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로부터 독립적으로)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선택의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아무런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실천적 규칙이 하나의 명령이라는 것, 다시 말해 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조건으로서의 이 규칙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명령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순전한 
분해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합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객관들의 인식을 
넘어주관, 다시 말해 순수 실천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 질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임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지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분해를 통해, 윤리성의 원리는 정언명령이어야만 하며, 그러나 이 정언명령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이
자율을 지시명령하는 것임이 드러나니 말이다.

이성적 존재자는 예지자로서 자신을 오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에 속하는 작용 원인으로서만 그의 
원인성을 의지라고 부른다. 그럼에도 다른 측면에서 이성적 존재자는 자기가 감성세계의 일부임을 의식하는바, 
감성세계 안에서 그의 행위들은 저 원인성의 순전한 
현상들로서만 마주치게 되지만, 그 행위들의 가능성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 원인성으로부터는 통찰될 수가 없고, 그 대신에 저 행위들은 다른 현상들, 곧욕구들과 경향성들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즉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통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성세계의 순전한 성원으로서 나의모든 행위들은 순수의지의 자율의 원리에 완전히 적합할 것이나, 한낱
감성세계의 일부로서 나의 행위들은 전적으로 욕구들과 
경향성들의 자연법칙에, 그러니까 자연의 타율에 알맞게 
취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자들은 윤리성의 최상 원칙에, 후자들은 행복의 최상 원칙에 의거할 터이다.)

그러나 오성세계는 감성세계의 근거를, 그러니까 또한 감성세계의 법칙들의 근거를 함유하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오성세계에 속하는 나의 의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법칙수립적이고, 그러므로 또한 그러한 것으로생각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예지자로서 나를, 비록 다른 측면에서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존재자같이 봄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오성세계의 법칙에 다시 말해 자유의 이념 중에 그것의 
법칙을 함유하는 이성에, 그러므로 의지의 자율에 복종하는 것으로 인식하며, 따라서 오성세계의 법칙들을 나에 대한 
명령들로, 그리고 이 원리에 알맞은 행위들을의무들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이념이 나를 예지 세계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정언명령들은 가능하다. 즉 그로써, 만약 내가 
예지 세계의 성원이기만하다면, 나의 모든 행위들은 의지의 자율에 항상 알맞을 터인데, 그러나나는 나를 동시에 
감성세계의 성원으로서도 보기 때문에, 의지의 자율에 알맞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정언적 당위는 선험적 종합 명제를 표상하는 것인바, 왜 그런가 하면, 감성적 욕구들에 의해 
촉발되는 나의 의지위에 동일하지만 오성세계에 속하는 순수한, 그것 자체로 실천적인 의지의 이념이 덧붙여지고, 
이 의지는 저 의지가 이성에 따르는 최상의 조건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감성세계에 대한 직관들에
그것 자체로는 법칙적 형식 일반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지성의 개념들이 덧붙여지고, 그럼으로써 그것에 
자연에 대한 모든 인식들이의거하는 선험적 종합 명제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대체로 같다.

모든 사람들은 의지의 면에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록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났어야만 하는 
그런 행위들에 대한 모든판단들이 내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는 경험 개념이 아니고,
또한 경험 개념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설령 경험이 자유의조건 아래서 필연적인 것으로 표상되는 그런 요구들과 반대되는 것을 보여준다 해도,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정언명령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오로지 그 아래서만 이 명령이 가능한 유일한 전제, 곧 자유의 이념을 우리가 제시할 수있는 한에서, 또한 우리가 이 전제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는 한에서만대답될 수 있다. 이성의 실천적 
사용을 위해서는, 다시 말해, 이 명령의,
그러니까 윤리 법칙의 타당성에 대한 확신을 위해서는 이
것으로 충분하다. 

‘선의‘는 옳은 행위를 오로지 그것이 옳다는 이유에서 
택하는 의지를말한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는
마음이나 또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경향성에 따라 옳은 
행위를 지향하는 의지가 아니라, 단적으로 어떤 행위가 
옳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그 행위를 택하는 의지이다. 

그러므로 이 의지 작용에는 어떤 것이 옳다‘, 무엇이 선하다‘는 판단이 선행해야 하고, ‘옳음‘과 ‘선함‘은 결코 경험으로부터는 얻을 수 없는 순수 이성의 이념이므로, 선의지는 
오직 이성적 존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서 다름 아닌 
순수한 이성적 존재자의 실천을 지향하는 이성, 
곧 ‘순수실천이성‘이다. 

선의 개념은 "이미 자연적인 건전한 지성에 내재해 있고, 
가르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단지 계발될 필요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의지가 자연적으로 발동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인간에게 더 이상 악행이라든지 ‘당위‘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선의지는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이념의 실천이 이성적 존재자의 ‘의무‘라고 납득하는 데서 생긴다.

그래서 윤리 규정은 당위로서 ‘~하라!‘는 ‘명령‘으로 나타나며, 그것도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그것에 
준거해서 행위해야만 하는필연적 실천명령으로 다가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명령은 이성적 존재자에게는 ‘실천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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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핵심주제들을 물음과 반론 제기를 통해 쉽게
이해시켜주는 책입니다.












철학 역사상 영향력이 가장 큰 사상가 중 하나인 플라톤
(기원전 약427-347)은 국가에서 철학의 시작을 소위 
‘동굴의 비유‘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동굴에서 앞의 벽만 
바라보도록 묶여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동굴 벽에 
비친 사물들의 그림자만을 본다. 그들은 다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림자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들 중 한 명이 사슬에서 풀려나서 동굴 밖으로 나가서, 
사물들이 그림자의 진짜 원인임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것을 설명해 주지만, 그들은 그를 비웃고 만다. 
왜냐하면 이들이날마다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철학의 시작을 말해 주고 있다. 철학함은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의 배후를 캐묻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동굴의 비유로 치자면, 보고 생각하는 것은 그림자에, 
그 배후는 사물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지각하고 
생각해서 어떤 의견을 가진다. 철학은 그 의견의 배후를 
캐묻는다.

제시된 의견 안에 포함된 개념들을 명확하게 모른다면, 
결국 그 의견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만일 누군가가 "철학은 쓸모없다"고 말한다면, 철학자는 
다음처럼 물을 것이다. "철학함이란 무엇가?" 
이 물음이 해명되지 않는 이상, 그 의견은 평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무엇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어떻게 의미에 대한 물음들을 탐구하는가?

첫째로 철학은 일반적인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가령, 우리는 물질적 사물을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정의는 옳지도 틀리지도 않으며, 
단순히 시도해본 것이다. 어떤정의가 선호되어야만 하는가? 이는 세계를 설명하는 특정한 이론 내에서, 즉 진술들의 
집합 내에서 그 개념이 얼마만큼 중요한가에 달려 있다.

두 번째로 철학은 개념을 분석한다. 한 개념을 더 단순한 
개념들로 분해한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그러한 개념 
분석은 개념에 대한 정의로이끌어 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한 이상적인 경우는 드물다. 그 이유중 하나는 개념 분석 자체가 논쟁의 여지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논증을 제시하면, 주장에 대해서 근거가 세워진다. 
하나의 논증은 전제와 결론으로 구성된다. 전제는 논증이 
근거하는 진술들이고, 결론은 논증을 통해서 세워지는 진술이다. 전제들과 결론은 논리적인 관계이다. 전제들을 받아들이면, 결론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물론이는 논증이 
타당할 때에만 해당한다. 논증은 전제들이 참이고, 전제들로부터 결론이 논리적으로 도출되어 나올 때에만 타당(valid) 하다.

그러나 결론이 전제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지 않는 
논증들도있다. 그런 논증들은 타당하지 않다. 어떻게 
타당한 논증 형식을 타당하지 않은 논증 형식으로부터 
구분해 내는가? 논리학은 이를 탐구하는 철학의 분과이다. 근거에 대한 물음에 대한 해답에 논리학은 중요한 도움을 
제공해 준다.

올바른 논증은 타당(valid)하면서, 나아가 건전 (sound)
해야 한다. 삼단 논법과 같은 논증이 형식적으로 올바를 때 
‘타당하다‘. 그리고 그 전제가 참이어서, 결론도 참일 때, 
그 논증은 ‘건전하다‘.

‘명확함‘이라는 개념은 간과하기 쉬운 두 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명확함은 ‘명확하게 만들기‘라는 활동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활동의 결과, 즉 ‘명확해진 생각‘이기도 하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명료한 생각‘을추구하면서, 그의 생각을 명확하게 한다. 철학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명료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제들의 ‘명확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있는 능력을 기르려 한다. 철학을 하는 사람은 더 명확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다.

명확한 생각을 하는 능력은 이미 그 자체로 추구할 만한 목적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능력은 일상에서부터 이론적인 과학에서까지 많은영역에서 요구된다. 따라서 철학은 일반적으로 삶 속에서 유용한 능력을 단련시켜 준다. 어떤 이들은 이런 능력을 철학의 도구화로 여기기도한다. 그들에 따르면, 철학의 가치가 다른 능력들을 위해서 쓰이는 도구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전체적이고 깊게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철학함은 이에 대한 대답을 해 주는 행위이다. 이런 욕구를 느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철학에 이끌리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가 즉시 충족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 된다.
종교적 가르침과 달리 철학은 최종적인 답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 많은답변들이 가능하며, 그중에 어떤 답을 선택하느냐는 것은 그가 무엇을믿는지에 따르며, 그의 선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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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의 집대성 3대 비판 시리즈의 핵심










이 비판에는 ‘순수 실천이성비판‘이 아니라, 단적으로 
대개 ‘실천이성 비판‘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실천 이성과 
사변 이성을 병렬시킴은 저런 이름을 요구하는 듯이 
보임에도 말이다. 그 까닭은 이 논고가 충분히 해명해줄 
것이다. 이 논고는 순수 실천이성이 있다는 것만을 밝히고, 이 관점에서 그것의 전 실천적 능력을 비판한다. 
만약 이 일이 성공을 거둔다면, 이 논고가 (사변 이성에서 
능히 일어나는 바와 같이) 혹시 순전히 월권적으로 이성이 그러한 순수 능력을 가지고서 자기 분수를 넘어서지나 
않을까를 알기 위해, 순수 능력 자체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성이 순수 이성으로서 실제로 실천적이라면, 
이성은 자기의 실재성과 자기 개념들의 실재성을 행위를 
통하여 증명할 것이고, 그런 가능성에 반대되는 일체의 
궤변은 헛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의 특수한 능력을 그것의 원천 • 내용 한계의 
면에서 규정하는 것이 문제가 될 때, 사람들은 인간 인식의 본성상 바로 그 인식의부분들로부터, 즉 그것의 엄밀한 그
리고 우리가 이미 얻은 요소들의 현재상태에서 가능한 한 완벽한 서술로부터 시작할 수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점이 또 있는데, 그것은 보다 더 
철학적이고 건축술적인 것이다. 곧, 전체의 이념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로부터 그 모든부분들을 그 상호 관계 속에서, 저 전체의 개념으로부터 그 부분들을 도출해냄으로써, 
하나의 순수한 이성 능력에서 포착하는 일 말이다.

실천 원칙들은 의지의 보편적인 규정을 함유하는 
명제들로서, 그 아래에 다수의 실천 규칙들을 갖는다. 
이 원칙들은 그 조건이 주관에 의해서 단지 주관의 의지에 
대해서만 타당한 것으로 간주될 때는, 주관적이다. 
즉 준칙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조건이 객관적인 
것으로 다시말해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 타당한 
것으로 인식되면, 객관적이다. 즉 실천 법칙들이다.

만약 우리가 순수 이성이 실천적으로, 다시 말해 의지 
규정을 위해 충분한 근거를 자기 내에 함유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실천 법칙들은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든 실천 원칙들은 한낱 준칙들일따름일 것이다.

이성적 존재자의 정념적으로 촉발된 의지에서는 그 자신에 의해 인식된 실천 법칙들에 대해 준칙들의 상충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모욕에 대해서도 보복 
없이 참고 지내지않는다"는 것을 준칙으로 삼으면서도, 
그는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실천법칙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준칙일 뿐이며, 반면에 모든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를 위한 
규칙으로서는 동일한 준칙 안에서 자기 자신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질료적인 실천적 규칙들은 의지의 규정 근거를 
하위의 욕구 능책에 둔다. 그리고 의지를 충분하게 
규정하는 순전히 형식적인 법칙이전혀 없다면 어떠한 
상위의 욕구 능력도 인정될 수 없을 것이다.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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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이성적 존재자는 자신의 의지의 모든 준칙들을 
통해 보편적으로 법칙수립하는 자로 간주되어야 하는바, 
그것은 이 관점에서 그 자신과 그의 행위들을 판정하기 위해 그러하거니와, 이성적 존재자의 이런개념은 이 개념에 
부속해 있는 매우 생산적인 개념, 곧 목적의 나라라는
개념에 이른다.

나는 ‘나라‘라는 말이 공동의 법칙들에 의한 서로 다른 
이성적 존재자들의 체계적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법칙들은 그것들의보편적 타당성에 따라 목적들을 규정하기 때문에, 이성적 존재자들의 개성적인 차이와 함께 그것들의 사적인 목적들의 일체 내용을 도외시한다면 
체계적으로 연결된 목적 그 자체인 이성적 존재자들의, 
그리고 각각의 이성적 존재자가 스스로 세울 수 있는 
고유한 목적들의 모든 목적들의 전체가생각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앞서 말한 원리들에 따라서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가 생각될 수 있다.

목적들의 나라에서 모든 것은 가격을 갖거나 존엄성을 
갖는다. 
가격을 갖은 것은 같은가격 을갖는 다른 것으로도 대치될 
수가 있다. 이에 반해 모든 가격을 뛰어넘는, 그러니까 같은 가격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존엄성을 갖는다.

보편적인 인간의 경향성 및 필요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시장가격을 갖는다. 필요와 상관없이, 어떤 취미나 순전히 
무목적적인 유희에서 우리 마음 능력의 흡족함에 따르는 
것은 애호가격을 갖는다. 그러나 그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그런 조건을 이루는 것은한낱 
상대적 가치, 다시 말해 가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적 가치, 다시말해 존엄성을 갖는다.

완벽한 규정, 저 정식, 곧 ‘모든 준칙은 자신의 법칙수립에 
의해 자연의 나라로서의 가능한 목적들의 나라와 
합치해야 한다‘는 정식에의한 모든 준칙들의 완벽한 규정. 
여기서 사태의 진행은 의지 형식의 하나의지의 보편성), 
질료의(객관들, 다시 말해 목적들의) 여럿, 그것들의 체계의 모두 내지 전체성 범주에 의한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윤리적 판정(가치판단)에서 언제나 엄격한 방법에 따라 수행하고, 그자체가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는 준칙에 따라 행위하는 정언명령의 보편적 정식을 근저에 둔다면, 더 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동시에 윤리 법칙에 입구를 만들어주고자 한다면, 
동일한 행위를 앞에서 언급한 세 개념에 의해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한 한 직관에 근접시키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

비록 우리가 의무라는 개념 아래서 법칙에 대한 복종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 의해 동시에,
자기의 모든 의무를 완수하는 동일한 인격에서 모종의 
숭고함과 존엄함을 표상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무릇, 인격이 도덕법칙에 복종해 있는 한에서, 그에게 
숭고함이란 없으나, 그러나 실로, 그가 바로 그 도덕법칙에 대하여 동시에 법칙수립적이며, 그리고 오로지 그 때문에 
그것에 종속해 있는 한에서는 숭고함이 있다. 또한
우리는 위에서, 어떻게 공포도 아니고, 경향성도 아닌, 
단지 법칙에 대한존경이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줄 수 있는 
그런 동기인가를 제시하였다.

우리 자신의 의지는, 그것이 오로지 그것의 준칙들에 의해 
가능한 보편적 법칙수립의 조건 아래서, 행위하는 한에서, 
즉 이념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이 의지가 존경의 본래 
대상이다. 그리고 인간성의 존엄함은 보편적으로 법칙수립적이며, 그러면서도 바로 이 법칙수립에 동시에 스스로
복종한다는 조건과 함께 그렇게 하는 이 능력에서 성립한다.

의지의 자율이란 의지가 그 자신에게 (의욕의 대상들의 
모든 성질로부터 독립적으로) 법칙인 그런 의지의 
성질이다. 그러므로 자율의 원리는 선택의 준칙들이 
동일한 의욕에서 동시에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함께 
포섭되는 그러한 방식 외에는 아무런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실천적 규칙이 하나의 명령이라는 것, 다시 말해 각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가조건으로서의 이 
규칙에 필연적으로 묶여 있다는 것은 명령에서 나타나는 
개념들의 순전한 분해에 의해서는 증명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합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객관들의 인식을 넘어주관, 
다시 말해 순수 실천이성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것이다. 명증적으로 지시명령하는 이 종합
 명제는 온전히 선험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 절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자율의 원리만이 도덕의 유일한 원리임은 윤리성의 개념들을 순전히 분해만 해보아도 충분히 밝혀지는 바이다. 
왜냐하면 이 분해를 통해, 윤리성의 원리는 정언명령이어야만 하며, 그러나 이 정언명령은 더도 덜도 아닌 바로 이 자율을 지시명령하는 것임이 드러나니 말이다.

경험적 원리들은 그 위에 도덕법칙들을 정하는 데는 
도무지 쓸모가없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도덕법칙들이 
모든 이성적 존재자들에게 차별없이 타당할 보편성이, 
즉 그로 인해 도덕법칙들에게 부과되는 무조건적인 
실천적 필연성이, 만약 그것들의 기초가 인간의 자연본성의 특수한 설비나 인간의 자연본성이 처해 있는 우연적인 
상황에서 얻어진다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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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능력은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주어진 다양을 
포착하긴 했지만 아직 정돈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가 
다양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감각능력의 지각(의식된 경험적 표상)은 단지 내적 
현상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에 더해서 사고의 규칙에 따라 지각을 결합하는 (다양 안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성은 
이로부터 처음으로 경험적인식, 즉 경험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만약 지성이 우선 감각표상들을 개념에 따라 정돈하지 않은 채 감히 판단을 내린 뒤 곧이어 그런 표상들의 
혼란함은 감성적 성질을 지닌 인간 본성의 잘못일 수밖에 
없다고 불평한다면, 문제는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한 지성에 있는것이다. 이런 질책은 감성에 의해서 외적 표상뿐만 
아니라 내적 표상도 혼란스러워진다는 근거 없는 불평에도 적용된다.

감각능력은 지성을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능력은 
자신의 봉사를 처리해달라고 지성에 자청할 뿐이다. 
사람들이 공통적인 인간 감각(공통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 감성은 중요성을 부여받는데, 감성이 이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고 해서, 감성이 지성을 지배하려고 권한다고 생각될 수는 없다. 물론지성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도록 형식에 따라 지성의 법정으로 소환되지 않는 판단, 그러므로 감각능력을 통해 직접 지시받은 것처럼 보이는 판단도 있다. 이른바 격언이나 (소크라테스가 자기 수호신 덕으로돌렸던 진술같이) 신탁에 따른 갑작스러운 
진술이 그런 판단을 포함한다. 즉,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경우에 정당하고현명하게 행해진 것에 
관한 최초의 판단은 일반적으로도 역시 올바를 것이며, 
숙고를 통하면 그저 기교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들은 사실 감각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모호하긴 하지만 실제적인 반성에서 나온다.

감각능력은 기만하지 않는다. 이 명제는 사람들이 
감각능력에 대해 가하는 가장 중요한 질책, 그러나 엄밀히 
고려해보면 가장 공허하 B기도 한 질책을 거부한다. 
그것은 감각능력이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오류는항상 
지성에만 짐을 지운다. 그렇지만 감각가상(외관, 나타남)이 지성을 위해 변호는 아니더라도 변명은 제공해준다. 
감각가상에 의해종종 인간은 자신의 표상방식에서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간주하고 (모서리가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탑을 둥근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바다 중에서 멀리 있는 부분이 더 높은 광선을 통해 눈에 들어오게되고 그리하여 바다를 해안보다 더 높은 것(높은 바다로 간주한다거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것을 안개 낀 대기를 통해서 바라본 
보름달을 동일한 시직경으로 파악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늘 높이 나타난 보름달보다 더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더 큰 것으로도 간주하는등), 그리하여 현상을 
경험으로 간주하며, 이에 따라 감각능력의 결함이 아닌 
지성의 결함으로 오류에 빠진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가운데 가상 능력을 다룬 앞 
절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개념에 대한 논의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두 개념은 문자로 보면 독일어에서는 단지 
물체적 성질과 힘을 의미할 뿐이지만 모종의 유비로 보면 
라틴어에서처럼 행할 수 있는(쉬운)것과 비교적 행할 수 
없는(어려운 것을 의미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행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그것을위해 필요한 자기 능력의 정도를 의심하는 주관은 자신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 그것을 ‘주관적으로 
행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행하기 쉬움(신속함)은 그런 행위에 대한 
숙달습관과 혼동돼서는 안 된다. 
전자는 "내가 하려고 하면 나는 할 수 있다"는식으로 일정 
정도 역학적 능력을 의미하고 주관적 가능성을 가리킨다. 
후자는 주관적이고 실천적인 필연성, 즉 습관을 가리키며, 
따라서
"의무가 그것을 명령하므로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반복해서 자주 사용함으로써 일정 정도의 의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덕은 자유롭고 정당한 행위에 대한 숙달이라고 
설명될 수 없다. 그렇게 설명되면 덕은 단지 힘이 사용되는 기제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오히려 덕은 자신의 의무를 
준수하게 되는 도덕적 힘이다. 덕은 결코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고방식에서 항상 BA전적으로 새롭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솟아나야 한다.

쉬운 것은 어려운 것과 반대되지만 종종 부담스러운 것과도 반대된다. 한 주관이 어떤 것을 위한 행동에 요구되는 힘을 사용하고도 자기 안에 자기 능력의 여분을 많이 발견한다면, 바로 그 어떤 것은 그주관에 쉬운 것이다. 방문, 축하 그리고 애도를 위해 의례를 행하는것보다 더 쉬운 일이 무엇일까? 그러나 바쁜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힘든 일이 무엇일까?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역시 관례에 어긋나지는 않을지 우려하게 되는 그런 성가신
친교 업무가 있다.

마지막으로 습관화되는 것은 말하자면, 동일한 종류의 
감각이 바뀌지 않고 오래 지속됨으로써 감각능력이 
주의하지 못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 감각을 더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습관화되는 것은 
악을 견디기 쉽게 만들기는 하지만(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이렇게 악을 견디는 것을 인내리는 덕의 이름으로 잘못 
칭송한다).

받았던 선을 의식하고 기억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이는 곧 배은망덕(진정한 부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버릇은 이때까지 행동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행동하라는 물리적인 내적 강요다. 바로 이런 이유로 
버릇은 선한 행위에서조차 도덕적 가치를 빼앗는다. 
버릇은 마음의 자유를 중지시키고 나아가 동일한 행위를 
생각 없이 반복하는 지경 (천편일률)까지 이르러 우스꽝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허사(단지 사유에서 공허함을채우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상투어를 쓰는 버릇은 청자로 하여금 
그 뻔한 어구 따위를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걱정하게만들고, 화자를 말하는 기계로 만든다. 타인의 
버릇이 우리 안에 힘오감을 일으키도록 그렇게 유발되는 이유는, 이때 인간에게서 동물성이 대단히 강하게 돌출해서 
흡사(비인간적인) 다른 본성인 것처럼본능적으로 버릇의 
규칙에 지배받게 되고, 그래서 짐승과 동일한 부류로 전락할 위험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감각표상을 통해 지성에 일어나는 환영은 자연적일 수도 
있고 인위적일 수도 있는데, 이는 착각 아니면 기만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 어떤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단언하는데도 눈의증언에 의거해 바로 그 동일한 주관으로 하여금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환영은 환시라고 부른다.

착각은 대상으로 생각된 것이 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지속하는 환영이다. 

마음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감각에 대한 마음의 공허함, 
즉 권태에서 비롯하는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대한 혐오감이 그렇다. [마음은 끊임없이 감각을 추가하지만] 그럼에도 
이때 동시에 사람들은 노동이라고 불리는 모든 업무, 
노고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런 혐오를 몰아낼 수 있는 모든 업무에 시들해짐을, 즉 싫증을 실감한다. 이런 혐오감은 가장 거슬리는 감정이며, 그 원인은 안락함(아무런 피로도 선행하지 않는 안식)을 향한 자연적 경향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성은 이성이 인간의 법칙으로 삼는 목적과 관련해서조차 기만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목적 없이 연명할) 때에도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향성을 
다시 기만하는 것(이것은 예술과의 놀이를 통해 그러나 가장 흔히는 사교적 담화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은 시간 보내기 (시간을 잊고 지내기)라고 불린다. 여기서 이 표현은
일 없는 안식을 향한 경향성 자체를 기만하려는 의도를 
이미 비추고있다. 

예술을 통해 놀이하면서 마음이 즐거워지고, 심지어는 
평화로운 경쟁 속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 목적 없는 순전한 
놀이만으로 마음의 수양이 얻어질 때가 그러한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시간죽이기라고 불릴 것이다. 경
향성 안에 있는 감성에 힘으로 대항해서는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책략을 써서 감성을 극복해야한다. 스위프트가 말하듯이, 배를 구하려면 고래에게 가지고 놀 수있는 큰 통을 던져주어야 한다.

인식능력 중 감성(직관에 속하는 표상의 능력)은 두 부분, 
즉감각능력과 상상력을 포함한다. 감각능력은 현존하는 
대상과 관련된 직관 능력이고 상상력은 현존하지 않는 
대상과 관련된 직관 능력이다. 

그러나 감각능력은 다시 외적 감각능력 [외감]과 내적 
감각능력[내감]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인간의 신체가 
물체적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의 감각능력이고, 
후자는 인간의 신체가 마음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의 감각능력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내감이 (경험적 직관의) 
단순한 지각능력이며, 쾌와 불쾌의 감정과는 다른 것, 
다시 말해 어떤 표상의 상태를 보존할지 아니면 거부할지 
그에 따라 결정되는 주관의 감수성, 즉 사람들이 내면적 
감각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감각능력의 표상은 사람들이 그런 표상으로 의식하는 
한에서 특별히 감각지각이라고 불리며, 이때 감각은 동시에 주관의 상태에 대한 주의를 환기한다.

대조는 서로 대립하는 감각표상들을 하나의 동일한 개념 
아래에 나란히 세워서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대조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들이 결합될 때 성립하는 
모순과 구별된다. 

희귀한 것과 감춰진 것도 포함하는 새로운 것은 주의를 
증진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획득이고, 따라서 
감각능력은 그런 새로운 것으로 더 많은 힘을 얻기 때문이다.일상적인 것이나 습관적인 것은 주의를 소멸시킨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이 고대 유물 한 조각을 발견하거나 
접촉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은 사물의 자연적 진행에 따라 시간의 힘에 의해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추측해야 마땅할 사태를 생생하게 현재화한다.

대상이 현존하지 않는데도 직관하는 능력인 상상력은 
생산적이거나 아니면 재생적이다. 즉, 상상력은 경험에 
선행하여 대상을근원적으로 현시하는 능력이거나 아니면 
전에 가졌던 직관을 마음으로 다시 불러와서 파생적으로 
현시하는 능력이다. 순수한 공간직관과 시간 직관은 근원적 현시에 속하고, 나머지 모든 직관은 경험적 직관을 전제한다.

이 경험적 직관은 대상에 대한 개념과 결합된다면, 
즉 경험적 인식이 된다면 경험이라고 불린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상상을 만들어내는 한에서 상상력은 공상이라고 불린다.


상상력은 (다르게 말해서) 창작적(생산적)이거나 아니면 
단지 회상적(재생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산적 
상상력이 그야말로 창조적인 것, 
즉 전에 우리의 감각능력에서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감각표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항상 
그런 상상력의소재를 밝힐 수 있다. 일곱 가지 색깔 중 빨
간색을 전혀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 색깔에 대한 감각을 
이해시킬 수는 없으며, 선천적으로 눈이 먼 사람에게는 
어떤 색깔에 대한 감각도 이해시킬 수 없다. 심지어 두 
색깔이 혼합되어 만들어지는 중간색, 예컨대 녹색도 
마찬가지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혼합되면 녹색이 나온다. 
그러나 이렇게 두먹이 혼합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상
상력은 녹색에 대한 최소한의 표상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상상력의 독창성(모방하지 않는 생산)은 만일 그것이 
개념과 조화를 이룬다면 천재라고 불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광신이라 불린다. 우리가 인간의 형태 
이외에 이성적 존재에 적합한 어떤 다른형태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은 주의할 만하다. 

예술가는 물체적 형태를 (말하자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현시할 수있기 전에 상상력 안에서 그 형태를 만들어야 하며, 이 경우 그 형태는 하나의 창작이다. 
이 창작이 (아마도 꿈에서처럼) 자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공상이라고 불리고, 이런 창작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창작이 자의로 통제된다면 구성, 발명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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