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러 법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법원으로, 주로 보통시민의 삶과 관련된 사건을 다루는 곳이다. 
거기서는 ‘일반‘ 판사가민형사상 각종 사건에 대해서 재판을 한 다음 판결을 선고한다. 일반법원은 혁명 이전 유럽의 
보통법 시대부터 존재하던 민사법원의후손으로, 대륙법에서 판사라고 하면 보통 이 일반법원의 판사를가리킨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삼권분립이론에 따른 사법부의
독립은 일반법원의 독립을 의미한다. 일반법원 판사의 가장 기본적인 직무는 기본법을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이다. 

민족국가가 출현하면서 교회와 지방 영주, 일반 사인의 
재판권은 없어졌고, 일반법원이 모든 사건을 관할하면서 
국가의 법질서가 통일되었다. 여기에다가 법을 만드는 
기능까지 국가가 장악함으로써 사법제도 전체를국가가 
독점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법의 국가 
독점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반법원이다.

일반법원이 중세 보통법 시대의 영주법원과 교회법원, 
상사법원을 한데 모은 것이라면 파기법원은 프랑스 혁명 
이후 법 해석 문제만을 다루기 위해 새로 만든 특별법원이다.

일반법원은 민사사건에민법과 상법, 민사특별법을 적용하고, 민사소송법에 정한 절차에따라 재판한다. 형사사건은 
형법과 형사특별법을 적용하고 형사소송법에 정한 절차에 따라 재판한다. 결국 각각 민법, 상법, 형법, 민사소송법, 
형사소송법이라는 다섯 기본 법전과 이를 보충하는 법률을 주로 다루는 일반법원은 대륙법의 사법제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 대륙법 국가에는 행정법원이라는 또 하나의 법원이 있다. 일반법원과 전적으로 분리된 법원이다. 프랑스혁명 
이전의 일반법원에 당시 사람들이 가진 불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법원이 정부가하는 일에 자꾸 간섭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법원으로 대표되는 사법과 행정을 분리하는 
권력분립의 기치 아래 법원이 정부가 하는일을 
판단한다거나 정부에 특정 행위를 명할 권리를 
박탈해버렸다.

영국 법원이 아직도 정부에 의무이행명령을 내리거나 
행정부의 직무수행 행위 위법성을 판단하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프랑스에서는 판사가 법을 만드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가 하는 일에도 일체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으로써 삼권분립을 완성한 것이다.

입법기관이 모든 법의 원천이고 행정부도 법에 정한 한도 
내에서만 행위할 수 있으므로 사실 행정에 관한 판단을 
법원에 맡길 필요도 없다. 법에 어떻게 적혀 있는지만 보면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이런 판단을 하는 기관으로 
국무원(Council of State)이 있다. 원래 왕에게 조언을 
하는 기구였는데 점차 행정부내 최고기관으로 성격이 
바뀌었고, 행정행위의 적법성과 관련한 이의제기를 듣고 
판단하는 등 법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행정법원은 독자적인 절차법과 구제수단을 갖추었다. 실제로 적용하는법조문 자체는 몇 개 되지 않지만, 그동안 국무원이 내린 중요한 판결이 쌓여 오늘날 행정법이라는 독자적인 법 체계가 구축되었다.

프랑스법을 계수한 벨기에와 이탈리아 역시 국무원을 행정법원럼 운영하고 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역시 행정법원을 새로 만들었다.

대륙법에서 이처럼 일반법원과 행정법원은 서로 다른 
조직이고, 각각 독자적인 관할권을 행사한다. 한 사건이 
두 군데 모두 가는 일은 없다. 만약 성격이 모호한 사건이 
발생해서 행정법원으로 갈 경우 피고인은 그 사건은 
행정법원 관할이 아니라 일반법원의 관할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어쨌든 대륙법에서는 법원이 행정과 입법에 관여할 수 
없도록 구획을 나눈 반면에 영미의 보통법(common law)에서는 법원이 모든문제를 다루도록 하는 단일관할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중간쯤에있는 것이 라틴아메리카다. 

라틴아메리카는 기본적으로 대륙법을받아들였지만 미국의 영향도 강하게 받아서 일반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한 바 있다. 민사법은 몰라도 최소한 공법이나 헌법에 관한 한 미국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다. 법원이 법률의
위헌심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미국의 아이디어다. 
다만 아직까지 미연방대법원처럼 헌법의 수호자로서 
법원의 이미지가강한 것은 아니다. 대륙법의 원칙인 ‘법원은 다른 권력에 개입할 수없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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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극히 명료하다. 논의는 권위가 있으며, 
공감적이면서도 무비판적이지 않고,
매우 포괄적이다. 한마디로 이상적이다."


제프 맥머(Jeff McMahan), 옥스퍼드 대학교 도덕철학 
White‘s Professor

공리주의는 19세기 이래로 오늘날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윤리 이론으로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공리주의는 
여성평등, 동물 해방 등의 많은 도덕적 개혁을 이끌어 왔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서 철학적 급진주의 윤리 이론으로서 공리주의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면모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개혁성과 진보성은 불가피하게 전통적인 도덕적 견해와의 충돌을야기하였고, 
이는 공리주의에 대한 만만치 않은 반대를 낳았다. 
공리주의는 고문과 같은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개인의 개별성을 무시하며,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고, 
우리의 특수한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책무를 무시한다는 도덕적 반론들과, 공리주의가 극대화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혼란이 있고, 그런 가치에 기초한 
공리의 계산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공리의 개인 간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이론적인 반론들이 그러한 반대의 핵심 
논거들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러한 반론들에 관해서도 
일일이 명료한 형태로 답하고 있다. 공리주의에 대한 
반론과 함께 그에 대한 공리주의의 응답을 들을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또 다른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독자들은 공리주의에대한 찬반 양론을 함께 접하면서 
어느 편의 논증이 더 설득력 있는지에 대해숙고하고 
판정하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왜 법은 모든 감각 있는 존재에 대한 보호를 거부하는가? 
인류가 자신의 책임을 숨 쉬는 모든 것들로 확대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이미 노예들의 여건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돕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공급하는
 모든 동물들의 여건을 완화하는 것으로 끝낼 것이다.

제레미 벤담, 「형법의 원리」

취향에 대한 혐오는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허용되어야 하지만,
한 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취향에 대한 단순한 혐오그 이상의 더 좋은 이유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제레미 벤담, 동성애 기소 반대 논변

어떤 조건 하에서 그리고 어떤 한계 안에서 남성들이 
투표권을 인정받았건 간에 동일한 조건 하에 있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인정하지 않는 것이 정당화될 여지는 추호도 없다.

존 스튜어트 밀, 여성의 예속

공리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그것의 이론적 토대를 
발전시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행복을 증진하고 고통을 
완화하는 실천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다수 사람들이 인간 존재의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조건이라고 받아들이는실천 관행들을 비판했다. 
이런 도전들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벤담은 동물 학대를 금지하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동물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밀이 벤담의 선례를 
뒤따랐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회는 그러한 법률을 가지고 
있다. 벤담은 또한 죄수들의 열악한 여건을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더 좋은 빈민 구제 체계의 위대한 주창자였다.공리주의자들은 투표권 확대를 지지하였으며, 재산 소유의 엄격한 조건을 폐지하고 재산 소유를 여성에게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결혼한 여성들에게 재산을 허용하고 여성의대학
입학을 허락하는 등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캠페인을 
이끌었다. 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공리주의자들이 
추구했던 노선을 따라서 우리의 태도와 실천 관행들을 
변화시켜 왔다.

밀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국가는 개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기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벤담은 동성애 행위를 범죄시하는 법률에 
반대하였는데, 이것은그의 시대를 훨씬 앞선 것이었다. 

우리가 이 책의 6장에서 살펴보겠지만 공리주의의 개혁 
정신은 오늘날의 공리주의자들사이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대한 반대자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마르크스(Karl Marx)는 벤담을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방식에서 천재‘라고 조롱했고,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공리주의를 경멸적으로 ‘겁쟁이와 소심한 
사람들과 열등한 사람들을 위한 노예 도덕‘이라고 불렀다.

소설가들 중에도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찰스 디킨스, 
엘리자베스 개스켈, 올더스 헉슬리 등이 자신들의 소설에 
공리주의에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최근의 영국 
철학자인 버나드 윌리엄스는 공리주의에 대한 오랜 공격 
후에 ‘우리가 공리주의에 관해서 더 이상 듣지 않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윌리엄스가 그런 
논평을 한 지 이미 40년 이상이 흘렀지만, 우리는 여전히 
계속해서 공리주의에 관한 많은 것들을 듣고 있다. 

공리주의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계속해서 실천적 영향을 행사하고있고, 그것의 장점에대한 지속적이고 생생한 논쟁의 와중에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비판들을 넘어서 공리주의가 오래 지속되는 데는 
그럴 만한 좋은 이유가 있다. 

윤리학의 근본적 물음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며, 
정치철학의 근본적 물음은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이 두 물음에 대하여 공리주의는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 대답은 이렇다. 해야 할 옳은 것은 최선의 결과를 
낳는것이다. 여기서 ‘최선의 결과‘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영향받는 당사자들 모두에 대해서 고통을 제하고 남은 
행복에 있어서 가능한 한 최대의 순 행복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 대답은모든 가능한 상황들을 포괄한다.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동의하고 
목표로 삼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지향한다. 

어쩌면 그것이 공리주의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조차도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문제로 남아 있는 놀라운 
습성을 지니게 된 이유일지 모른다. 반공리주의 철학자 
필리파 푸트가 언젠가 지적한대로 ‘공리주의가 그르다고 
우리가 아무리 주장을 해도, 우리는 공리주의가 확실히 옳다는 느낌을 영원히 가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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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법 전통 - 비교를 통해 알아보는 대륙법과 영미법
존 헨리 메리먼.로헬리오 페레스 페르도모 지음, 김희균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전형적인 영미법 국가의 경우 관할이 한 개이고, 그 정점에 대법원이 있다. 이런 구조를 소위 피라미드 구조라 한다. 
이 피라미드구조의 아래쪽인 하급심에 얼마나 많은 
법원이 있고, 그들 사이의역할 분담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와 상관없이 사건의 최종 목적지는 대법원이다. 형사사건, 
자동차 사고나 계약과 관련된 민사사건, 행정부의 행위의 
위법성을 다투는 행정소송, 헌법상의 기본권 관련소송, 
행정법원의 보상 결정에 대한 이의제기와 같은 모든 
분쟁은 최고법원의 심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영미법 세계에서는형사나 민사, 행정 헌법 등 
다양한 분쟁에 관해 마지막 목소리를내는 곳이 대법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대륙법 세계는 조금 다르다. 일단 법원이 여러
종류가 있고, 그 각 법원이 다루는 문제가 다르며, 법원에 
배속된 판사, 절차, 각 법원별 심급 구조가 다르다. 
그중 한 법원에서 다룬 문제는 다른법원에서 다룰 수 없고, 다른 법원으로 항소할 수도 없다. 전형적인 영미법 국가의 
법원을 하나의 피라미드로 표현할 수 있다면, 대륙법 
국가의 법원은 피라미드를 여러 개 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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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범죄란 어떤 사람이 법을 어기고 이성의 올바른 
규칙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서 
그 사람은 그만큼 타락한것이며 자신이 인간 본성의 
원칙을 포기하고 해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셈이 된다. 그러한 범죄 이외에도 통상 어떤 사람에게 
손상을가하게 되는 일이 있으며 그 사람은 그러한 위반행위에 의해서 손해를입게 된다. 그 경우에 손해를 입은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이 공통으로가지는 처벌권 이외에도 손해를 가한 사람에게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있는 특별한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피해자 이외의] 타인은 그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경우에 피해자 편에 가담하여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받은 해악에 대해 충분히 만족할
만큼의 배상을 받도록 협조할 수 있다.

이처럼 상이한 두 개의 권리 중에서 하나는 범죄를 억제하고 유사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처벌하는 것인데, 
그 처벌권은 모든 사람에게있다. 다른 하나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인데, 이는 오직 피해를입은 당사자에게만 속한다. 이처럼 두 개의 권리가 상이하기 때문에 그직무상 
공통된 처벌권을 가지게 된 위정자는 종종 공공선이 법의 
집행을요구하지 않는 경우에 범죄의 처벌을 그 자신의 권한으로 면제할 수 있지만, 사적인 피해자가 받게 된 손해로서 그에게 지불되어야 하는 손해배상은 면제할 수 없다. 
곧 손해를 입은 자는 자신의 이름으로 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으며, 오직 그 사람만이 이를 면제할 수 있다.

동일한 이유로,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연법의 좀 더 경미한 위반행위도 처벌할 수 있다. 그 경우에 아마 ‘사형도 무방한가?‘라고 물을 법하다. 

그러한 물음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각 범죄는 
그 범죄가 가해자에게 불리한 교환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의 엄격성을 가지고 처벌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으로써 그는 후회를 하고 다른 사람은 유사한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자연상태에서 저질러질 수 있는 모든 범죄는 가급적 
국가에서 처벌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자연상태에서도 
처벌되는 것이 마땅하다. 여기서 자연법의 구체적인 내용 
또는 그 처벌의 기준을 논하는 것은 현재의 목적을 
넘어서기에 다루지 않겠다. 그렇지만 자연법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법 역시 합리적인 피조물이나 그 법의 연구자에게는 국가의 실정법만큼이나 이해하기 쉽고
명백하다는 점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더 명백할 수도 있다.
상반된 그리고 숨겨진 이해관계를 법 구절에 삽입하는 
인간의 황당한재주나 복잡한 기교보다 이성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사실여러 나라의 대부분의 
국내법들이 그러한데, 그 법들은 자연법에 기초한
한도에서만 올바르며, 마땅히 자연법에 따라 규제되고 
해석되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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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죽음 속에서 최고의 유한성에 
참여하며, 이 유한성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예수의 죽음 속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동일성 하나님이 
인간적인 것, 유한한 것 안에서 자기 자신 가운데 있고, 
이 유한한 것이 죽음 자체 속에서 하나님의 규정이 된다
(166). 

루터교회의 찬송가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 유한한 것, 천한 것, 약한 것, 부정적인 것이 신적인 계기(Moment) 자체"로서 "하나님 바깥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하나 됨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1966d,172).

하나님 자신이 죽음의 한계 밑바닥까지 내려가서 죽어가는 유한한 것과 자기를 일치시키는 바로 여기에 깊은 사랑이 
있다. 이런 점에서 "가장 높은 유한성은 시간적인 것 속에 
있는 현실의 삶이 아니라 죽음, 죽음의 고통이다. 
그것은 최고의 부정・・・ 그의 가장 높은 극단 속에 있는 유한성이다.... 하나님이 죽었다.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신적 관념의 가장 높은외화는 둘로 나누어짐(Entzweiung)의 가장 깊은 심연을 보여주는 두렵고 무서운 표상이다" 
(157-158). 그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신적 본성"이 
가장 깊이 계시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 죽음은 가장 깊은 사랑이기도 하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이 동일성이 바로 사랑이다. 
의식의 이 유한화(Verendlichung)가 그의 극단에 
이르기까지, 곧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다.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랑을 눈으로 볼 수 있다. 사랑은 
자기의 인격성, 소유등의 포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절대적 사랑 자체의직관이다." 성서는 이 사랑을 가리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되었다고 표현하며, 
희생제물로서 그의 죽음은 절대적 보상(Genugtuung)의 
행위로 표상된다"(166).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표상을 
반대한다. 각자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질 
뿐이며, 어떤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세속의 형식적·법적 관점이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영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은 "최고의 
유한화로서 자연적 유한성, 직접적 현존의 지양이고, 
외화의 지양이며, 제한(Schranke)의 해체이고, 자기를
자기 안에서 파악하는 정신의 계기다" (157-158). 

"죽음은 사랑 자체다. 절대적 사랑이 여기에 나타난다"(166).죽음은 하나님의 자기 외화의 가장 깊은심연이다. 

이와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높은 사랑‘이다. 그것은 죽음의 고통을 당하기까지 자기를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자기를 유한한것과 결합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깊은 직관(바라봄, Anschauung)"이다(1966d, 158).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죽음을 통해, 인간이 당해야 할 치욕과 고통과 죽음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에게 속한 영광과 생명이 인간의 것이 된다.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의 교환이 일어난다. 모든 인간의한계 상황인 죽음, 세계사의 "해골 골짜기"가 하나님 자신의 것이 된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이루어진다. "죽음은 화해하는 것(das Versöhnende)이다. 죽음은 사랑 자체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세계와 화해했고, 자기를 영원히 자기 자신과 화해했다"(1966d,166).

헤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본성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죽음의 한계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을 유한한 존재로 외화하며, 유한한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는 유한한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한다. 곧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과 제한성과 천함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 객체와 주체, 하나님과 세계의 
변증법적 통일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성육신, 곧 "인간의 형태 안에 있는 하나님"은 이를 나타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한한 것, 제한된 것 속에 머물 수 없다. 
그는 유한한 것의 부정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헤겔은이 하나님의 활동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 곧 "자연적 유한성과 직접적 현존의 지양, 
외화의 지양, 차단기(Schranke)의 폐기"다(19664 159).

한마디로 그것은 "이 부정적인 것의 부정적인 것"이요, 
이것이 곧 정신이다(163).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일어난부정의 극복, 곧 "부정의 부정은 신적 본성의 계기다"(166). 여기서 우리는 헤겔이 정-반-합을 말하지 않고, 부정적인 
것의 부정을 말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감성적 개체" (ein sinnliches Individuum)였다. 
그는 유한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통해 감성적 
개체성과 "인간의 유한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넘어간다. 죽음은 "영광, 영화롭게 됨으로 넘어감"이다(171). 

"인간적인 것이 벗어지고, 신적인 영광이 다시 나타난다 
죽음은 인간적인것, 부정적인 것을 벗어버럼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죽음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다. 자연적 현존으로서 인간이 내맡겨져 있는 것의 가장 높은 점점이다"(1966d 172).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죽었다.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사람을 위한 이 화해가 계시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적 역사다." 

세계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과 세계의 화해가 하나님 자신의 활동을통해 실현되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하나님 자신인 삶(Leben)이다" (174). "하나님은 자기 
자신 속에서의 이 활동이다" (166). 헤겔은 세계사를 
구성하는 하나님의 이 활동의 정점을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인지한다.

우리는 앞에서 고찰한 헤겔의 통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깊은 영성을 볼 수 있다. 필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헤겔의 사색보다 더 깊은 사색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철학자들은 필자의 생각을 너무 
주관적인 신학적 해석이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필자의 주관적 해석이 아니라 약간의 
연결 부분을 제외하고, 헤겔 자신의 문장을 결합시킨 것이다.물론 헤겔이 튀빙겐슈티프트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철학에 심취했음은 사실이다.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외에 고대 그리스 철학 칸트와 스피노자의 철학, 루소의 사회사상을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여전히 신학이 헤겔의 주 전공 과목이었다. 원했든지 원하지 않있든지 간에, 그는 신학과 성서를 공부했다. 그의 문헌 곳곳에서 적절하게인용된 성서 구절, 신학적 내용들에 대한 언급은 성서와 신학에 대한 그의깊은 지식을 보여준다. 그는 튀빙겐슈티프트에서 경직된 신학 이론과 형식화된 교리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늙은이 "der Alte) 혹은 "두더지"라는 별멍을 얻을 정도로 기독교의 핵심 진리에 대해 깊이 사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신현상학》 서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의 깊은 사색을 보여준다. 
"죽음은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다. 죽은것을 붙들고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힘을 요구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황폐시킴으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보존하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견디고 그속에서 자기를 지키는 삶이 정신의 삶이다. 정신은 절대적 갈가리 찢어짐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자기의 진리를 획득한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에서 눈을 돌려버리지 않고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며, 그가운데 머물러 있음으로써 자기의 힘을 나타낸다. 이 머물러 있음은 그것을 존재로 전환시킬 수 있는 마술적 힘(Zauberkraft)이다" (1952,29-30).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깊은 사색과 명성이 헤겔의 철학 밑바닥에 깔려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철학은 하나님의 성육신, 참 인간(vere homo)인 동시에 참 하나님 (vere Deus), 곧 "하나님-인간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 속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등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기초한 기독교 종교철학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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