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내식 먹는 기분 - 정은 산문집
정은 지음 / 사계절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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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부터 좋았다. 에필로그까지 다 좋았다. 사실 제목도!
'기내식 먹는 기분'이라는 제목만으로도 왠지 모를 설렘이 피어올랐다. 여행을 앞두고 계획을 세울 때 혹은 이미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을 기다리고 있을 때의 설렘과 미묘하지만 기분 좋은 긴장감을 알고 있는 터라 그런 몽글한 여행의 기분을 느끼게 해줄 책이라 믿었다. 작가의 여행 흔적은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설렘은 없었다. 하지만 공감이 있었다. 정말로 너무 좋았다.

정은 작가는 사실 이번 기회에 처음 알게 됐고 《산책을 듣는 시간》과 《커피와 담배》를 출간하신 작가분. 글을 읽으며 내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생활이 버티기 힘들어지면 습관적으로 비행기 티켓창을 열어보며 일 년에 한 달 이상은 외국에서 지내는 그런 생활이 책 읽기 초반에는 그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작가는 단지 도망치고 숨을 곳이 필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의 상황과 솔직한 심정을 이번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람과 관계에 대한 고민과 탐구를 엄청나게 하신 듯한 구절이 곳곳에 있다. 고독에 빠져 있고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도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글은 작가의 경험이 토대가 되는 것 아닐까. 작가는 도망치고 숨은 게 아니라 한 줌의 용기를 계속 내고 있었던 것 같다. 시작을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준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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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샀다. 여행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길 바라며. 그러고 나서 한국에 돌아오면 여전히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매번 실망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또다시 티켓을 산다. 그렇지만 15년간 여행을 반복하다 보니 알 것 같다. 여행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켜줄 것이라는 믿음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여행은 스스로와 거리감을 만드는 일이다. 여행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정확한 내가 되도록 한다.

34. 당시의 나는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고난과 역경 속에 일부러 나를 던져 넣곤 했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과 정신이 성숙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 변화를 겪고 나면 성숙해지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고통은 성숙의 필수 요건이 아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이고, 몸이 힘든 건 힘든 것이고, 사람은 마음을 바꿀 수 있을 때만 성숙한다. 그걸 겪기 전에 깨닫는 사람이 있고 몸이 힘들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다. 후자인 사람은 몸이 고생한다. 내 몸한테 미안했다.

35.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 수 없는지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말해준다.

39. 좋은 하루를 쌓아나가는 게 삶이라는 것, 거창한 목표를 위해 하루하루를 갈아 넣고 희생하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완성하는 것, 나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주변을 잘 가꾸는 것, 그리고 운 좋게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순간을 즐기고 고맙게 여기는 것. 그 하루하루에 진짜 삶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누구라도 나를 떠올릴 때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싶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 그것이 어려운 목표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141. '마법'이란 결국 '의지'와 동의어라는 세상의 비밀 한 가지를 알게 된 채로.

187. 언젠가 공감이란 걸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다 멸종되고 나면, 저 쓸모없는 것들을 오랫동안 연마해온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해졌다.

190. 그 표정을 보고 나니, 그들의 삶을 안타까워하고 연민을 가졌던 게 부끄러웠다. 그 행복의 표정을 내가 고통으로 받아들일 자격이 있을까? 더 나은 삶이, 더 큰 자유가 있다고, 당신은 다른 삶을 선택할 자격이 있었다고 내가 말하는 게 정당할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내 삶은 충분히 자유로웠나? 그들이 이 삶을 자유롭게 선택했고 행복하다고 느끼는데 내가 거기에 고통스러워하는 건 부당하지 않은가.

241. 내가 믿을 만한 누군가가 내 글이 책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해준 순간. 그런 단 한 사람. 최초의 독자. 그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언제 작가가 되는가. 내 글을 책으로 인정한 최초의 독자가 생겨난 순간 작가가 된다.

#정은 #기내식먹는기분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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