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능력은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다. 주어진 다양을 
포착하긴 했지만 아직 정돈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가 
다양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감각능력의 지각(의식된 경험적 표상)은 단지 내적 
현상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에 더해서 사고의 규칙에 따라 지각을 결합하는 (다양 안에 질서를 부여하는) 지성은 
이로부터 처음으로 경험적인식, 즉 경험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만약 지성이 우선 감각표상들을 개념에 따라 정돈하지 않은 채 감히 판단을 내린 뒤 곧이어 그런 표상들의 
혼란함은 감성적 성질을 지닌 인간 본성의 잘못일 수밖에 
없다고 불평한다면, 문제는 자신의 의무를 등한시한 지성에 있는것이다. 이런 질책은 감성에 의해서 외적 표상뿐만 
아니라 내적 표상도 혼란스러워진다는 근거 없는 불평에도 적용된다.

감각능력은 지성을 지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능력은 
자신의 봉사를 처리해달라고 지성에 자청할 뿐이다. 
사람들이 공통적인 인간 감각(공통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과 관련해서 감성은 중요성을 부여받는데, 감성이 이 
중요성을 제대로 인정받기를 원한다고 해서, 감성이 지성을 지배하려고 권한다고 생각될 수는 없다. 물론지성에 의해 
판결이 내려지도록 형식에 따라 지성의 법정으로 소환되지 않는 판단, 그러므로 감각능력을 통해 직접 지시받은 것처럼 보이는 판단도 있다. 이른바 격언이나 (소크라테스가 자기 수호신 덕으로돌렸던 진술같이) 신탁에 따른 갑작스러운 
진술이 그런 판단을 포함한다. 즉,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경우에 정당하고현명하게 행해진 것에 
관한 최초의 판단은 일반적으로도 역시 올바를 것이며, 
숙고를 통하면 그저 기교적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판단들은 사실 감각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모호하긴 하지만 실제적인 반성에서 나온다.

감각능력은 기만하지 않는다. 이 명제는 사람들이 
감각능력에 대해 가하는 가장 중요한 질책, 그러나 엄밀히 
고려해보면 가장 공허하 B기도 한 질책을 거부한다. 
그것은 감각능력이 항상 올바르게 판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혀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오류는항상 
지성에만 짐을 지운다. 그렇지만 감각가상(외관, 나타남)이 지성을 위해 변호는 아니더라도 변명은 제공해준다. 
감각가상에 의해종종 인간은 자신의 표상방식에서 주관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으로간주하고 (모서리가 보이지 않는 멀리 있는 탑을 둥근 것으로 간주한다거나, 바다 중에서 멀리 있는 부분이 더 높은 광선을 통해 눈에 들어오게되고 그리하여 바다를 해안보다 더 높은 것(높은 바다로 간주한다거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것을 안개 낀 대기를 통해서 바라본 
보름달을 동일한 시직경으로 파악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늘 높이 나타난 보름달보다 더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더 큰 것으로도 간주하는등), 그리하여 현상을 
경험으로 간주하며, 이에 따라 감각능력의 결함이 아닌 
지성의 결함으로 오류에 빠진다.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것 가운데 가상 능력을 다룬 앞 
절은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의 개념에 대한 논의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두 개념은 문자로 보면 독일어에서는 단지 
물체적 성질과 힘을 의미할 뿐이지만 모종의 유비로 보면 
라틴어에서처럼 행할 수 있는(쉬운)것과 비교적 행할 수 
없는(어려운 것을 의미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행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그것을위해 필요한 자기 능력의 정도를 의심하는 주관은 자신의 상황과 관계에 따라 그것을 ‘주관적으로 
행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행하기 쉬움(신속함)은 그런 행위에 대한 
숙달습관과 혼동돼서는 안 된다. 
전자는 "내가 하려고 하면 나는 할 수 있다"는식으로 일정 
정도 역학적 능력을 의미하고 주관적 가능성을 가리킨다. 
후자는 주관적이고 실천적인 필연성, 즉 습관을 가리키며, 
따라서
"의무가 그것을 명령하므로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반복해서 자주 사용함으로써 일정 정도의 의지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덕은 자유롭고 정당한 행위에 대한 숙달이라고 
설명될 수 없다. 그렇게 설명되면 덕은 단지 힘이 사용되는 기제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오히려 덕은 자신의 의무를 
준수하게 되는 도덕적 힘이다. 덕은 결코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사고방식에서 항상 BA전적으로 새롭게 그리고 
근원적으로 솟아나야 한다.

쉬운 것은 어려운 것과 반대되지만 종종 부담스러운 것과도 반대된다. 한 주관이 어떤 것을 위한 행동에 요구되는 힘을 사용하고도 자기 안에 자기 능력의 여분을 많이 발견한다면, 바로 그 어떤 것은 그주관에 쉬운 것이다. 방문, 축하 그리고 애도를 위해 의례를 행하는것보다 더 쉬운 일이 무엇일까? 그러나 바쁜 사람에게는 그보다 더힘든 일이 무엇일까? 
모든 사람이 진심으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역시 관례에 어긋나지는 않을지 우려하게 되는 그런 성가신
친교 업무가 있다.

마지막으로 습관화되는 것은 말하자면, 동일한 종류의 
감각이 바뀌지 않고 오래 지속됨으로써 감각능력이 
주의하지 못하게 되어 사람들이 그 감각을 더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습관화되는 것은 
악을 견디기 쉽게 만들기는 하지만(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이렇게 악을 견디는 것을 인내리는 덕의 이름으로 잘못 
칭송한다).

받았던 선을 의식하고 기억하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이는 곧 배은망덕(진정한 부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버릇은 이때까지 행동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계속 행동하라는 물리적인 내적 강요다. 바로 이런 이유로 
버릇은 선한 행위에서조차 도덕적 가치를 빼앗는다. 
버릇은 마음의 자유를 중지시키고 나아가 동일한 행위를 
생각 없이 반복하는 지경 (천편일률)까지 이르러 우스꽝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허사(단지 사유에서 공허함을채우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상투어를 쓰는 버릇은 청자로 하여금 
그 뻔한 어구 따위를 반복해서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걱정하게만들고, 화자를 말하는 기계로 만든다. 타인의 
버릇이 우리 안에 힘오감을 일으키도록 그렇게 유발되는 이유는, 이때 인간에게서 동물성이 대단히 강하게 돌출해서 
흡사(비인간적인) 다른 본성인 것처럼본능적으로 버릇의 
규칙에 지배받게 되고, 그래서 짐승과 동일한 부류로 전락할 위험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감각표상을 통해 지성에 일어나는 환영은 자연적일 수도 
있고 인위적일 수도 있는데, 이는 착각 아니면 기만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지성을 통해 어떤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단언하는데도 눈의증언에 의거해 바로 그 동일한 주관으로 하여금 그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환영은 환시라고 부른다.

착각은 대상으로 생각된 것이 실제적인 것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지속하는 환영이다. 

마음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감각에 대한 마음의 공허함, 
즉 권태에서 비롯하는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대한 혐오감이 그렇다. [마음은 끊임없이 감각을 추가하지만] 그럼에도 
이때 동시에 사람들은 노동이라고 불리는 모든 업무, 
노고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런 혐오를 몰아낼 수 있는 모든 업무에 시들해짐을, 즉 싫증을 실감한다. 이런 혐오감은 가장 거슬리는 감정이며, 그 원인은 안락함(아무런 피로도 선행하지 않는 안식)을 향한 자연적 경향성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성은 이성이 인간의 법칙으로 삼는 목적과 관련해서조차 기만적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목적 없이 연명할) 때에도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한다. 그러므로 이런 경향성을 
다시 기만하는 것(이것은 예술과의 놀이를 통해 그러나 가장 흔히는 사교적 담화를 통해 일어날 수 있다)은 시간 보내기 (시간을 잊고 지내기)라고 불린다. 여기서 이 표현은
일 없는 안식을 향한 경향성 자체를 기만하려는 의도를 
이미 비추고있다. 

예술을 통해 놀이하면서 마음이 즐거워지고, 심지어는 
평화로운 경쟁 속에서 그 자체로는 아무 목적 없는 순전한 
놀이만으로 마음의 수양이 얻어질 때가 그러한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시간죽이기라고 불릴 것이다. 경
향성 안에 있는 감성에 힘으로 대항해서는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책략을 써서 감성을 극복해야한다. 스위프트가 말하듯이, 배를 구하려면 고래에게 가지고 놀 수있는 큰 통을 던져주어야 한다.

인식능력 중 감성(직관에 속하는 표상의 능력)은 두 부분, 
즉감각능력과 상상력을 포함한다. 감각능력은 현존하는 
대상과 관련된 직관 능력이고 상상력은 현존하지 않는 
대상과 관련된 직관 능력이다. 

그러나 감각능력은 다시 외적 감각능력 [외감]과 내적 
감각능력[내감]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인간의 신체가 
물체적 사물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의 감각능력이고, 
후자는 인간의 신체가 마음에 의해 촉발되는 경우의 감각능력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내감이 (경험적 직관의) 
단순한 지각능력이며, 쾌와 불쾌의 감정과는 다른 것, 
다시 말해 어떤 표상의 상태를 보존할지 아니면 거부할지 
그에 따라 결정되는 주관의 감수성, 즉 사람들이 내면적 
감각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감각능력의 표상은 사람들이 그런 표상으로 의식하는 
한에서 특별히 감각지각이라고 불리며, 이때 감각은 동시에 주관의 상태에 대한 주의를 환기한다.

대조는 서로 대립하는 감각표상들을 하나의 동일한 개념 
아래에 나란히 세워서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대조는 서로 충돌하는 개념들이 결합될 때 성립하는 
모순과 구별된다. 

희귀한 것과 감춰진 것도 포함하는 새로운 것은 주의를 
증진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획득이고, 따라서 
감각능력은 그런 새로운 것으로 더 많은 힘을 얻기 때문이다.일상적인 것이나 습관적인 것은 주의를 소멸시킨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이 고대 유물 한 조각을 발견하거나 
접촉하거나 공공연하게 전시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은 사물의 자연적 진행에 따라 시간의 힘에 의해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추측해야 마땅할 사태를 생생하게 현재화한다.

대상이 현존하지 않는데도 직관하는 능력인 상상력은 
생산적이거나 아니면 재생적이다. 즉, 상상력은 경험에 
선행하여 대상을근원적으로 현시하는 능력이거나 아니면 
전에 가졌던 직관을 마음으로 다시 불러와서 파생적으로 
현시하는 능력이다. 순수한 공간직관과 시간 직관은 근원적 현시에 속하고, 나머지 모든 직관은 경험적 직관을 전제한다.

이 경험적 직관은 대상에 대한 개념과 결합된다면, 
즉 경험적 인식이 된다면 경험이라고 불린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상상을 만들어내는 한에서 상상력은 공상이라고 불린다.


상상력은 (다르게 말해서) 창작적(생산적)이거나 아니면 
단지 회상적(재생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산적 
상상력이 그야말로 창조적인 것, 
즉 전에 우리의 감각능력에서 결코 주어지지 않았던 
감각표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람들은 항상 
그런 상상력의소재를 밝힐 수 있다. 일곱 가지 색깔 중 빨
간색을 전혀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 색깔에 대한 감각을 
이해시킬 수는 없으며, 선천적으로 눈이 먼 사람에게는 
어떤 색깔에 대한 감각도 이해시킬 수 없다. 심지어 두 
색깔이 혼합되어 만들어지는 중간색, 예컨대 녹색도 
마찬가지다. 노란색과 파란색이 혼합되면 녹색이 나온다. 
그러나 이렇게 두먹이 혼합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상
상력은 녹색에 대한 최소한의 표상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상상력의 독창성(모방하지 않는 생산)은 만일 그것이 
개념과 조화를 이룬다면 천재라고 불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광신이라 불린다. 우리가 인간의 형태 
이외에 이성적 존재에 적합한 어떤 다른형태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은 주의할 만하다. 

예술가는 물체적 형태를 (말하자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현시할 수있기 전에 상상력 안에서 그 형태를 만들어야 하며, 이 경우 그 형태는 하나의 창작이다. 
이 창작이 (아마도 꿈에서처럼) 자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면 공상이라고 불리고, 이런 창작은 예술가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창작이 자의로 통제된다면 구성, 발명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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