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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도서관 - 사색하는 머무름, 머무르는 사색들
정강현 지음 / 인북 / 2023년 12월
평점 :
마흔 중반에 들어선 작가의 인생을 통해 감정의 이름을 재정립 해보는 시간. 기자이며 작가인 정강현 님의 글은 처음 접했는데 일상의 여러 순간에 대한 사색들이 오롯하게 공감되고 또 때로는 너무도 낯설어서 놀란 순간들이 많았다.
밤을 헤매며 감정의 이름을 찾아 애쓰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한 감정 한 감정을 꾹꾹 눌러 쓴 듯한 글들을 나는 이렇게나 편하게 앉아 섭취할 수 있다니! 가슴이 벅차다.
머뭇거리다, 자만하다, 꼿꼿하다, 가엽다, 애끊다... 물론 모두 아는 단어들이지만 이렇게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돌이켜 본다. 단어를 경험하고 느끼고 사색까지 나아간 작가가 챕터의 주제인 각 단어마다 또 따로 소개해주는 여러 다른 소설과 시, 그림까지!! 얻은 게 넘친다고 느껴지는 책이었다. 마지막은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어서 여러 번 책을 덮고 한 챕터씩 아껴 읽었다. 어렵지 않게 읽히지만 아껴 읽고 수시로 되뇌고 싶은 글이다.
마흔이 되면서 전과 다른 감정에 빠져들 때가 많았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이름 모를 마음들. 자세히 들여다 보고 마음에 이름을 붙여 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나도 내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할 때가 분명 많으니까. 한 단어로도 이렇게 풍성하고 충만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며 좋은 글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온전히 느껴지는 날들이었다. 내 머리맡에서 오래 버티고 있을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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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프랑스 동요 <인생은 뭐예요(La vie c'est quoi)?>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동요에서 딸이 묻는다. "아빠, 감정이란 게 뭐예요(C'est quoi l'èmotion)?" 아빠는 따뜻하지만 단호하게 답한다. "밝혀지는 영혼이란다(C'est l'âme qui s'allume)." 감정을, 그러니까 마음의 움직임을 세밀히 관찰할 때 감춰진 영혼의 모습이 밝혀질 수 있다는것.
🔖14. 저 숱한 책들은 어떤 영혼의 내전 기록들이다. 제 마음에서 벌어지는 영혼의 일들을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했던 흔적들이다.
🔖37. 유난히 사진 찍기에 열심을 내는 것도 그런 보수적인 시간관 탓인지도 모르겠다. 좋은 시간이란 금방 지나가게 마련이므로, 그런 순간이 찾아왔을 때 얼른 알마보고 붙잡아둬야 한다는 어떤 절박함. 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둘 방법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럴게라도 붙잡아 두지 않으면 영영 아름다운 순간을 잃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사짇기 셔터를 눌러가며 시간을 열심히 오려내곤 했다..
🔖41. 시간이란 생명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이 다 소진되면 생명도 그친다. 하루를 산다는 건 하루만큼 죽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일상은 실은 죽음의 한 절차인 셈이다. 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하루를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기꺼이 공유하는 대상이란 그 자체로 궁극인 소중한 존재여야만 한다. 소중한 존재에게 내 생명과도 같은 시간을 충분히 내어줄 수 있다면, 어디로 흘러가건 그 시간은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 아닐까.
🔖94. 중요한 것은 비애를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비애와 더불어 살마가는 일일 것이다. 서로에게서 서로에게로 마음의 전류가 흐를 때, 비애조차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공감의 기적이 일어난다. 슬픔은 저절로 소멸되는 게 아니라, 곁에서 함께 울어줄 때 겨우 견뎌낼 수 있다.
🔖144. 끝내 좌절되고 무너지더라도 꿈이 꿈틀대지 않으면 삶은 동력을 잃어버린다. 설렌다는 건 살아있다는 강력한 신호음이다.
🔖258. 나는 저절로 굳어버린 여러 마음들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우리 사회가 여러 방면에서 충돌하는 것도 실은 그런 꼿꼿한 마음들이 부딪히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니 부디 서로 힐난하기에 앞서 저절로 굳어버린 마음들에 대해 연민부터 품는 게 마땅한 이치가 아닐까. 당신도 나도 어떤 내밀한 사적 경험 탓에 꼿꼿해져 버린 마음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모두 조금씩 고장 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심약한 인간이니까.
🔖266. 추억이란 상실의 다른 이름이다. 찬란한 한때를 잃어버린 대가로 우리는 추억을 획득한다. 빛나고 눈부신 시간일수록 그 상실감은 커서 지난 일을 되돌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추억이 더 아련해지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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