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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의 작은 부엌칼
모리사와 아키오 지음, 문기업 옮김 / 문예춘추사 / 2023년 11월
평점 :
돈도 잃고 애인도 잃고 직장마저 잃게 된 주인공 에밀리는 도망칠 곳을 찾던 중 10여년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 댁에서 여름 한 계절을 보내게 된다.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님에게 변변한 사랑도 받지 못 하고 자란 에밀리가 외할아버지 댁에 머물기로 한 결심은 아마 보통 결심이 아니었을 듯하다.
다쓰우라라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에밀리가 보내는 한 계절이 담겨 있다. 사실 스펙타클하거나 큰 사건은 없고 (주인공에게 큰 사건이 있었지만 과거형을 현재에 서술함으로써 독자가 느끼는 커다란 충격은 별로 없다) 일상 속 잔잔한 이야기들로 전체가 구성된다.
절정이라거나 반전이 없어도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책이었다. 어색했던 할아버지와 함께 요리를 하며 마을 사람들과 일상을 보내며...에밀리는 어딘가 단단해진다. 모든 걸 다 내려 놓고 싶을 때 나에게 가장 힘이 되는 건 무얼까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가족, 따뜻한 집밥, 신경쓰지 않으면 놓치기 쉽지만 눈앞에 언제나 늘 반짝였던 풍경들... 사실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도 한다.
단단해진 에밀리가 더이상 도망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내린 결심을 응원한다. 마지막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늙어가는지 눈물이 자꾸 많아진다. 자식도 있고 부모도 있는 입장이라 에밀리에게도, 에밀리 할아버지인 다이조에게도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래도 조금 더 기울었던 건 역시 부모 쪽일까. 나도 다이조 할아버지처럼 늘 그렇게 초연하고도 기다릴 줄 알며, 일상의 소중함을 항상 느끼며 사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바람이 들었다.
다쓰우라에서 보낸 여름의 시간이 에밀리의 작은 무기가 되어 어떤 고난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을 강인함으로 자리잡았으리라 생각한다. 참, 챕터마다 나오는 생선 요리에 군침이 도는 즐거운 감각까지!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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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행복해지는 것보다는 만족하는 것이 중요한 거다.
🔖198. 무섭지만, 그것보다도 큰 파도를 탔을 때의 두근거리는 느낌이 훨씬 강하다나? 그래서 몸이 저절로 바다에게 이끌리는 느낌이래요.
🔖200. 하지만 자신에게는 공포를 이길 만큼 가슴이 뛰었던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
🔖201. 조금 무섭더라도, 일단 행동부터 해보는 건 어떨까요?
🔖203. 옷과 들고 다니는 물건의 센스도, 화려한 경력도, 웃는 모습도, 등을 활처럼 곧게 편 자세와 우아한 걸음걸이도, 그리고 즐겁고 부드러운 말을 선택하는 모습도. 어딜 어떻게 봐도 나는 교카 씨에게 당해낼 수 없었다.
🔖253. 생명력이 넘치는 여름의 짙은 녹음과 푸른 셀로판지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보고도 사야는 전혀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같은 차에 타고, 같은 풍경을 보고, 같은 바다 내음을 맡아도, 나와 사야가 살아가는 세계는 완전히 달랐다.
#모리사와아키오 #에밀리의작은부엌칼 #문예춘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