 환자의 권리'에서는 질환과 의료 혜택 및 바람직한 보건의료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미래의학, 환자의 권리에 대해 여러 의견을 서술한다. 인간의 수명 연장에 대한 활발한 연구들로 다양한 만성질환이 발생했다. 급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여러 다양한 원인들로 급감하고, 대신 평생 함께 하는,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면서 병원과 환자의 관계도 생각해보게 한다. 60세 이상의 노인의 대부분은 평균 4가지의 만성 질환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병원에 진료 한번 가려면 몇 시간 대기에 중복되는 검사들에 의사와 직접 면담하는 시간은 5분 정도 되려나. 이것은 절대로 환자를 위한 의료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분명 나부터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표현도 못한 채 대형병원에서 진료 한번 받으려면 원래 이런거려니 하고 넘겼던 일이 다반사다.

그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에 만연한 많은 문제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원인 및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술한다. 지역 별 의료 불균형으로 인한 감당은 환자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이 된다. 남쪽 끝 거제도에 사는 내 입장에서만 봐도 어디 불편하기라도 하면 진심으로 갈 만한 병원이 없는 게 현실이다. 조금이라도 큰 검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다리 건너 창원이든 부산을 나가야 하는 게 그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내 돈 내고 진료 받으러 가면서도 불편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나서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도 몰랐던 이유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환자의 권리를 되찾고, 그 이야기가 의료진과 병원 앞에서 내가 갑이 되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진단을 받아 어떤 검사와 치료를 행하게 됨에 앞어 많이 배우고 알며 의료진과 파트너가 되어 당당한 요구를 할 수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끄덕. 의료진에게만 맡겨 놓지 말고 주체적으로 내 건강과 나의 질병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나오는 의료폐기물 및 건물 자체만의 에너지 과용 등도 언급하며 친환경적인 병원으로의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원격진료 및 스마트 의료기기들의 대중적인 보급, 인공지능의 개입도 더이상 새롭고 낯선 이야기만이 아닌 눈앞의 현실이 된 것에 앞으로의 의료 발전에 대한 희망도 엿보였다.

2부 '의사 역할의 변화와 의료 개혁의 방향'에서는 당당한 소비자인 환자를 위하는 의료 개혁이 되도록 의료진과 환자 모두 깨어있는 인식의 변화를 필요성으로 언급한다. 물론 어느 의료진만의 잘못이 아니고 병원 자체만의 문제도 아닌 정부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판단하지만 개개인들의 역할과 권리를 잘 생각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의료 변혁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밝은 전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줄 그은 부분이 정말 많았다. 긴 문장들에 집중이 안 될 때도 있었지만 10일간 부여잡고 읽었던 이 책으로 인해 나도 의료진으로서의 역할 변화의 필요성과(휴직 중) 환자로서의 권리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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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불편함이나 소비자 권리의 침해를 마다하고 현 의료 서비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의료 서비스가 이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의료진에게 모든 조치를 위임했기 때문이다. 훈련되지 않은 우리는 최신 고급 승용차, 아니 항공기나 우주선과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복잡 다양하고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은 인체의 생리, 병리 현상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환자들은 의료 서비스의 세부적 내용을 이해하고 관리할 수 없고, 의사들은 그동안 다분히 일방적인 권위주의로 환자를 대해온 것이 사실이다.

65. 어떻게든 병의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한 '증상의 호전'에 머무는지금의 의학 수준에서 질환은 만성질환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만성질환이라는 말은 완치가 되지 않고 오랫동안 환자가 앓게 되는 병이라는 뜻이다. 과거에 생명을 위협하던 여러 중증 급성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확연하게 줄었다. 하지만 이 말은 완치되거나 가벼운 경증 질환이 된 것이 아니라 의료기술의 발달로 환자가 여생동안 계속 관리해야만 하는 만성질환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는 질환들도 완치가 되지 않으면 인간의 평균수명이 늘면서 관리에 드는 비용과 수고가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80. 무려 2조 원을 쓰는 국가건강검진에서 다소 당뇨병, 혈압, 이상지질혈증 등 만성질환에 관한 혈액검사 수치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 해도, 검진지만 건네주는 것으로는 아무 예방 효과가 없다. 적극적인 사후 관리가 수반되어야 지출에 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건강검진에서는 검진과 후속 관리가 분절화되어 있다.

128. 더 이상 첨단의료기술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좋은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환자에게 중요한 의료기술의 가치는 비용 대비 회복된 건강의 정도로 정의될 수 있다. 병원 간에 무차별적으로 도입된 로봇 수술 시스템이 다시 수술 건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환자를 위한 가치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것과 치료 방법에 대한 환자의 선택권이 제한되어 왔을 가능성을 모두 시사한다.

131. 환자에게 실익이 있느냐 없느냐는 환자가 결정할 문제이지, 의사가 판단할 문제가 아닌데도 우리는 과거에 지나친 병원 편의 위주로 간 것이다. 이러니 환자들은 정말 이 검사가 내게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 계속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환자가 의사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진보와 의료전달체계의 개혁을 바탕으로 의사가 환자에게 더 가깝게 접근하고 환자의 이익 편에서 행동해야 한다.

212.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서 인간의 평균 수명이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은 지난 두 세기간의 변화에 불과하다. 40-50세 이내의 수명에 최적화된 인간의 몸이 갑자기 늘어난 수명에 진화적으로 적응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특정 인구집단의 평균 사망 연령을 의미하는 기대수명이 지금처럼 대폭 늘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현격히 좋아진 위생 개선으로 모자 사망률이 먼저 줄고, 백신 접종과 식량 증산으로 영아기와 소아청소년기 사망률이 급감했고, 의학기술의 발달로 심각한 급성질환과 감염증에 의한 사망률이 줄었기 때문이지,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수명 자체가 덤으로 늘어난 것이 절대 아니다.

224. 빈부격차가 심할 때는 고가의 의료 서비스 혜택이, 그것도 만약에 갑자기 개발된 상황이라면 절대 고루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교육이 개인에게 더 많은 기회의 가능성을 주는데, 가족의 부는 교육의 기회를 분명히 좌우한다.

264. 지금의 의료 정보들은 환자가 의료 서비스 비용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의료기관에 귀속되면서 마치 지적재산권처럼 사용이 제한되고 있다. 환자를 치료한 과정과 노하우가 남에게 공유되지 못하는 비전처럼 취급받으면서 의료기관 간의 보이지 않는 정보장벽이 생기고,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환자는 특정 병원에 더더욱 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환자의 의료기관 선택권을 더욱 상실하게 하는 이런 귀속은 보다 비싸고 정밀한 검사와 치료를 수행하는 대형 종합병원일수록 더 심하다.

266. 온라인 알고리즘이 분석하도록 내가 접근권을 개방한 의료 정보는 외래나 보건소에 마련된 형식적인 안내책자나 교육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자기 관리를 24시간 가능케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의 환자와 의사 간의 불평등한 관계인 '정보의 비대칭성'은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되면 환자의 선택권이 지금보다는 크게 확장되면서 환자는 수동적인 역할에서 어엿하고 대등한 파트너의 지위를 얻게 된다.

313. 정작 문제는 지역발전의 불균형에 의한 여러 인프라 부족으로 서울/수도권과 지방 간의 의사 배치에 실패하고 있는 근원 이유들을 따져야 하는데, 참 편리하게도 의사 수를 늘리기만 하면 지금 의사들이 전공을 기피하는 진료과와 지방 근무만이 아니라 중환자실, 감염관리 및 대학의 연구 분야에서 근무하는 의사들까지 많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425. 대형 종합병원이 붐비는 이유는 의사의 자질이나 의료장비의 질 같은 의료 신뢰성이 문제인가, 환자의 중환도가 문제일까? 분명 유능한 의사에 의한 제대로 된 진단 기릉성은 환자의 안녕과 비용절감 측면 모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대형 종합병원에서 외래 수익이 그렇게 높은 이유는 진단검사의학과, 병리과 및 영상의학과와 같은 검사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하고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른 병원에서 전원 시 이미 했던 검사를 다시 중복 시행하는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으로 환자를 많이 보는 것은 절대 환자에게 이로운 일이 될 수 없다.

430. 의료비용이 상승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업들은 자동화와 글로벌화를 통해 단가를 낮추면서 최대한의 이익을 확보하기 때문에, 높아진 의료비용은 자국인의 고용률과 실질적인 임금 수준 모두를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미국만 해도 백인 프리미엄을 누리던 시기가 끝난 후 백인 저소득층은 사회적 지위 측면에서는 다른 인종에 비해 더욱 좌절하게 되었다. 이들은 운동부족과 저렴한 정크푸드와 같은 건강하지 못한 생활습관과 구할 수 있는 주류나 마약 등에 의존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턱없이 높아진 의료비용 때문에 이들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악화된 건강은 사회적 불안요소가 되면서 이들에 대한 복지 부담이 증가하고 자국 노동력을 쓸 수 없게 되면서 경기에 부담이 된다. 이렇듯 복지와 경제 성장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453.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는 큰 관심 없이 방치하거나 의료진에게 전적으로 일임해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나날이 의료비용이 높아지고 새로운 질환과 만성질환의 위험이 커지는 지금에는 자기 몸의 상태를 이해하면서,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를 능동적으로 결정하며, 질환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의사들은 전문가 집단으로서 국민들에 신뢰를 받을 수 있는 모든 의무를 자신들이 하고 있다는 것이 잘 알려져야 한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한쪽이 더 이상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다.권위와 권력이 혼동되어온 한국에서 앞으로는 의료부권주의에서 유래한 자세들이 보이지 않기를 희망한다.

#김재홍 #건강의비용 #파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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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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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부터 좋았다. 에필로그까지 다 좋았다. 사실 제목도!
'기내식 먹는 기분'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왠지 모를 설렘이 피어올랐다. 여행을 앞두고 계획을 세울 때 혹은 이미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의 설렘과 미묘하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을 알고 있는 터라 그런 몽글한 여행의 기분을 느끼게 해줄 책이라 믿었다. 작가의 여행 흔적은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설렘은 없었다. 하지만 공감이 있었다. 정말로 너무 좋았다.

정은 작가는 사실 이번 기회에 처음 알게 됐고 《산책을 듣는 시간》과 《커피와 담배》를 출간하신 작가분. 글을 읽으며 내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생활이 버티기 힘들어지면 습관적으로 비행기 티켓창을 열어보며 일 년에 한 달 이상은 외국에서 지내는 그런 생활이 책 읽기 초반에는 그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작가는 단지 도망치고 숨을 곳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의 상황과 솔직한 심정을 이번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엄청나게 하신 듯한 구절이 곳곳에 있다. 고독에 빠져 있고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도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글은 작가의 경험이 토대가 되는 것 아닐까. 작가는 도망치고 숨은 게 아니라 한 줌의 용기를 계속 내고 있었던 것 같다. 시작을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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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샀다. 여행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길 바라며. 그러고 나서 한국에 돌아오면 여전히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매번 실망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티켓을 산다. 그렇지만 15년간 여행을 반복하다 보니 알 것 같다. 여행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여행은 스스로와 거리감을 만드는 일이다. 여행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정확한 내가 되도록 한다.

34. 당시의 나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나를 던져 넣곤 했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과 정신이 성숙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변화를 겪고 나면 성숙해지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고통은 성숙의 필수 요건이 아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이고, 몸이 힘든 건 힘든 것이고, 사람은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때만 성숙한다. 그걸 겪기 전에 깨닫는 사람이 있고 몸이 힘들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다. 후자인 사람은 몸이 고생한다. 내 몸한테 미안했다.

35.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말해준다.

39. 좋은 하루를 쌓아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주변을 잘 가꾸는 것,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 그 하루하루에 진짜 삶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누구라도 나를 떠올릴 때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그것이 어려운 목표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141. '마법'이란 결국 '의지'와 동의어라는 세상의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된 채로.

187. 언젠가 공감이란 걸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 멸종되고 나면, 저 쓸모없는 것들을 오랫동안 연마해온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해졌다.

190. 그 표정을 보고 나니, 그들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연민을 가졌던 게 부끄러웠다. 그 행복의 표정을 내가 고통으로 받아들일 자격이 있을까? 더 나은 삶이, 더 큰 자유가 있다고, 당신은 다른 삶을 선택할 자격이 있었다고 내가 말하는 게 정당할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내 삶은 충분히 자유로웠나? 그들이 이 삶을 자유롭게 선택했고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내가 거기에 고통스러워하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241. 내가 믿을 만한 누군가가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해준 순간. 그런 단 한 사람. 최초의 독자. 그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언제 작가가 되는가. 내 글을 책으로 인정한 최초의 독자가 생겨난 순간 작가가 된다.

#정은 #기내식먹는기분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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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환대
장희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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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9개가 묶여 있는 작품. 소설 전체에 흐르고 있는 주제는 '부재'와 '결핍'이다. '우리'였었던 그때가 지나고 죽음, 이별, 여러 사건들로 헤어지거나 상실을 겪은 사람들. 그 공통의 사건들을 겪은 남겨진 '우리'는 여전한 '우리'일까.

같은 상황속에 놓인 너와 나일지라도 너와 내가 느끼는 상실감과 고통은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있다가 없어짐의 순간들을 겪고도 우리는 어떻게 '우리'로 계속 남을 수 있을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 소설 전반적인 분위기는 춥고 황량하다. 춥고 황량하지만 그래도 연대에 대한 작은 희망이 곳곳에 읽힌다고 해야하나.

🔖108. 한 사람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 일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고, 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혜주]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어떤 힘이 생기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 힘든 결핍과 고통 속에서도 우리들은 주변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존재로 어떻게든 힘을 내보는 게 아닐까!

가끔 인간관계에 진이 빠져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사람의 의도가 나쁘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우리'였던 그 시기의 '우리'를 잊지 못하면서도 선뜻 손내밀기가 어려웠다. 나에게 기대하는 마음도 챙겨 보기 싫고 부담감으로만 다가오던 순간들. 작가는 이야기한다.

🔖"모두 자신에게 기대고 있는 누군가의 마음을 잊지 않기를."

떠나고 헤어지고 잊혀지는 순간에서도 그저 그렇게 약간의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흐르므로. 일어난 상황들을 더이상 어떻게 손 써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였던 그때의 마음을 너무 매몰차게 덮어버리지는 말아야겠다.



#우리의환대 #장희원소설집 #우리의환대_서평단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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